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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유치원 친구’ 이경희의 회고 C’est La Vie 이것이 인생

여성중앙“세라비!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35년 만에 귀국해 ‘유치원 친구’를 껴안으며 한 말이다. 유치원 친구의 사랑 혹은 우정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 수필가 이경희가 털어놓는 이야기 안에 ‘예술’이 있고 ‘인생’이 있었다.



“예술은 반은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예술이란 대중을 현혹시키는 겁니다. 매스 게임이 아니라 페스티벌이지요.” (『중앙일보』1984. 6. 30. 기사 중에서)



시대를 앞서간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그가 35년 만에 귀국해서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아메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위성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후였다. 그런 그가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기자들에게 한 말이 있다. “내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만나고 싶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경희, 이마 다친 것 어떻게 되었지?



백남준과 이경희, 두 사람은 명동성당 건너에 있던 애국유치원을 함께 다닌 유치원 동창이다. 당시 동대문 밖 창신동에 살던 백남준은 요즘으로 치면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였다. 서울에 두 대밖에 없는 캐딜락이 있었고, 집 뒤뜰에 동산이 있을 정도였다. ‘유치원 친구’ 이경희는 당시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남준이 어머님과 우리 어머님이 가깝게 지냈어요. 남준이 집에 가면 일본 고단샤 출판사의 그림책을 볼 수 있어서 매일같이 놀러 가곤 했죠. 가끔 남준이랑 을지로에서 동대문까지 전차를 타고 집에 가기도 했어요. 남준이 집에서 숨바꼭질을 하다 낮은 지붕에 오른쪽 이마가 긁혀 피가 난 적이 있죠. 남준이는 그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어요.”



두 사람은 초등학교에 올라가면서 헤어졌다. 이경희는 숙명여중에 다닐 때 단체 관람으로 명동의 국립극장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 경기중학교 학생들도 와서 같이 관람을 했다. 이경희는 경기중에 다니는 유치원 친구를 찾았지만 끝내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졌다. 백남준이 일본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갔고, 장가도 안 가고 전위 예술인지 뭔지 하는 이상한 짓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친구가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 이경희를 자택에서 만났다.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의 궤도를 돌다 35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의 인연이 애틋하고도 아름다웠다.
유치원 친구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어땠나요 귀국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 알았어요. 남준이가 일본인 부인과 함께 입국하는 모습을 TV로 봤죠. 반갑기도 하고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이 이상했어요. 남준이가 묵고 있는 워커힐 호텔에 연락처를 남겼더니 얼마 후 전화가 왔어요. 남준이는 내 이마가 다친 걸 두고 미안해했어요. 유치원 때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더군요. 훗날 명동 국립극장에서 날 보고도 부끄러워서 숨었다는 얘기도 하고.



워커힐 호텔 펄빌라에서 두 분이 따로 만났죠 두 번째 만남이었어요.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절 섭외한 거죠. 이틀 전에 남준의 부모님 산소에 따라갔다가 저녁에 작은 누님(백영득) 댁에서 식사를 함께했어요. 남준이는 누님이 차린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바빴죠.



보다 못한 누님이 음식을 챙겨주라고 해서 생선을 뜯어서 남준이 접시에 놓아준 기억이 나요. 시게코는 말도 통하지 않고, 다들 남편만 챙기는 분위기가 못마땅했는지 먼저 호텔로 가겠다며 고함을 쳤어요. 그날 제가 시게코를 꼭 껴안으며 달랜 기억이 나요. 그렇게 해서 소동이 가라앉았죠.



호텔에서 두 분이 나눈 대화 중에 “난 섹스를 못해. 당뇨병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더군요 백남준만이 할 수 있는 말이죠.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었어요. 남준이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육체적인 사랑이 들어 있죠. 그 전에 두 팔로 절 감싸 안으면서 “세 라 비!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라고 한 말이 더 기억에 남아요.



어릴 때 남준이 집에 가면 다들 저를 ‘남준이 색시’라 불렀어요. 집안 어른들이 혼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죠. 백기사(백남준을 기리는 사람들) 모임에 공동 대표로 있는 황병기 선생도 그런 말을 하더군요. 뉴욕에서 만났을 때 ‘유치원 친구’ 얘기를 들었다고.



남준이가 날 기억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남편과 결혼을 해서 딸 넷을 낳아 기르고, 수필을 쓰고 꼭두극단을 만들어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느라 바쁘게 지냈어요. 남준과 저는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의 궤도를 돌다 35년 만에 만난 거죠.



별안간 춘(春)을 느끼어 서로 내외하다가



이경희 여사는 최근『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를 펴냈다. 책에는 프랑스 카날 풀뤼 TV에서 촬영한 백남준의 다큐멘터리에 한복을 입고 출연한 사연,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백남준과 함께 워터 택시를 타고 황금사자상을 받으러 간 이야기, 아내 구보타 시게코 여사를 달래느라 백남준이 절교 편지를 팩스로 보낸 재미난 사연들이 들어 있었다.



“2000년에『백남준 이야기』를 펴낸 적이 있어요. 생전에 남준이가 글을 써달라고 조르는 통해 어릴 적 사사로운 이야기를 풀어냈죠. 이번 책은 백남준 사후에 그의 예술 세계를 궁금해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어요.



