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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고통과의 화해...다른 삶의 의미를 캐다

1999년 무렵의 박완서. [중앙포토]
1988년은 소설가 박완서에게는 참혹한 시련의 한 해였다. 그해 5월 폐암을 앓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데 이어 3개월여 뒤인 8월에는 서울대병원 마취과 레지던트로 일하던 외아들이 ‘불의의 사고’를 겪으면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등졌기 때문이다. 당시 겨우 스물여섯이었고, 딸 넷을 낳은 뒤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70년 등단 이후 쉼 없이 달려오던 그의 집필 여정은 일시 휴지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박완서는 한동안 부산 분도수녀원에서 지내다가 미국 여행을 떠나 이듬해 다시 돌아왔다. 그의 휴지기간은 길지 않았다. 비극을 겪은 지 6개월 만인 89년 2월 장편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의 새 연재를 시작했다. 그해 10월엔 중단했던 연재소설 ‘미망’을 다시 집필했다. 그 무렵 박완서는 아들을 잃었을 때의 참담함을 이렇게 썼다.

‘…참척(慘慽·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음)을 당한 어미에게 하는 조의(弔意)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고,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다. (중략) 그 애 없는 세상의 무의미함도 견디기 어렵거니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받나 하는 회답 없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은 더욱 참혹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박완서가 십자가를 내던지며 하느님을 원망할 정도였으니 그 참담한 심정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때 수많은 독자는 ‘이제 겨우 등단 18년 차인 박완서 작가가 한창 물이 올라 있을 때 영영 다시 붓을 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했다. 그래서 6개월 만의 소설가 복귀를 사람들은 안도감과 함께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 ‘극복의 힘’은 어디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을까. 박완서는 자신이 겪은 비극이나 고통과의 투쟁보다 결국 화해를 선택했고, 그 화해의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캐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작가적 기질은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가족사가 바탕을 이룬 등단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1931년 개성에서 20여 리 떨어진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난 박완서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면서 고난의 삶을 시작했다. 조부모에게 맡겨졌다가 먼저 오빠와 함께 서울에 자리 잡은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온 것이 일곱 살 때였다. 숙명여고에 진학해 6·25전쟁 때 행방불명된 소설가 박노갑을 담임 선생으로 만나면서 소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때의 동기생이 소설가 한말숙과 시인 김양식·박명성이었다. 하지만 5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진학해 6월 20일 입학식을 치른 뒤 닷새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소설가의 꿈’은 20년 뒤로 미뤄지게 된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박완서의 가족은 열 살 위인 오빠와 아버지와도 같았던 숙부가 전쟁 초기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번갈아 겪다가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경험한다.

그런 비극을 겪으면서 박완서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차곡차곡 기억 속에 담아두었다가 언젠가는 소설로 쓰리라’는 다짐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기둥이었던 오빠와 숙부가 유명을 달리하면서 박완서는 어머니와 올케,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취직한 곳이 미8군의 PX였는데 얼마 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던 초상화부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박수근 화가와 만나게 되고 그때의 이야기가 데뷔작인 『나목』의 소재가 되는 것이다.

53년 휴전 직후 결혼해 54년 첫딸을 낳은 후 2년 간격으로 다섯 남매를 낳았고,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60년대 막바지까지는 한눈팔 겨를이 없었다. 자식들 키우랴, 살림 보살피랴 바쁜 탓도 있었지만 가정생활의 안락함과 행복감에 젖어든 동안에는 글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별로 일어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60년대 후반 우연히 박수근 화가의 유작전을 관람한 것이 박완서의 잠자던 충동을 일깨웠다. 박완서는 박수근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여기서 박완서의 소설가적 운명은 뒤바뀔 뻔했다. 어느 종합지의 ‘논픽션 공모’를 겨냥해 쓰기 시작했으나 논픽션을 쓰기에는 박수근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었다. 마감일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여성동아’의 장편소설 공모 마감일이 두 달 뒤였다. 박완서는 이미 쓴 원고를 토대로 나름대로 픽션과 상상력을 가미해 소설로 다시 썼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나목』이었다.

두 번째 장편소설이 72~73년 사이에 연재한 『한발기(旱魃記)』였다. 50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1년 동안의 체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몇 년 뒤 『목마른 계절』로 제목을 바꿔 단행본으로 출간됐을 때 박완서의 부탁으로 어느 문예지에 서평을 쓴 인연이 있다. 그를 마지막 만난 것은 2010년 봄 어느 날 저녁 인사동의 한 주점에서였다. 젊은 여성 문인 두엇과 맥주를 마시던 그는 우연히 그 앞을 지나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밝고 화사한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그때까지도 아주 건강해 보였는데 얼마 뒤 담낭암이 발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박완서는 “문학의 효용은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위안을 주고 힘이 돼주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인식 속에서 쓴 그의 소설에 가장 많은 독자가 몰린 것도, 가장 많은 문학상이 주어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상복은 ‘소설을 쓰기만 하면 상을 주니까 무서워서 못 쓰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소설뿐만 아니라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 친선대사로 활동함으로써 고통받는 이들에게 행동으로 위안과 힘이 돼주기도 했다. 병마를 이기지 못한 박완서는 지난 1월 22일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상객에게 조의금을 받지 못하도록 유족에게 미리 당부한 것도 그의 인품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박완서의 유해는 23년 전 먼저 간 남편과 아들이 있는 오산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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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