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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⑫ 선양(瀋陽)

중국의 행정구역은 성(省)-현(縣)-향(鄕) 3등급 체제다. 성은 보통 규모의 한 나라와 맞먹는 규모다. 현(縣)은 한국의 도(道)와 비슷한 크기다. 성과 현 사이에 지구(地區)급 행정구역을 설치했다. 중국에는 지구급 도시만 287개다. 1인당 GDP와 인구수를 기준으로 1, 2, 3선 도시로 나눈다. 법적 기준은 없다. 선양(瀋陽)은 2선 도시의 선두주자다. “동북을 취한 자,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 있다. 동북의 요충인 선양의 역사를 살펴봤다.



만주족에겐 남하 교두보, 일본에겐 침략기지, 공산당에겐 국공내전 전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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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양(羊)의 축복 깃든 풍요의 도시



청나라 초기 세워진 선양 고궁의 동쪽에 위치한 대정전(大政殿)과 우익왕과 좌익왕 및 팔기(八旗)의 건물로 이루어진 십왕정(十王亭). 북방 기마민족의 이동식 텐트를 본 뜬 건물로 만주·몽골·한족의 건축양식이 융합돼 있다. [중앙포토]


예부터 동양에서는 도시의 이름을 지을 때, 강의 북쪽에 자리잡은 도시에는 양(陽), 산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에는 음(陰)을 붙였다. 한강(漢江) 북쪽에 도성을 세운 서울의 옛이름이 한양(漢陽)이었던 이유다. 선양은 ‘심수(瀋水)’로 불리던 훈허(渾河)의 북쪽에 자리잡아 붙은 이름이다. 만주족들은 ‘흥성하다’는 뜻의 만주어 무크덴(Mukden)으로 불렀다. 중국인들은 양띠 해 설날이 되면 삼양개태(三羊開泰)란 인사말을 주고받는다. 『주역』의 괘 ‘삼양개태(三陽開泰)’에서 나온 말이다. 선양은 ‘신성한 양(神羊)’의 중국식 발음인 선양과도 같다. 양의 전설은 멀리 춘추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양은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요충지였다. 군사 관측시설인 후(候)를 설치해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켰다. 군인 가족들을 이주시키고 성을 쌓아 ‘후성(候城)’이라 불렀다. 후성에는 착하고 부지런한 나무꾼 소년이 있었다. 하루는 나무를 하던 중 울부짖는 짐승의 비명을 들었다. 흉폭한 이리가 작은 양을 덮치기 직전이었다. 놀란 양은 도망치다 등나무 넝쿨에 얽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소년은 나무막대로 이리를 쫓아버렸다. “앞으로 조심하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소년은 꼬마 양을 넝쿨에서 풀어주며 말했다. 며칠 뒤 새벽에 소년은 산에서 다시 양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살펴보니 큰 양 한 마리와 새끼 양 두 마리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울고 있었다. 맹수가 주위에 없는 것을 확인한 소년은 그냥 지나쳤다. 그날 밤 소년은 세 마리 양의 꿈을 꿨다. 나이 든 양이 소년에게 선행에 보답을 받을 것이라며 감사를 표시했다. 잠에서 깬 소년은 기이한 양의 꿈 이야기를 주위에 전했다. 이 이야기는 곧 모든 성안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로부터 수십 년간 후성에는 농사에 적합한 날씨가 이어졌다. 풍년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소년의 양을 ‘신성한 양(神羊)’이라고 불렀다. 성 이름도 후성에서 신양성(神羊城)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청 만주족의 중원 공략 교두보



병자호란의 주역인 청 태종 홍타이지의 소릉(昭陵). 현재는 북릉(北陵)공원으로 불린다.
청(淸)제국 여명기에 수도 선정은 권력다툼과 중첩됐다. 1583년 갑옷 13벌과 30명의 측근을 이끌고 정복사업을 시작한 청 태조 누르하치는 세력을 키워 1625년 랴오양(遼陽)에서 선양으로 천도했다. 산해관 너머 베이징을 막 점령한 청이 베이징과 선양 중 수도를 어디로 정할 것인가 하는 논쟁은 조선왕조실록 인조(仁祖) 22년(1644) 8월23일자에 자세하다.



