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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조지아에서 발견한 희망의 단초

문정인
연세대 교수
정치외교학과
북(北)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남(南)과 대화도 하고 관계개선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산가족 재상봉은 물론 금강산 관광도 재개하고, 개성공단 2단계 사업도 조속히 착수하자고 했다. 천안함 피폭이나 연평도 포격 같은 불행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10·4 정상선언에서 합의된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축 같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왔다. 남측이 북한의 대중(對中) 경제 의존을 우려하는 데 그치지 말고 남북 경제협력을 활성화해 대응해 나가야 옳은 것 아니냐는 반문까지 던졌다.

 열흘 전 미국 조지아대에서 열린 ‘한반도에서의 평화구축과 통일을 위한 남북한 및 미국 전문가 회의’에서의 얘기다. 필자도 참석한 이번 회동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북측 대표단의 구성이었다. 통일전선부의 대외 창구 역할을 하는 아태평화위원회의 주요 인사들과 북한 외무성 산하 군축평화연구소 인사들이 한꺼번에 참가했다. 이른바 ‘기관 본위주의’의 뿌리가 깊은 북한에서는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대표단 구성이다. 아마 통전부가 담당하는 남측과 외무성이 담당하는 미국 측에 조율된 메시지를 보내겠다는 의도가 아닌가 싶었다.

 남측 참가자들은 천안함과 연평도 문제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확약 없이 북측이 원하는 수준의 남북관계 복원은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국민 정서가 이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측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자기들은 천안함 피폭과 무관하며, 지금 당장이라도 조사단을 보낼 테니 공동 조사에 임하자는 얘기였다. 연평도 포격에 대해서도 남측의 도발에 자위 조치를 취한 것일 뿐이며 사전 경고도 했기 때문에 사과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남북의 간극은 이처럼 한없이 멀었다.

 정상회담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논의하지 않았다. 다만 아태 측 인사들과 개인 면담 자리에서 대화를 하다 보니 이명박 대통령 임기 내에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일은 그리 녹록지 않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신뢰’를 말했다.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 논의를 했지만 남측이 모두 파기하고 언론에 흘린 바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의제 설정도 쉽지 않을 것이라 했다. 남측에서는 비핵화의 구체적 진전 및 천안함·연평도 문제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할 것이고, 북측에서는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의 이행을 요구하게 될 텐데, 양측 모두 상대의 요구를 수용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들의 분석이었다. 더구나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이 과거처럼 이행되지 않을 경우 북측 정상의 권위가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표명했다. 역시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번 회의에서 북측이 가장 역점을 둔 분야는 북·미관계 개선이었다. 군축평화연구소 대표는 “(워싱턴이) ‘남북관계 진전과 핵 문제에 있어서의 진정성’ 운운하며 북·미 접촉을 거부한 채 2년을 허송세월했다”고 주장하며, 당장이라도 전제조건 없는 북·미대화를 통해 관계를 개선하고 핵 문제를 타결하자고 말했다. 특히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 현재 ‘기술적으로’ 전쟁 상태에 있는 북·미관계를 정상화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고위급, 좋게는 최고 수뇌급’에서 북·미 쌍무회담을 개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이 경제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가해올 때마다 “우리 ‘강경파’가 초강경 대응조치를 주장하기 때문에 향후 정세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알 수 없다”는 우려도 함께했다. 북한 군부의 강경노선을 우회적으로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미국 측 반응은 냉담했다. 수차례에 걸친 도발로 북한에 대한 워싱턴의 신뢰는 바닥을 쳤고, 특히 대선을 앞두고 오바마 대통령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미국 측 참석자는 진단했다.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 유예, 농축 우라늄 문제에 대해 가시적 조치는 물론이고, 미군 유해 송환이나 6·25전쟁 중 행방불명된 미군에 대한 공동 조사, 그리고 인권문제 개선 등 쉬운 문제부터 성의를 갖고 해결해야 북·미 간의 신뢰구축과 의미 있는 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 또한 갈 길이 멀어 보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평양이 2012년 ‘강성대국 완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경제를 살리고 인민들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절박함을 슬기롭게 활용한다면 비핵화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북측의 ‘결심’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직감이 몰려왔다. 갖가지 낙담이 교차한 조지아에서 필자가 발견한 단 하나 희망의 단초였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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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