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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 네팔인의 ‘코리아 러시’ 이유 있었네!

월간중앙 올해 초 TV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 몇몇 외국인 노동자가 출연했다. 특히 네팔 출신 카르키 씨의 가족 상봉 장면은 많은 시청자의 가슴을 울린 듯하다. 한동안 외국인 노동자 하면 스리랑카나 방글라데시인을 쉬 떠올렸지만, 요즘은 네팔인이 부쩍 늘었다. 네팔 현지에서 한국행을 기다리는 젊은이도 넘쳐난다. 그들은 한국에서 바라던 꿈을 이루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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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한국에 들어온 후 삼광유리 천안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네팔인 노동자 로힛 니로울라 씨. 로힛 씨처럼 한국행을 선택하는 네팔인들이 늘고 있다.

충남 천안시에 있는 삼광유리의 공장 안은 육중한 기계음과 매캐한 엔진 냄새가 가득하다. 생산라인에서는 쉴 새 없이 깡통이 쏟아지고 노동자들은 제품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다. 자동화 생산라인이라 사람이 직접 손쓸 일은 거의 없지만 제품을 점검하고, 각각의 기계를 가동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노동자들은 기계가 작동할 때마다 이 소음과 역한 냄새를 참아내야 한다.

이곳에서 깡통에 색깔을 입히는 작업을 하는 로힛 니로울라(36) 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8시간가량을 일한다. 귀마개를 끼지 않으면 잠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소음이 심하지만 로힛 씨는 얼굴을 찡그리는 법이 없다. 타고난 느긋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장 동료들이 그를 가족이나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줘 늘 즐겁단다.

로힛 씨의 고향은 네팔이다.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는 히말라야나 트레킹으로 잘 알려진 나라지만, 네팔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나라의 ‘룸비니(Lumbini)’ 성지는 불교 신자가 순례 여행지로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그 덕분에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사원이 곳곳에 널려 있지만 전체 인구 2700만 명 중 30%가 하루 1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살아가야 하는 가난한 나라다.

카트만두 출신인 로힛 씨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006년 10월 17일.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와서 2007년 초부터 글라스락 제조업체인 ‘삼광유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강원도 원주의 한 공장에서 6개월가량 일했다. 한국어가 유창하지는 못하지만 5년째 한국생활을 하다 보니 웬만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다. 공장에서도 “상무님” “과장님” “밥 먹어요” “쉬어요” 등 ‘생존 어휘’는 한국 사람 못지않게 시원시원하게 외친다.

그와 함께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모두 다섯 명이다. 그중에는 우즈베키스탄 출신도 있지만 거의 네팔 사람이다. 그중엔 로힛 씨의 친동생인 우메쉬(33) 씨도 끼어 있다. 그들은 공장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아파트에서 생활한다. 회사에서 마련해준 보금자리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한국인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기도 하고, 주말에는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그는 “사람들이 어울리는 방식은 네팔이나 한국이나 비슷하다”고 말한다. “한국 남자들이 술자리를 함께하거나 담배를 어울려 피우면 친해진다고 생각하는데, 네팔 사람들도 비슷하거든요.”

회사에서 로힛 씨는 ‘의리파’로 통한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동료들의 경조사에 빠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축의금과 조의금을 꼬박꼬박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몸은 네팔인이지만 정신은 거의 한국인에 가깝다고 보면 돼요.” 로힛 씨는 스스로 “한국 문화에 100% 적응했다”고 말했다. 이 회사의 공장장 김인태 씨는 “성실할 뿐만 아니라 됨됨이도 좋아 모두 로힛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네팔의 ‘엄친아’가 깡통공장에서 일하는 이유
로힛 씨는 사실 네팔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인텔리’ 출신이다. 대학원에서 힌디어를 전공한 후 중학교에서 영어와 힌디어를 가르쳤고, 네팔 외교부 직원으로 일한 경험도 있다. 아버지는 대학교수고, 외삼촌은 네팔에서 외무 장관을 지냈을 만큼 집안도 ‘빵빵’하다. 집안도 좋은 데다 네팔에서 교사생활을 했으니, 요즘 유행하는 말로 네팔식 ‘엄친아’라고 할 만하다. 그런 그가 한국의 한 깡통공장에서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입고 험한 일을 사서 한다. 그는 왜 편한 길을 놔두고 한국으로 왔을까?