인조가 (병자호란 패배로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함께 선양과 베이징을 다녀온) 이래에게 “팔왕(八王·누르하치의 12번째 아들 아지거)은 베이징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런가?”라고 물었다. 이래는 “팔왕이 구왕(九王·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 도르곤)에게 말하기를 ‘맨 처음 요동(遼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을 살육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이 요동 백성들에게 많이 살해당했다. 지금은 의당 이 군대의 위세를 타서 크게 살육을 자행한 다음, 제왕(諸王)들을 유치시켜 연도(燕都·베이징)를 진정시키고, 대군(大軍)은 선양을 다시 가서 지키고 산해관을 보호해야만이 후환을 없앨 수 있다” 하니, 구왕이 “선황제(先皇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일 베이징을 얻으면 즉시 도읍을 옮겨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취하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지금은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으니, 여기를 버리고 동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두 왕의 논의가 서로 맞지 않자 이로 인해 틈이 생겼다고 합니다”라고 인조에게 대답했다.



청나라 초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에 이어 아지거와 도르곤이 각각 선양과 베이징을 수도로 정하고자 벌인 논쟁이다. 결국 베이징 천도를 주장한 도르곤이 순치제(順治帝)의 섭정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1644년 베이징에서 순치제의 즉위식을 거행했다. 선양은 1625년부터 44년까지 19년간 만주족의 수도였다. 이 사이 6만㎢ 넓이의 궁궐이 지어졌다. 누르하치가 시작해 홍타이지가 완성한 선양고궁은 원래 이름은 성경(盛京)궁궐로, 베이징 천도 이후에는 봉천행궁(奉天行?)으로 불렀다. 이처럼 청나라에 선양은 베이징 정복의 교두보이자 중원 정벌의 요충이었다. 지금도 선양에는 누르하치의 복릉(福陵)과 홍타이지의 소릉(昭陵)이 자리잡고 있다.



만주사변의 도화선 류타오후 사건의 무대



선양시 중심에 위치한 중산광장에 세워진 10m 높이의 마오쩌둥 동상과 신중국 탄생을 주제로 한 군상(群像).
일본에도 선양은 대륙 침략의 전진기지였다. 올해로 발발 80주년이 된 만주사변으로 불리는 류타오후(柳條湖) 사건의 무대가 바로 선양이었다.



1931년 봄 일본 육군 수뇌부는 ▶동북에 친일정부를 세워 ▶표면상으로 독립한 괴뢰국가를 만든 뒤 ▶일본이 직접 동북을 영유하고 병탐한다는 요지의 ‘국제정세판단’을 작성한다. 군부는 정부와 최종적으로 군사행동을 일으키더라도 1932년 봄까지는 안팎의 여론을 의식해 관동군이 독주하지 않겠다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호전적인 관동군은 고분고분 기다리지 않았다.



류타오후는 선양 북쪽 교외의 한 촌락으로 뤼순(旅順)과 다롄(大連)에서 창춘(長春)에 이르는 남만주철도가 이곳을 통과했다. 이 때문에 철로 동쪽에 중국 육군 독립 제7여단의 주둔지 북대영(北大營)이 자리잡고 있었다. 관동군 고급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대좌와 작전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좌는 북대영 부근의 남만주철도에서 폭발사건을 일으킨 뒤 중국 관병이 저지른 일로 조작해 이를 빌미로 침략전쟁을 발동하겠다는 음모를 세웠다.



관동군은 육군 수뇌부에 그들의 계획을 보고했다. 참모본부는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8월 초 육군은 일찍이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고문을 지냈던 중국통 혼조 시게루(本庄繁) 중장을 신임 관동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디데이(D-day)인 9월18일 밤이 깊어지자 완전무장한 105명의 장병이 제2대대 제3중대장 가와시마 다다시(川島正)의 지휘를 받아 북대영 북측에 집결했다. 9시쯤 가와시마는 공병 출신 가와모토 스에모리(河本末守) 중위에게 여섯 명의 병사를 인솔하고 철로 순경으로 위장해 만철 선로를 따라 남하할 것을 명령했다. 가와모토는 북대영에서 동남쪽으로 약 800m 떨어진 지점에서 정지했다. 폭약을 레일 위에 설치하고 도화선에 점화했다. 10시20분 전후였다. 거대한 폭발음이 심야의 정적을 깨뜨렸다. 사실 레일과 침목의 손상은 미비한 정도였다. 가와시마 중대장은 그 즉시 중대를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해 북대영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동시에 특무기관에는 중국군이 철로를 폭파해 일본군을 습격했다고 허위 보고를 올렸다. 이타가키 대좌는 보고를 받자마자 계획에 따라 독립수비대 제2대대와 제5대대에 북대영 공격을 명령했다. 제29연대에는 선양성 침입을 명령했다.



