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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241년 된 독일의 음악 출판사 ‘쇼트뮤직’, CEO 페터 한저 슈트레커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 초저녁부터 천둥과 폭우가 몰아쳤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마지막을 예감했다. 참기 힘든 복통과 폐렴이 나아질 리 없었다. 이틀 전에 사제를 불러 마음의 준비도 마쳤다. 이때 소포가 하나 배달됐다. 독일 마인츠(Mainz)산 포도주였다. 베토벤과 악보 출판계약을 맺고 있는 ‘쇼트(Schott)’사가 보낸 것으로 빛깔만 봐도 최상의 맛이 느껴졌다. “섭섭하구나, 섭섭해. 너무 늦었어….” 이 혼잣말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전해진다.



“말 타고 온 바그너, 작곡료 선불 달라며 … ”

 쇼트뮤직은 베토벤이 태어난 1770년, 독일 마인츠에 세워진 음악출판사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 등은 물론 힌데미트, 오르프, 스트라빈스키 등 현대 클래식 거장들의 저작권을 가진 곳이다. 241년 가족기업의 역사는 음악사와 함께 흐른다. 아름다운 한국의 늦가을, 쇼트의 7세대 최고경영자 페터 한저 슈트레커(Peter Hanser Strecker·71) 회장이 클래식과 휴머니즘을 노래한다.



글=이소아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쇼트’라는 이름이 좀 낯설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클래식 출판사라고 보면 된다. 좋은 작곡가를 발굴해 저작권을 사고, 악보를 출판하는 거다.”



●가족기업인데 성이 왜 쇼트가 아닌지.



 “창업자인 베른하르트 쇼트에겐 후손이 없어 핏줄은 아니지만 적당한 후계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이 내 할아버지인 루트비히 슈트레커다.”



 페터 슈트레커 회장을 만난 곳은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였다. 음악서적 출판사 ‘음악세계’의 임대악보 사업부인 ‘KMS(코리아 뮤직 서비스)’와는 2007년부터 파트너십을 이어오고 있다. 나이가 일흔이 넘은 만큼 비행기로 12시간 걸리는 한국을 자주 오가긴 어렵지만 이번엔 한달음에 달려왔다. 쇼트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정식 회원으로 등록됐기 때문이다. 6년 전부터 공을 들인 만큼 기쁨도 남다르다.



●회원 등록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클래식 작품들이 한국에서 법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 거다. 일례로 부산시립교향악단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곡을 연주하기 위해 쇼트에서 악보를 빌려갔다. 작곡가의 저작권이 쇼트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절차를 거친 거다.”



페터 한저 슈트레커(왼)와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역사가 241년이다. 언제 가장 자부심을 느끼나.



 “베토벤, 바그너 같은 작곡가를 발굴하고 그의 작품들을 보호한 것이 가장 뿌듯하다. 독일 국민도 자랑스러워한다. 본사가 있는 마인츠는 인구가 20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인데 쇼트는 필수 관광코스다. 관광객들이 회사에 들러 역사를 듣고 클래식 박물관도 구경하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 마인츠는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고향이기도 하다.”



●금속활자는 한국이 먼저 발명했다.



 “아, 알고 있다. 사실 30년 전에 한국에서 쇼트 악보를 제작했다. 가격에 비해 품질이 최고였다.”



●어릴 적 꿈이 있었을 텐데, 언제 사업을 물려받기로 결심했나.



 “다섯 살 때 결심했다. 아주 어린 꼬마였을 때 할아버지가 찾아와서 질문을 했다. ‘페터야, 너 혹시 내 후계자가 되지 않겠니?’ 후계자가 뭔지는 잘 몰랐지만 그때 할아버지가 타고 왔던 벤츠 자동차를 보고 홀딱 반해 ‘되겠다!’고 했다. 출판사 발행인이 되면 이렇게 좋은 차를 매일 타겠다 싶었던 거지.”



●왜 아버지가 물려받지 않고.



 “전쟁(제2차 세계대전) 때 돌아가셨다. 나밖에 없었다.”



●해 보니 어떤가.



 “200년 넘게 가족기업으로 운영하다 보니 화기애애하다. 가족 내에서 큰 지지를 받고 이런 분위기가 260명 직원에게까지 미치는 것 같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매일같이 출근해 일할 수 있는 게 정말 감사하다.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하게 일하고 싶다. 공자님 말씀이 맞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내 일이 인생에 가장 큰 즐거움을 준다면 그 일은 노동이 아니다. 43년 동안 노동을 안 하고 있으니 난 아주 행복한 사람이다.”



1825년 1월 22일 베토벤이 쇼트 출판사에 보낸 편지. 교향곡 9번 ‘합창’과 ‘장엄미사’의 저작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이다(위). 아래는 ‘잔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Op.112)를 베토벤이 직접 수정한 악보.
●쇼트가 지원해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은 뭔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바그너의 오페라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로드리고의 ‘아랑페즈 기타협주곡’, 오르프의 ‘카르미나 브라나’ 등이 가장 사랑받는 대표작들이다.”



●저작권은 작품별로 계약하나.



