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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거장의 손은 따뜻했다

정진홍
논설위원
#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지휘자를 손꼽으라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말할 것이다. ‘유리 테미르카노프’라고. 또 누군가 내게 가장 존경하는 지휘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 역시 주저함 없이 말할 것이다. 테미르카노프라고. 또다시 누군가 내게 가장 흠모하는 지휘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이 또한 거침없이 말하리라. 유리 테미르카노프라고! 사이먼 래틀, 마리스 얀손스, 오자와 세이지, 정명훈 등 당대의 저명 지휘자들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테미르카노프를 연거푸 세 번씩이나 손꼽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 지난 화요일과 수요일 이틀에 걸쳐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테미르카노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첫째 날은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을, 둘째 날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객석에 선사했다. 객석은 감동의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테미르카노프가 지휘하는 모습은 사람을 매혹시킨다. 포디엄 위에 선 그는 위엄 있지만 온화한 카리스마 그 자체다. 테미르카노프는 지휘봉을 쓰지 않는 지휘자로 이름이 높다. 그래서 ‘맨손의 거장’이라 불린다. 테미르카노프의 손은 정말이지 신기할 정도다. 그는 오로지 손만으로 오케스트라를 쥐락펴락한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가르면 음악이 탄생한다. 그야말로 진정한 거장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 유리 테미르카노프! 그가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후임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신인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1988년이었다. 그해는 세계사적 격변을 앞둔 폭풍전야(暴風前夜)였다. 그후 일년이 채 안 돼 역사의 격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89년 동유럽의 소비에트 블록이 붕괴된 후 마침내 91년 12월엔 70여 년을 지속해온 소비에트연방 즉 소련이 해체됐다. 38년생인 테미르카노프는 나이 오십이 넘도록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인생의 삼분의 이를 살았다. 반세기를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깃발 아래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체제하에서 20년 넘게 인생의 삼분의 일을 살았다. 하지만 그 어떤 이념과 체제도 그를 삼키지 못했다. 그는 이념의 사슬과 체제의 위압 앞에 굴하지 않고 관통해온 예술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온 삶으로 웅변한 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한다.



 # 20년 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을 포함해 적잖은 소련의 예술가들이 앞다투어 서방세계로 떠났다. 실력은 있지만 가난했던 러시안 아티스트들의 거대한 엑소더스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테미르카노프는 조국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79년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로 초청받았지만 당시 소련 당국이 출국을 금지해 좌절했던 경험이 있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세월이 바뀌었으니 그때의 일이 분해서라도 혹은 그때의 억울함에 대한 앙갚음으로라도 붉은 깃발 내려진 그 땅을 떠날 만도 했지만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이름을 바꾼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오히려 더욱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곤궁과 피폐라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여러 해를 버텨내야 했다. 그는 얼마든지 더 나은 조건을 따라 떠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방세계로 자신의 삶의 근거를 옮기지 않은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머니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듯이, 내게는 조국이 그러했다.” 나는 조국이 무엇인가에 관해 말할 때 이 이상의 명문(名文)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를 더욱 마음 깊이 흠모한다.



 # 3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멋있었다. 땀에 젖은 지휘복을 갈아입고 말쑥한 양복을 걸친 채 나타난 테미르카노프에게 말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 진정으로!” 그 말을 듣는 그의 온화한 눈빛은 형형했고 맞잡은 거장(巨匠)의 손은 따뜻했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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