사실 그는 2006년 한국에 오기 전 캐나다와 호주에도 비자 신청을 했단다. 운 좋게 세 곳에서 모두 체류 허가를 받았고, 가족과 친구들은 그에게 캐나다에 가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한국행을 택했다. 네팔에서보다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이유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는 “평소 한국에 호기심과 일종의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처럼 이른 시간 내에 여러 면에서 발전을 이룬 나라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어요. 그런 한국을 직접 느끼고, 배우고 싶었어요. 네팔도 한국처럼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산업연수생의 체류기간인 3년을 모두 채웠지만, 한국 생활이 좋아 3년을 더 연장했다.

로힛 씨처럼 집안 출신과 학력을 막론하고 한국행을 꿈꾸는 네팔 젊은이가 늘어간다. 주한 네팔 대사관 관계자는 “한국에 오는 사람 대부분이 네팔에서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라며 “공장이나 농촌에서 힘든 일을 하게 된다고 해도 한국에 오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한국에 와서 서울 마장동에 있는 한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룹(25) 씨도 비슷한 경우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에서 돈도 벌고, 경험도 쌓아 네팔로 돌아가 사업을 일구는 게 꿈”이라고 했다.



현지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꿈의 나라’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거주하는 네팔인은 8월 기준으로 1만3166명. 그중에서 2007년부터 시행된 고용허가제를 통해 비전문취업비자(E9)를 받아 한국에 들어온 네팔인이 1만352명이나 된다. 전체 외국인 노동자 71만 명 가운데 네팔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리 높지 않다(중국인 노동자가 약 20만 명으로 가장 많다). 필리핀 노동자(3만 명)나 인도네시아 노동자(2만 명)에도 못 미친다. 하지만 네팔인의 입국 추이를 봐서는 증가 속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E9 비자를 받은 네팔인의 수는 지난해 7093명에서 올해 1만352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에 비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근로자는 1000명 이내에 그쳤다. 중국인 가운데에서도 E9 비자를 받고 입국하는 사람들은 전체 20만 명의 노동자 가운데 1만322명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전문인력의 수가 많은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불법체류 근로자가 많기 때문으로 보인다.

네팔인의 한국 러시가 본격화된 것은 2007년 한국 노동부와 네팔의 노동교통부가 ‘고용허가제(EPS) 양해각서’를 체결한 이후부터다. 고용허가제는 정부가 2004년 외국인 근로자에게 합법적인 근로자 신분을 보장해주기 위해 시행한 제도로, 고용허가제를 통해 E9 비자를 취득하면 최대 3년 동안 국내 체류가 가능하다. 고용허가제가 시행되기 전에도 산업연수생(D3) 비자를 얻어 취업하는 합법적 통로가 있었지만, 인원 제한이 있었다. 네팔인 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가 시행된 이후 해마다 3000~4000명씩 취업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됐다.

네팔은 고용인구의 73.9%가 농업에 종사할 정도로 1차 산업이 주를 이뤄 기업이나 큰 공장이 거의 없다. 국가 1년 예산의 40% 이상이 OECD나 ADB 등의 외국 지원으로 이뤄져 있고, 2차 산업에 대한 투자도 미비한 편이다. 외국 자본이 들어와 공장을 세우려 해도 바다가 없는 탓에 물류비 부담이 너무 커 외국 기업은 투자를 꺼린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조차 안정된 직장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실정이다. 더군다나 네팔은 전체 인구 가운데 60%가 젊은 층인 ‘청년의 나라’다. 안 그래도 고용시장이 불안한데 해마다 3만~5만 명의 젊은이가 일자리를 찾으려고 쏟아져나오니 청년 실업률이 갈수록 높아진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네팔의 젊은이들은 자연스레 해외로 눈을 돌린다. 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두바이 등 중동 국가나 말레이시아 같은 동남아 국가로도 많이 가지만, 그중 한국행을 꿈꾸는 젊은이가 가장 많다. 다른 지역에 비해 근로환경이나 임금 대우 등이 월등히 좋기 때문이다. 네팔인의 연평균 소득이 1000달러 수준인데 한국에 와서 일자리를 얻으면 한 달에 족히 1000달러 이상을 벌 수 있다.

서울 마장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룹 씨는 “한 달에 130만원을 버는데, 이 돈이면 네팔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4~5개월을 풍족하게 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말대로 국내에서 네팔인 노동자가 받는 월급은 130만~150만원 수준. 그들이 네팔에서 벌 수 있는 돈보다 많게는 열 배, 적게는 다섯 배가 많은 액수다. 그는 130만원 중 집세와 생활비로 약 50만~60만원을 쓰고 남은 돈을 네팔의 가족에게 송금한다. 한국에선 한 달 생활비로 넉넉지 않은 액수지만 네팔에서는 한 달 월급보다 많아 그가 한국에 온 이후 네팔에 남은 가족은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네팔 젊은이들에게 ‘한국행=대박’이라는 공식이 통용된다.