 “작품 몇 개에 대해서만 계약을 할 수도 있고, 작곡가를 딱 찍어서 죽을 때까지 쓰는 작품을 모두 사들일 때도 있다. 이 경우엔 작곡가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작곡에만 오롯이 전념해야 할 의무 같은 조항이 있다.”



●‘싹이 보이는’ 작곡가를 어떻게 알아보나.



 “하하. 그 시스템이야말로 영업비밀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곡가를 미리 찾아내는 ‘타이밍’이다. 웬만한 음악인들은 모두 재능이 넘쳐 보이니까. 이 작곡가가 나중에 잘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직감과 본능,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소위 천재적인 아이들은 17~18세가 되면 빛을 낸다. 그때쯤 픽업을 한다.”



●한국에도 뛰어난 클래식 인재가 많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개인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과 정경화를 좋아한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율리우스 베르그가 아주 친한 내 친구인데, 부인이 한국인 첼리스트(성현정씨)다. 부인 생일이라고 나랑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 간다고 하더라. 무엇보다 쇼트가 자랑하는 펜데레츠키의 후계자가 류재준 아닌가!”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76)는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현대음악 작곡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모국인 폴란드에서는 ‘음악 대통령’으로 존경받는다. 자신의 교향곡 5번에 ‘한국’이라는 부제를 붙일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펜데레츠키는 “내 작품이 ‘서울국제음악제’ 프로그램에 다섯 곡이나 들어가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아끼는 제자와 소중한 친구들이 있는 한국에서 내 곡을 소개하게 돼 영광”이라고 감격했다.



바그너가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원본을 보내면서 작품에 대해 설명한 메모(왼쪽). 쇼트뮤직 본사에 있는 바그너 홀. 바그너의 초상과 사진, 직접 쳤던 피아노와 악보가 보관돼 있다.
●펜데레츠키와 한국에서 연주회 할 계획은 없나.



 “아주 좋은 생각이다. 한국의 KMS와 의논해 봐야겠다.”



●한국은 창작에 대한 지원이 인색한 편이다. 어떻게 클래식 저변을 넓힐 수 있을까.



 “중요한 건 창작으로도 먹고살 길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창작물, 인간 정신세계를 담은 작품들이 인정받고 보호돼야 한다. 이게 바로 저작권 보호다. 한국은 연주자들의 실력은 최고인데 저작권 보호는 낮은 수준이다. 둘 사이에 균형을 찾아야 한다. 저작권 보호가 보편화되면 자연스럽게 지원과 후원도 따라온다.”



●요즘은 인터넷 공짜 다운로드가 만연해 있다.



 “맞다. 이런 현상은 그린피스의 자연환경보호와 비교할 수 있다. 그린피스가 목적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켰듯이 창의적인 작업이 왜 중요하고, 왜 존중받아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독일에선 이런 의식계몽에 많은 돈을 투자한다. 쇼트도 ‘올바른 연주, 음악을 존중합시다(Fair Play, Respect Music)’란 슬로건으로 캠페인을 하고 있다. 독자적으로도 하고 독일 저작권협회나 음악단체들과 함께 하기도 한다.”



●쇼트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가치도 그런 건가.



 “음악 출판사라는 게 일반적인 기업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문화를 키워가는 한 연구기관으로서 중요한 의무가 있다. 그 과제를 신중하고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 기업의 손익을 떠나 인본주의 정신에 입각한 삶이 중요하다.”



 슈트레커 회장의 철학은 기업의 활동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쇼트는 웬만한 정부의 ‘교육부’ 못지않게 음악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2004년에 세운 ‘기초음악 교육연구소’에선 생후 4개월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 아이들, 음악교사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유명한 음악교수, 교사들과 함께 어린이들을 위한 음악과 율동, 교재들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아이들은 연구소 부속 뮤직스쿨에서 각종 악기를 배울 수도 있다. 최근엔 ‘모든 세대를 위한 뮤직 아카데미’라는 재단을 만들어 ‘어르신과 함께하는 노래’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독일 내에서 호응이 뜨겁다.



쇼트뮤직이 만든 ‘기초음악교육 연구소’에서 한 아기가 타악기를 가지고 음악놀이를 하고 있다(위). 페터 슈트레커 쇼트 회장이 식수가 부족했던 에티오피아 마을에 펌프를 설치한 뒤 물을 퍼올리고 있다.
●음악교육에 힘을 쏟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음악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기본적인 권리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음악을 배운 사람들이 사회 지도층이 될 확률이 더 높다고 하더라. 음악은 인간성을 고취시키고 미래를 살아갈 힘을 준다.”



●한국에선 입시를 위해 악기를 배우기도 한다.



 “성적을 위해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음악을 배운 아이들이 공부에 더 집중하고, 더 사회성이 좋고, 더 활발한 것은 사실이다. 악보를 보면서 두뇌훈련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에선 3~4개월 된 유아를 위한 기관도 있다.”



●무슨 음악을 좋아하나. 클래식만 듣나.



