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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회화, 구상과 추상, 현실과 가상 사이를 거닐다

1 게르하르트 리히터© Hubert Becker 2011
세계적인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고전 ‘파노라마(Panorama)’가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10월 6일~2012년 1월 8일). 이 전시는 내년이면 80세 생일을 맞는 리히터가 지난 50년간 제작한 작업들을 회고전 형식으로 보여주면서 그가 현대 미술계에 쌓아온 업적을 기리는 전시다. 올해 런던에서 시작해 내년에는 베를린의 슈타트리체 미술관(Staatliche Museen), 파리의 퐁피두 현대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듯 이 전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리히터가 자신의 회화를 통해 보여준 다양한 시도를 뒤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전, 10월 6일~2012년 1월 8일까지 런던 테이트 모던

현대 미술 작가 중 리히터만큼 다양한 스펙트럼의 회화를 시도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테이트 모던의 디렉터 니콜라 세로타는 말한다. “보들레르는 마네를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라고 말했다. 나는 리히터를 우리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라고 말하고 싶다. 나에게 화가 리히터는 언제나 현실의 경계를 탐구하는 신비의 존재였다. 그가 사실주의 화가인지 추상주의 화가인지에 대한 질문이 늘 있어 왔는데, 이번 테이트 모던 전시를 통해 사실주의와 추상의 극한을 오가며 회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한 예술가의 놀라운 업적을 보아주길 바란다.”

1932년 동독의 중심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리히터는 드레스덴 국립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당시 동독 회화의 주 사조였던 사회적 리얼리즘이 내포하는 정치적 이념에 강한 압박을 느끼고 62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불과 몇 달 전 서독으로 이주했다. 그는 뒤셀도르프 미대를 다니며 당시 아방가르드 운동의 다양한 시도에 참여한다.

현대 회화에서 그가 이루어낸 가장 중요한 업적은 60년대 초반 사진에 기초한 회화를 창조한 것이다. 사진 회화(Photo Painting)라 불리는 이 기법은 현존하는 이미지를 사진으로 찍어 그 이미지를 캔버스에 투영해 그림을 그린 후 유화 물감이 마르기 전 미세한 붓질로 이미지를 뿌옇게 만들면서 사진과 회화, 구상과 추상, 현실과 가상의 이미지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독일의 하늘에서 연합군 비행기들이 폭탄을 떨어뜨리는 장면이나, 나치에 가담했거나 나치에 의해 희생된 친척의 모습 등을 회색 톤으로 그렸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물감을 마치 사진의 초점이 빗나가면 희미하게 보이는 것처럼 처리, 독일이 안고 살아가는 나치에 대한 상처를 회화를 통해 암시하고자 했다.

2 ‘Abstract Painting’(1990), CR:724-4, Private Collection Gerhard Richter, 사진 테이트 모던 제공
이번 전시에 나온 이 시기의 대표작 ‘Aunt Marianne’를 보자. 우리는 이 작품에서 리히터의 화가로서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의 평범한 사진 이미지를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정신적인 개연성과 공포나 슬픔 같은 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을 내포하는 심도 있는 회화로 승화함으로써, 사진이 이루어내지 못하는 영역을 회화를 통해 극명히 보여주었다.

리히터는 회색 톤의 그림들을 그리면서 60년대 말부터 다양한 컬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컬러를 사각의 조각으로 붙여 보여주는 컬러차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보다 넓은 회화의 가능성을 열어가고자 했다.그의 이런 시도는 초상화나 풍경화, 또는 정치적인 사건들을 기록했던 장르 회화를 거쳐 80년대에 추상화로 이어졌다. “나는 언제나 추상회화에 매료되어 왔다. 그것은 마치 숨겨진 땅처럼 신비롭다.” 사실 그의 초기 구상 회화가 내포하던 추상적인 요소나 주제의 모호함, 신비로운 은유 등은 그의 구상 회화조차도 처음부터 깊은 추상적 요소들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그의 추상 회화를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인 90년 작 ‘Abstract Bild’는 그가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노랑·초록·빨강·파랑 등 원색의 컬러 팔레트를 이용해 다양한 스케일의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음을 알린다. 그 그림들을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다양한 컬러가 의도적인 붓 놀림이 아니라 우연과 충동에 의해 캔버스 표면에 뿌려지고 이 물감들의 층들이 걷어지고 긁어내어짐으로써 완성되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리히터 스스로도 이 그림들에 대해 “나의 추상화는 파괴의 과정에서 비롯됐다”고 밝힌 바 있다.

“나는 내가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 예기치 못한 선택과 우연, 영감 그리고 파괴의 요소들로 만들어지는 특정한 타입의 회화, 하지만 결코 미리 정의되지 않았던 회화… 나는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추상화를 그리면서도 리히터는 또한 고전 회화의 전통을 따르는 구상 회화를 계속 이어갔다. 대표작인 촛불 시리즈나 베르메르의 유명한 그림인 ‘편지를 읽는 소녀’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젊은 아내인 사빈 모르즈가 잡지를 읽고 있는 모습을 그린 94년 작 ‘Reader’에서처럼, 리히터는 고전화가들의 전통을 따르지만 동시대의 영혼을 부여하는 자신만의 회화를 보여준다.

“하나의 그림은 하나의 고유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연극과도 같다. 누군가는 극본을 쓰면 누군가는 그 극본을 가지고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데 모든 연극은 제각기 다르다”고 작가는 말한다. 리히터의 작품이 위대한 것은, 현실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회화라는 장르를 통해 그 어떤 작가보다도 다양하게 또 어떤 작가보다도 자유롭게 제시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의 회화에는 하나의 대답이 아니라 수많은 질문이다. 그래서 그의 수많은 그림은 각기 고유한 생명력을 지닌다.

테이트 모던의 전시를 직접 볼 수 없다면 리히터의 홈페이지(www.gerhard-richter.com)를 접속해 보라. 리히터가 반세기에 거쳐 창조한 작품 세계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또 2006년 제작된 8분간의 비디오를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하는 리히터를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작품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예술이 없으면 삶도 없다”는, 그저 숙명으로 붓을 잡고 놓았다가 또다시 잡는 한 위대한 예술가의 수줍은 초상이다.

◆최선희씨는 런던 크리스티 인스티튜트에서 서양 미술사 디플로마를 받았다. 파리에 살면서 아트 컨설턴트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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