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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실사구시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사실에 의거해 진리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이 용어는 서기 1세기경 후한(後漢)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 열전에 처음 나온다. 유덕이 옛것을 좋아해 학문을 닦고(修學好古) 사실에 의거해 진리를 탐구했다는 것이다. 조선의 영조는 재위 5년(1729) 2월 종부시정(宗簿寺正) 양득중(梁得中)이 ‘실사구시’가 진정한 격언(格言)이라고 말하자 승지에게 써 오게 해서 벽에 걸어 놓았다. 양득중은 당시 노론(老論)에서 자신들의 당파 이익 옹호를 “세도를 떠받치고 사문(斯文:성리학)을 보위하는 것〔扶世道衛斯文〕”이라고 포장하는 것을 허위이자 가식이라면서 그 반대 논리로 실사구시를 제시한 것이다.



 청나라 건륭(乾隆:1735~1796), 가경(嘉慶:1796~1820), 도광(道光:1820~1850) 연간의 고증학자(考證學者)들을 건가학파(乾嘉學派)라고 부른다. 이들은 『논어(論語)』를 비롯한 경서(經書)에 대한 고증을 주요 학문 대상으로 삼으면서 훈고학(訓<8A41>學)을 중시하는 학문 태도를 실사구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주족이 통치하는 상황에서 경전 해석의 가장 중요한 의리(義理) 문제는 현실 정치 비판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었기에 뒤로 미루었다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청 말의 개혁 사상가 강유위(康有爲:캉유웨이)는 『자편연보』에서 “집에 대동원(戴東原:1723~77) 같은 고증학자의 저서가 가득했지만 ‘도대체 또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서…고증학을 버리고 진심으로 수양했다”고 말하고 있다. 강유위가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에서 공자를 개혁사상가로 규정한 것이나 중국의 전통과 제도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변법자강(變法自强)을 주창한 데는 이런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



 엊그제 베이징 행정학원 입구에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대형 비석이 서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모택동은 1938년 10월 ‘민족전쟁에 있어서 중국 공산당의 지위(中國共産黨在民族戰爭中的地位)’라는 연설에서 “공산당원은 마땅히 실사구시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모택동 선집』 제2권)”고 말했다. 모택동은 집권 후 실사구시의 전(專)보다는 이념인 홍(紅)을 앞세운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등으로 중국을 나락에 빠뜨리지만 그의 뒤를 이은 등소평이 실사구시를 제창하면서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의 주요 지주가 되었다. 아직도 전(專)보다 홍(紅)에 매달리는 우리 정치권이 음미할 대목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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