 “하하하. 그런 질문은 어머니에게 ‘어떤 자식이 제일 좋으냐’고 묻는 것과 같다. 재즈, 올드뮤직, 클래식 등 모든 음악을 좋아한다. 한국의 북 음악은 신명과 영감 그 자체다. 한국의 전통음악들이 해외에 많이 안 알려진 게 참 아쉽다.”



 슈트레커 회장은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지하 벙커에서 태어났다. 태교 음악은커녕 제대로 된 음악교육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프로급의 오르간 연주실력을 뽐낸다.



●오르간은 어떻게 익혔나.



 “내 롤모델은 인도주의자였던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다. 그는 의사이자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였다. 닮고 싶어서 배웠다.”



●남을 돕는 데 관심이 많겠다.



 “30년 전,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내 인생이 바뀌었다.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는 사람들을 보고 가슴이 메었다. 1996년부터 에티오피아 후원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부자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필요한 게 적은 사람이다. 음악이 주는 감동은 빈부 격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게 음악의 정신이다.”





바그너와 똑 닮은 슈트레커 회장 … “140년 전 그에게 큰 돈 줬죠”



인터뷰를 하던 페터 슈트레커 회장이 갑자기 옆으로 휙 돌아앉았다.



 “누군가 닮지 않았나요?”



 큼지막한 머리에 멋대로 뻗은 은발, 매부리코, 그리고 툭 튀어나온 턱. 그러고 보니 음악 교과서에서 많이 본, 영락없이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옆모습이다! 슈트레커 회장은 “베레모까지 쓰면 정말 똑같다고들 하더라”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실제로 쇼트뮤직은 ‘가장 독일적인 오페라’로 19세기를 풍미했던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와 깊은 인연이 있다. 바그너는 베토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남달랐다. 17세의 젊은 바그너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피아노 작품으로 편곡해 쇼트음악사에 들고 갔다가 출판을 거절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흐른 1869년, 바그너는 말을 타고 와 쇼트 문을 두드렸다. 손에는 악보 꾸러미가 들려 있었는데 그동안 빚에 쪼들려 마인츠와 비스바덴, 빈을 전전하며 완성시킨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였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슈트레커 쇼트 회장(페터 슈트레커 회장의 할아버지) 앞에서 직접 작품을 연주해 보였다. 감명을 받은 회장은 그 자리에서 출판을 결정했고, 이때부터 바그너와 쇼트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어느 날, 바그너는 쇼트사에 "내가 오페라를 하나 쓰고 있는데, 선불을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엔 작품이 완성되고 난 뒤 저작권 사례를 하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다. 게다가 작품 ‘파르지팔(parsival)’은 공연을 올릴 연주회장조차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쇼트사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슈트레커 회장은 반대 의견들을 일축하고 마르크 금화 10만 개를 흔쾌히 내줬다. 오늘날 화폐로 환산하면 약 100만 유로, 한화로 15억원이 훨씬 넘는 거액을 투자한 셈이다. 이 사건은 음악계의 화제가 돼 ‘바그너의 작품들이 두터워질수록 슈트레커씨는 점점 야위어 간다’는 내용의 캐리커처가 그려지기도 했다.



 1882년 7월 26일, 파르지팔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성대히 막을 올릴 수 있었다. 쇼트사는 바그너 사망 후 30년인 1913년까지 바그너 전곡의 저작권을 관리했고, 이를 기념해 본사 안에 바그너의 원본 악보와 피아노 등을 모아 ‘바그너 홀’을 따로 지었다.





j 칵테일 >> “아버지 목숨 빼앗은 2차대전, 모차르트 미출판 악보까지 … ”



전쟁은 쇼트뮤직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마인츠의 쇼트 건물은 심하게 폭격을 맞았다. 사람도, 물건도 소중한 많은 것이 포화 속에 사라졌다. 슈트레커 회장은 ‘잘못된’ 정치에 치를 떨며 슬퍼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황을 말해 달라.



 “직원들은 떨어지는 폭탄을 피해 인근 절벽 창고로 악보와 문서들을 날랐다. 인쇄기는 마인츠에서 20㎞ 떨어진 조그마한 마을까지 끌고 가 숨겼다.”



●결과는.



 “직원의 70%가 목숨을 잃었다. 내 아버지와 삼촌들도 이때 돌아가셨다. 보물같이 여기던 모차르트의 미출판 악보는 프랑크푸르트 은행 금고에 보관해 뒀지만 결국 완전히 불타 사라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21년 전 독일이 통일했다. 한국에서도 그대로 이뤄지길 바란다. 중국의 차기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이 한반도 통일에 좋은 역할을 할 거다. 인내심을 가지길…. 그리고 행운을 바라면 된다.”





WhatMatters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




“휴머니즘과 평화다. 누군가에게는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음악을 평화 정책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만약 좀 더 많은 음악가가 있었더라면 우리는 현대사에서 그토록 끔찍한 전쟁들을 겪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하이든이 1790년에 모차르트를 만나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쓰는 언어(음악)는 전 세계에서 통한다’고. 음악은 정말이지 세계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언어다. 음악을 통해 훌륭한 인간성이 지켜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내겐 그런 믿음과 자부심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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