돌이켜보면 남준이와 사적으로 만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두어 걸음 떨어져서 나란히 걸으며 서로 행복했다는 느낌? 그런 기분이 들어요. 저는 끝내 남준이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어요. 그럴 기회가 마지막에 있었지만, 얼마나 쓸쓸하게 끝나버렸는지….”



[사진=임영균]




“‘난 섹스를 못해. 당뇨병이라.’ 이런 말은 백남준만이 할 수 있죠. 그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었어요. 남준이가 생각하는 사랑에는 육체적인 사랑이 들어 있죠”



백남준은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하며 공연과 전시의 경계를 허무는 전위 예술을 선보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아방가르드 첼리스트인 샬럿 무어만과 선정적인(?) 공연을 벌여 화제를 낳았고, 인터넷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인 1974년에 이미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몽골 제국의 교역로에서 착안해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전자 초고속도로)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의 아이디어를 훔친 사람은 빌 게이츠만이 아니었다. 백남준은 1996년 4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반신마비로 오른손만 쓸 수 있게 된 그가 2년 후 백악관 만찬에 초대됐다. 백남준이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를 하기 위해 일어서는 순간 바지가 흘러내리며 아랫도리가 드러났다. 그는 속옷을 입지 않았다.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성관계를 조롱하는 백남준식 해프닝이었죠 그 영상을 저도 본 적이 있어요. 남준이는 똑똑하고 유머가 많았어요. 저한테 보낸 드로잉이나 사인을 봐도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게 없죠. 르윈스키와의 관계를 조롱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함부로 훔쳐서 선거 공약으로 쓴 일에 항의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어요.



1995년 대통령 선거전에 클린턴 진영에서 ‘인포메이션 슈퍼하이웨이’(정보 초고속도로)란 공약을 내걸었거든요. 남준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그들이 훔쳤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백남준과 얽힌 다른 얘기가 없을까요 사람들은 첼리스트였던 샬럿 무어만과 백남준의 러브 스토리에 관심이 많더군요. 남준이가 일본인 전자 기술자인 아베 슈야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유럽에서 콘서트를 하다 돈이 떨어져서 사흘간 노숙을 하기도 했고 치즈로 하루를 버티기도 했죠. 여자란 귀여울 때는 마냥 귀여워도 돈 문제로 아귀처럼 변할 때가 있다는 말도 나와요. 세계적인 예술가 자리에 오르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죠.



프랑스 카날 풀뤼 TV에서 촬영한 백남준 영상에 선생님이 나온 걸로 아는데요 남준이가 어릴 때 살았던 창신동에서 촬영했어요. 저는 한복을 입었고 남준이는 흰 도포 차림에 갓을 쓰고 있었죠. 남준이는 숨바꼭질을 하다 다친 내 이마의 흉터 자리를 들여다보면서 카메라맨에게 그 장면을 찍게 했어요.



‘큰 대문 집’이란 주차장 간판이 남아 있어서 그것도 찍었고. 남준이네는 가을에 서리가 내릴 즈음 굿판을 크게 벌였어요. 부잣집답게 동네 잡귀신까지 다 모셔서 배불리 대접하는 한바탕 축제였죠. 그런 기억들이 남준의 작품에 많이 반영된 것 같아요.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첫 드로잉 작품을 보낸 걸로 압니다. 작년 가을에야 대중에 공개한 이유가 뭔가요 현대화랑을 통해 제 앞으로 콜라주 드로잉 50점을 보냈다고 해서 갔더니 모두 73점을 보냈더군요. ‘비디오 벽’이란 작품 앞에 서 있는 나체 사진을 보고 무안했던 기억이 나요. 남준이 말로는『플레이보이』에 나오는 가장 비싼 모델을 사서 사진을 찍었다고 하더군요.



그 뒤로 14년간 작품을 열어보지 않고 보관하다 작년 가을에야 포항시립미술관에서 전시를 했어요. 사진 주변에 “기동차를 타고 뚝섬 가자”(뚝섬에 포도밭이 있었다고 한다), “세검정으로 원족(遠足) 가자”는 말들이 적혀 있었어요. 모두 유년기의 추억을 담고 있죠. 김소월의 ‘먼 후일’이란 시도 기억나요. “잊었노라…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같은.



각별한 애정이 아니고는 받기 힘든 선물 같은데요 마흔이 다 되어 첫 수필집(『산귀래』)을 준비할 때 문득 남준이 생각이 나서 쓴 글이 ‘왕자와 공주’예요. 남준이는 ‘큰 대문 집’ 시절의 추억이 담긴 이 글을 참 좋아해서 영어와 독어로 펴낸 책에 인용을 하곤 했죠.