한국에서 돈을 벌어 네팔로 돌아가 성공을 거둔 사람도 적지 않다. 네팔에서 한 비정부기구(NGO)의 스태프로 일하는 갈렙(25) 씨는 “주변에 한국에서 돌아온 뒤 자기 가게나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여행사 등 사업을 벌인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돈 벌기가 유일한 목적은 아닌 듯하다. 많은 네팔인이 한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직접 경험하고 싶어서 한국에 온다. 1960년대만 해도 네팔과 같이 1차 산업 중심의 국가였던 한국이 불과 30~40년 만에 2차 산업은 물론 3차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니, 한국은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네팔에서는 몇 년 전부턴 <꽃보다 남자> <풀 하우스> 등 한국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한국 문화에도 네팔인의 관심이 쏠린다. 네팔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문광진 씨는 “비디오 가게에 가면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쉽게 볼 수 있다”며 “한국 드라마가 일상에서 화제가 되기 일쑤다”고 말했다. 게다가 네팔에 들어온 한국인의 대부분이 NGO 소속이거나 선교사들이어서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은 편이라고 한다. 그들 대부분이 네팔을 돕기 위한 사회복지사업을 벌인다.

한국어능력시험 때 시내 교통 마비되기도
하지만 한국행은 여전히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렵다. 일단 비자를 취득하려면 ‘한국어능력시험(EPS-Topik)’에 응시해 합격해야 한다. 200점 만점에 80점을 받으면 합격을 준다. 이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고용풀(pool)에 들게 돼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들어오는 인력이 매년 3000~4000명가량이다. 한국행이 수월해졌다고는 하지만 경쟁은 너무 뜨겁다.

7월 22~23일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3회 ‘한국어능력시험’에는 5만7457명의 젊은이가 몰려들었다. 제1회와 2회 시험이 시행된 2008년과 지난해 각각 3만1525명과 3만6203명의 응시자에 비하면 큰 증가세다. 시험이 있기 일주일 전엔 문제지 유출을 막기 위해 시험지를 운반하는 데 경찰 호송차가 따라붙기도 했다. 네팔 내 한인 모임인 ‘재네팔한인회’ 김승근 총무는 “당시 한국 대사관에서 시험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경찰이 교통을 통제해 시내가 큰 교통 혼잡을 빚기도 했다”고 말했다.

NGO에서 일하면서 한국어능력시험을 준비한다는 갈렙 씨는 “요즘 네팔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한국어능력시험에 통과한 사람을 가장 부러워한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사이 카트만두 시내에 한국어 학원이 엄청나게 늘어날 정도로 한국어능력시험 열기가 뜨겁다”고 덧붙였다. 갈렙 씨 역시 한국어능력시험에 통과한 뒤 한국에 가는 꿈을 꾼다.

공휴일에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이면 천안의 로힛 씨는 서울 나들이에 나선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서울 창신동에 있는 ‘네팔 거리’로 향한다. 2000년 이후 네팔·인도음식 전문점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하며 동대문역 3번 출구 근처의 골목에 네팔인촌이 생겨났다. 현재 이 일대에서 사는 네팔인은 200명 정도. 네팔 식당이나 식료품점, 잡화점이 있어 네팔 노동자들에게는 일종의 ‘만남의 장소’가 됐다. 로힛 씨도 이곳에서 네팔인과 어울리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한다.

로힛 씨는 최근 새로운 작업을 하느라 바쁘다. 네팔인의 한국 생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제작도 그 가운데 하나다. “네팔 사람들이 한국 문화와 생활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한” 작업이라고 했다. 틈틈이 한국의 발전 과정을 담은 논문도 쓴다. “차별이 없어졌다지만 여전히 나쁜 사람도 있어요. 농업·어업 쪽의 근무환경은 열악한 곳이 많고요. 다양한 한국 이야기를 담아 네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11월 19일 그는 한 달 반 동안의 긴 휴가를 받아 고향 네팔을 방문한다. 이번이 두 번째 귀향이다. 가족과 그동안 못다 한 얘기도 나누고, 거기서 한국 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와 논문 작업을 매듭지을 작정이란다. 그가 그린 메시지가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네팔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비칠지 벌써 궁금해진다.


백승아 기자 saba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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