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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스탈린 “북한, 중공군 후방기지로” 지령 … 분단,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지난 2일 노환으로 타계한 한국과 동아시아 전문가 로버트 스칼라피노 전 UC버클리 교수를 평생의 은사로 기리며 못 잊는 이가 있다. 이정식(80) 미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겸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가 그다. 경희대 특강을 위해 방한한 이 교수를 6일 만났을 때 그는 스칼라피노와의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출간하던 1973년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스칼라피노는 어떤 인물이었나요.

 “UCLA 정치학과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다른 대학에서 하려고 물색하고 있던 차에 스칼라피노 교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본인이 동양의 각국 공산주의를 연구하려고 하는데 자신의 조수가 되어 달라는 것이었어요. 곧바로 UC버클리 박사과정에 등록해 그의 제자가 됐고, 그게 내가 한국현대사 연구에 입문한 계기가 됐으며, 스칼라피노와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공저로 내는 결실도 보았습니다.”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등은 들어봤는데 런던 외무장관회담은 처음 듣습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은 2차 대전 승전국인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여 전리품을 어떻게 나눌지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코리아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해 한국 전문가들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교과서에도 물론 실려 있지 않고요. 대개 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가 한반도에 관한 모든 것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그보다 3개월 전인 45년 9월 12일부터 10월 2일까지 런던에서 먼저 3상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가 한반도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어떤 점에서 결정적입니까.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 때 연합군으로 함께한 협력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 미온(微溫) 상태였는데, 런던 외무장관회담이 열리며 냉동 상태로 급변한 것입니다. 사실상 미소 냉전의 시작이라 할 수 있어요.”

 -런던 외무장관회담의 쟁점은 무엇이었나요.

 “소련은 전후 일본의 통치에 참여하길 원했으나 미국이 거절합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북반부를 원했던 소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련을 자극한 것은 아프리카대륙 북단 리비아의 트리폴리 지역에 관한 것입니다. 소련이 트리폴리 지역을 할양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 또한 영국과 미국에 의해 거절당합니다. 런던 외무장관회담 기록을 보면 당시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러시아는 지중해에 상선(商船)들을 위한 항구를 가지길 원한다는 발언을 한 후 이틀 동안 이 점을 강하게 역설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졸랐다’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일 겁니다. 소련은 입구가 좁은 흑해에서 벗어나 지중해에 해군기지를 갖기 원했습니다. 상선을 위한 항구라고 했지만 뻔한 얘기지요. 소련 해군이 전 세계로 세력을 뻗치는 기지를 얻으려고 했는데 영국과 미국이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

 -그것이 소련의 한국정책과 어떤 연관이 있나요.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장관이 미국·영국의 장관과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싸웠던 게 45년 9월 15~16일이었어요.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 부딪힌 후 소련의 한반도 정책과 중국 정책이 완전히 180도 바뀌게 됩니다.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린 게 바로 그 직후이지요. 미국과의 보조를 맞추려는 정책을 포기한 겁니다. 스탈린의 중국정책도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어떻게 바뀌었다는 뜻인지.

 “나는 당시 중국의 만주, 즉 동북3성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45년부터 48년까지 만주에서는 우리가 팔로군이라고 불렀던 공산당과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당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어요. 중국 내전이지요. 그런데 45년 8월 무렵만 해도 스탈린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연합하려고 했어요. 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후 만주로 진군을 했는데, 스탈린은 당시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이길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내전 포기를 공산당에 지령합니다. 그러나 런던 외무장관회담에서 미국과의 협조관계가 대결관계로 바뀌게 된 45년 10월 스탈린의 중국정책이 완전히 바뀝니다. 스탈린은 팔로군 30만 명의 만주 진출을 명령했던 것입니다. 이후 만주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팔로군과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어요. 처음에는 국민당군이 열세였어요. 그러다가 국민당군이 새로운 병력을 투입해 팔로군을 밀어버렸습니다. 불리한 형세에 놓인 중국 공산군은 46년 5월 북한 지역으로 퇴각합니다.”

 -중국 내전이 북한으로 확산되었다는 겁니까.

 “46년 5월부터 북한은 중국 공산군의 후방기지로 변한 겁니다. 스탈린의 지령에 의한 것이지요. 북한은 중국 내전의 연장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6·25전쟁 때 만주가 미군이 넘어갈 수 없는 지역이었던 것처럼 46년 5월부터 48년까지 북한은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범할 수 없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습니다. 북한으로 들어간 팔로군은 소련군의 훈련을 받으며 재편됐고, 이후 국민당군을 물리칠 힘을 비축했습니다. 북한은 46년엔 팔로군의 대피소였다가 47년부터는 국민당군에 반격을 위한 기지로 변합니다. 북한을 팔로군의 후방기지로 제공한 스탈린의 조치로 인해 한반도의 분단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이런 상황의 변화를 알았나요.

 “남한 주둔 미군정보처가 팔로군의 북한 이동 상황을 포착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 남하한 피란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정보원들을 통해 북한 각지에 나타난 팔로군들, 그들이 받은 훈련 상황, 그리고 기차를 통한 팔로군들의 이동 상황 등이 미군 정보보고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45~48년 만주와 북한 은 스탈린의 독무대였군요.

 “그렇습니다. 스탈린은 공산진영의 황제였어요. 공산진영의 이익을 위해 필요에 따라 자기가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북한을 중공군의 승리를 위해 제공 내지는 사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상한 일이 있다면 우리가 아직까지 당시 만주에서의 사태가 북한에 미쳤던 영향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우리 교과서에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46년 6월 3일)을 분단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그에 대비해 김구의 통일협상을 위한 북한행(48년 4월)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는데요.

 “국제사적 시야에서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해야 합니다. 해방정국은 우리 교과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 손이 뒤흔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잘 몰랐던 진실이 운명을 결정했습니다. 한반도 분단의 수수께끼는 소련의 세계정책의 변화를 통해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 키를 쥔 인물이 스탈린입니다. 해방 직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열린 런던 외무장관회담과 스탈린의 대북한 비밀지령, 그리고 북한의 중국 팔로군 후방기지화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야 비로소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북한이 중국 공산화의 후방지역, 내지는 연장지역으로 변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이 합해 통일을 이룬다는 꿈은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스탈린은 만주를, 그리고 나아가서 중국을 국민당과 미국에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후학들에게 한마디 부탁합니다.

 “남한에서 일어난 일들의 발생 이유를 남한의 테두리 속에서만 찾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의 영향을 알아야 합니다. 나라가 작으니까 한국 연구가 비례적으로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한국현대사를 제대로 연구하려면 한국 자료는 물론 중국·일본·러시아·미국 자료를 찾아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총체적인 그림을 그리기가 힘듭니다. 시야를 되도록 넓게 가져야 하고, 러시아·중국·미국에서 일어난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특히 해방 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일어난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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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