남준이가 귀국하고 2년 뒤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건축가 김수근씨가 창간한『공간』이란 잡지에 남준이가 ‘뉴욕 단상’이란 글을 기고한 적이 있더군요. 1968년 8월호 잡지였어요. ‘별안간 춘(春)을 느끼어 서로 내외(內外)하다가 6·25로 헤어진 친구’가 바로 저예요. 그때 남준이는 무명에 가까웠죠. ‘남준이도 오랫동안 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견우와 직녀도 일 년에 한 번은 만나는데



백남준은 이경희를 ‘라디오 스타’라 불렀다. 서울대 약대를 나온 이경희의 이력은 화려했다. 대학 시절 KBS 라디오의 ‘스무고개’와 ‘재치문답’에 고정으로 출연해 ‘이경희 박사’로 이름을 알렸다. 1970년에 수필가로 데뷔했고, 1994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13년 가까이 월간

『춤』에 기행 수필을 연재하기도 했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오랫동안 실린 ‘현이의 연극’이 바로 그의 수필이다.



하지만 이경희가 친구의 예술 세계에 처음부터 공감한 것은 아니다.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아트센터가 문을 열고 이영철 관장과 인연을 맺으면서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었다. “이영철 관장이 공들여 작업한『백남준의 귀환』같은 책은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1992년 8월, 서울 프라자 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후 백남준이 장미꽃을 받자 “장미꽃이라면 경희에게 주어야지” 하며 건네는 중이다. 두 사람의 얼굴이 행복해 보인다.
저는 남준이가 보낸 사인이나 콜라주 드로잉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어요. 처음에는 그냥 낙서인 줄 알았죠(웃음). 훗날 이영철 관장, 김남수 연구원 같은 분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아요.”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 미국의 마이애미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백남준 타계 직후 그를 기리는 지인들이 ‘백기사’를 결성했고, 이경희 여사는 그 모임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다. 2009년 7월 백남준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나눈 가상의 대화를 기록한 ‘태내기 자서전’ 퍼포먼스를 할 때는 국악인 황병기가 백남준 역을, 이경희가 어머니 역을 맡기도 했다.



백남준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마이애미로 그를 찾아갔다가 갑작스럽게 헤어지지 않았나요 영화로 치면 아마 그 장면이 클라이맥스겠죠. 2004년 12월로 기억해요. 남준이는 뉴욕의 추위를 피해 마이애미에서 겨울을 보냈어요. 남준이는 내가 가겠다고 하자 호텔 이름까지 알려주면서 들뜬 기색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도착해서 연락을 하니 전화를 받지 않더군요. 막막한 기분에 아침 바다를 둘러보고 나와 노천카페를 따라 걷는데,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바로 남준이었죠. 그렇게 기적적으로 만났지만, 제가 전화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상황이 나빠졌어요. 남준이가 흥분해서 막 소리를 지르는 걸 제가 머리를 감싸 안고 진정시켰어요. “경희, 옛날과 똑같아.” 이 말도 기억이 나요.



부인 시게코와는 불편하지 않았나요 저는 시게코를 이해해요. 참으로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도 들고. 백남준과 결혼하기 위해 그 힘든 과정을 이겨내면서 자기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었잖아요. 언젠가 남준이 생일에 생모시로 홑이불을 만들어 시게코 것과 함께 선물한 적이 있어요.



시게코는 그 모시에 홍콩 실크를 받치고 한국 사람에게 바느질을 시켜 한복 마고자처럼 디자인한 코트를 만들었어요. 그 옷을 남준이가 정말 좋아했어요. 남준이가 장례식 날 저세상으로 떠날 때 그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하더군요.



남편분의 반응은 어땠나요?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친구라는 사실이 달갑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남편은 아주 유머가 많았어요. 백남준이 귀국해서 날 찾는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내뱉듯이 한마디 하더군요. “미친 놈!” 하고. 남편이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었더라면 더 불편했을 거예요.



2004년 겨울, 남준이를 보러 마이애미에 가면서 쿠바 여행을 핑계로 댔어요. “쿠바에 가려고 한다. 가는 길에 마이애미에 들를까 하는데 가도 되느냐”고 물었죠. 남편도 내 의중을 알고 있었어요. 남준이를 보러 가는 줄 알고도 가만히 있더군요. 그런 남편도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요.



백남준은 선생님께 어떤 남자였나요? 지금까지 후회되는 일은 없나요 20년 동안 남준이는 무던히도 나를 졸랐어요. 자기 전시회에 와서 봐달라고 졸랐고, 둘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써달라고 졸랐고, TV에 같이 나와 달라고 졸랐어요. 그 부탁을 외면하기가 힘들었어요. 그 기분을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네요.



어린애가 엄마 치마를 붙들고 어리광을 부리는 느낌이라면 설명이 될까요? 그는 너무나 솔직하고 순수했어요. 나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죠. 얼굴도 참 잘생겼고(웃음). 아, TV에 같이 나와달라고 한 부탁을 못 들어준 게 후회가 돼요. 남준이가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그 부탁을 들어줬을 거예요.



이경희의 수필 ‘왕자와 공주’가 독일어로 번역돼 실린 페이지에 백남준이 사인을 했다. 물음표 하나를 뒤집어 하트 모양을 만든 것이 재밌다.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백남준의 가족사진도 보인다. 앞줄 왼쪽 끝이 백남준.




취재_성재경(객원기자) 사진_이진하(studio lamp), 중앙포토, 디자인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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