당시 난징의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蔣介石)는 베이징 주재 동북변방군사령관 장쉐량(張學良)에게 ‘일본군의 어떤 도발에도 저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사변이 일어나자 장쉐량은 이 명령에 따라 선양 주둔군에게 일본군에 절대 저항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북대영에 주둔하던 중국군 제7여단은 명령대로 순순히 철수했다. 일본군은 저항하지 않는 장병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19일 새벽 5시 반쯤 북대영을 완전히 장악한 일본군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북대영에서 중국 장병 45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25명에 불과했다. 선양성의 중국 군대와 경찰 역시 일본군 침입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오전 6시쯤 선양성 점령을 완료했다.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18일 밤 11시쯤 뤼순에서 사건을 보고받았다. 혼조는 ‘관동군은 모든 전선에 출동해 중국 봉천군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린 뒤 사령부 및 보병 제30연대를 이끌고 열차로 선양으로 향했다. 정오쯤 선양에 도착했다. 랴오양(遼陽)의 일본군 제2사단은 그보다 앞선 19일 아침 선양에 도착해 선양항공국, 병기공장, 동대영 등을 점령했다. 이로써 선양은 완전히 일본군 수중에 들어갔다. 선양을 장악한 일본군은 호시탐탐 중원 침략의 기회를 노릴 수 있게 됐다.



국공내전의 전환점 랴오선전역



1945년8월 일본군이 패망하자 동북은 소련 홍군이 장악했다. 9월부터 공산당은 간부와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켰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동북야전군(東北野戰軍)의 전신인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을 결성해 전쟁의 귀재 린뱌오(林彪)를 사령관에 앉혔다. 국민당은 미국제 최신 무기로 무장해 일본군과 버마전선에서 활약했던 정예 병력을 동북으로 파견했다. 일본 괴뢰정부 만주국의 군대와 경찰력은 국민당에 버림받았다. 대신 공산당에 포섭됐다. 동북의 새 주인 소련 홍군은 의외로 선양을 국민당에 넘겨줬다. 만주국의 수도였던 창춘마저 국민당에 내줬다. 공산당은 기습공격으로 창춘을 점령했다. 국민당의 공세가 계속되자 린뱌오는 의외로 창춘은 물론 동북 전 도시에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대신 농촌 장악에 나섰다. 46년 6월 국공내전이 폭발했다.



48년 9월 12일 만주쟁탈전인 랴오선전역(遼瀋戰役)이 발발했다. 당시 선양은 국민당 동북 초비(剿匪·공산당 토벌)총사령관 웨이리황(衛立煌)이 장악하고 있었다. 린뱌오는 선양을 고립시키기 위해 우선 동북과 중원을 잇는 요충지 진저우(錦州)와 창춘부터 공격했다. 린뱌오는 전차 1개 대대를 앞세운 휘하의 6개군을 동원해 진저우를 포위하고 별도로 2개군을 동원해 국민당 증원군의 북진에 대비했다. 연전연승하던 동북야전군은 파죽지세로 10월 29일 선양을 완전 포위했다. 곧 휘하의 3개 부대를 동원해 선양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30일 웨이리황은 단신으로 비행기를 타고 선양을 탈출했다. 지휘권은 곧 8병단 사령관 저우푸청(周福成)에게 넘어갔다. 11월1일 공산군은 선양 총공격을 개시했다. 다음날 선양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공산군에 넘어갔다. 선양 전투에서만 2개군 11개 사단 병력 13만4000여 명이 전멸했다. 사령관 저우푸청마저 포로로 잡혔다. 랴오선전역에서 승리한 공산당군은 국민당군의 병력을 역전시켰다. 대륙에서의 국민당 패퇴는 선양을 잃는 순간 결정된 셈이다. 52일간 계속된 랴오선전역에서 국민당은 정예 47만 명을 잃었다. 사망 5만6800명, 포로 32만4300명에 공산군으로 변심한 군인만 6만4900명에 이르렀다. 공산당은 병력 6만9000여 명을 잃었을 뿐이다. 장제스는 일본에 이어 공산당에 다시 한번 선양을 내줬다. 민간에 회자되던 “동북을 취한 자, 천하를 얻는다”는 말은 이로서 다시 한번 입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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