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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자국,검버섯...삶의 흔적 숨쉬는 날것 그대로의 얼굴

1 경상좌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선 후기 무관 전일상 초상(부분). 김희겸 그림. 비단에 채색. 142.5)90.2㎝.
거대한 중국, 인조적인 일본, 자연스러운 한국
명지대 유홍준 교수는 “중국은 거대(巨大) 지향적, 일본은 인조(人造) 지향적, 우리는 자연(自然) 지향적”이라고 줄여 말한다. 중국 문화의 특징은 크고 화려하다. 만리장성·자금성은 물론 바다 같은 규모의 인공호수를 조성한 것이 그 예다. 이번 ‘초상화의 비밀’에 전시된 청나라 오보이(鼇拜) 초상을 보면 그가 걸치고 있는 옷이 너무 권세적으로 보인다.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명소이기도 한 교토 료안지(龍安寺)에 있는 정원은 가히 일본 문화의 정수다. 세심하게 정돈된 이 정원은 어느 구석 하나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무척 아름다운 조형물이지만 ‘절대 접근 금지’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일본인들은 이를 ‘긴장감이 지배하는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지붕 곡선을 비교해 볼 때 중국이 힘있게 비상하는 것 같다면 일본 것은 일직선 그 자체다. “직선은 창조적이지 않아 재생산적일 뿐”이라고 말한 오스트리아의 환경미술가 훈데르트바서의 말에 따르자면 “직선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그래서 인조적이다.

2 에도 막부의 어용화가 가노 쓰네노부가 그린 일본 통신사로 간 조태억 초상(부분).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붉은 일본 스타일로 그려 놓았다. 종이에 채색. 97.4*49.2㎝.3 이한철이 그린 흥선대원군 초상(부분).안경·시계·환도·고동기 등 다양한 기물이 화려하다. 비단에 채색. 133.7*67.7㎝
한국의 경우는 사뭇 다르다. 신라 때 조성한 경주 안압지(雁鴨池)에서는 뱃놀이를 즐겼고, 조선시대 창덕궁(昌德宮)의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에서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자연은 우리 삶의 일부였다. 여기서 우리의 자연미란 ‘있는 그대로(as is)’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초상화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초상화 자체가 소중한 기록문화”
명지대 이태호 교수는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2008)에서 “조선시대는 초상화의 시대”라고 했다. 조선의 다양한 문화유산 중 동일 장르에서 2000점이 넘게 남아 있는 예가 초상화 말고는 거의 없다. 그래서 조선시대 초상화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버금가는 또 다른 기록문화이기도 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서 초상화는 “유교문화가 지배한 조선에서 충효사상을 시각화한 산물”(성균관대 조선미 교수)이었다.
원래는 가묘에 신주를 모시게 돼 있었지만 부득이하게 영정을 모실 때는 “터럭 한 올도 틀리지 않게 그려야” 제사에 사용할 수 있었다.

4 야외를 배경으로 그린 초상화는 매우 드물다. 1번에서 소개한 무관 전일상의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그렸다(부분). 비단에 채색. 119.5*82.5㎝.
태종을 필두로 김종직·조광조·이황·이이 등 조선 초기 성리학자들은 신주를 강조하며 어진이나 초상을 남기지 않았다. 반면 숙종이나 송시열·권상하 같은 중기 성리학자들은 신주와 영정의 ‘이주(二主)’를 용인하는 논리를 폈다. “우암 송시열은 당시 여느 사대부와 달리 자신의 초상화를 제작하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제례에서 초상화는 필수적이라고 여기면서 부모의 초상화를 모시는 사람을 높이 샀고, 성현을 그린 초상화도 소중히 다루었죠.” 문동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의 말이다.18세기 후반부터는 개인 차원의 초상화가 많이 제작된다. 여러 기물을 배치해 주인공의 문방 취미를 강조하는, 혹은 과시하는 초상화들이 새로운 유행이 됐다.

게다가 조상을 모시는 가묘나 영당 건립은 물론 혈족 관계가 아닌 위인이나 선현을 숭배하는 일반 사우가 크게 늘어났다. 이곳에 모시는 초상화의 수요도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 600여 개에 이르던 서원이나 사우는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1871)에 따라 47개소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그 후 일본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영정은 대부분 사라졌다. 초상화를 그릴 때는 전채와 배채(종이나 비단의 뒷면에 채색하는 기법)를 병행했다. 앞면에만 칠하면 칠이 떨어질 염려가 많고, 뒤에서 칠할 경우 은은한 색상 효과를 살릴 수 있어 맑고 투명한 얼굴빛을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가장 큰 특색은 사실성이다. 성균관대 조선미 교수는 “특히 수염은 곧 안면의 연장이라는 사고하에 먼저 살구색으로 칠한 뒤 흑선과 백선을 교대로 한 올 한 올 세밀히 그려 나갔는데 그 정교함은 다른 나라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심지어 조선 초상화에서는 다양한 피부 병변까지 볼 수 있다. 유럽 문화권의 수많은 초상화에서 피부 병변을 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는 그네들에게 피부 병변이 없었다기보다는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의도적으로 ‘미화 조작’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 및 일본 초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상화를 이런 시각에서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사실적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1335~1408) 어진부터 그렇다. 이마 부위에서 육종(肉腫)인 모반세포모반(母班細胞母班)이 관찰된다.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그려라.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는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흔한 지루각화증(脂漏角化症), 즉 ‘검버섯’을 조선시대 초상화에서는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숙종 때 권상하(1661~1721)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화원 출신인 이명기가 그린 정조 때 학자 순암 오재순의 초상에서도 양쪽 눈밑에 검은 ‘검버섯’ 여러 개가 보인다. 영·정조 시절의 명재상 채제공(1720~99)의 초상화는 사시(斜視)가 선명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볼 수 없으나 유학자 송창명(1689~1769)의 초상에서는 피부병인 백반증(白斑症)이 선명하게 묘사돼 있다. 그 외 다모증(多毛症)이나 마마 자국인 두창상흔(痘瘡傷痕)·흑달(黑疸) 같은 피부 증상을 조금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묘사했다.일본의 경우 초상화를 제작할 때 독특한 지침이 있다. 조선미 교수가 ‘일본의 천황상’이라는 글에서 밝혔듯 일본 왕가에서는 초상화를 제작할 때 인목구비(引目鉤鼻) 기법에 따른다. 아랫볼이 불룩한 둥근 얼굴에 두터운 눈썹, 가늘게 일선으로 그어진 눈, ‘く’자형의 코, 조그마한 붉은 점(朱點)을 찍은 입으로 이뤄진 안모 묘사법에 따르도록 한 것이다.

에도시대 막부의 어용화가 가노 쓰네노부가 통신사로 온 조태억(1675~1728)을 그린 모습에서 쉽게 비교할 수 있다. 조선 초상화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안면 유백색 분장과 함께 유난히 입술을 붉게 그렸다. 조선 숙종 14년 3월 7일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선비가 말하길 하나의 털, 하나의 머리카락이라도 혹 차이가 나면 곧 다른 사람이니 조금이라도 고친다는 것은 논할 가치가 없다(先儒 所謂 一毛一髮少或差殊卽便是別人者 誠是不易之論).”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가 얼마나 큰지 극명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조선시대 초상화는 문화유산이라는 역사유물로서도 자랑스럽지만 기록문화로서 초상화 자체가 내뿜는 ‘곧바른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다.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 나가야 할 정신이기도 하다.



뮌헨대 졸업. 의학 박사. 독일 피부과 교수 자격(Habilitation), 연세대 의대 교수,가천의과학대 총장.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 과정.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을 후원하는 민간단체인 사단법인 현대미술관회 회장에 선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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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