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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Biz] 하나투어 회장의 ‘1위 비결’ “사람·신뢰가 중요하죠”



하나투어는 국내 1위의 여행사다. 2, 3, 4, 5위를 몽땅 합친 것보다 매출이 크다. 지난해 출국한 내국인 1248만 명 중 178 만 명(16%)이 하나투어 이용자다. 신종플루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같은 불가항력의 악재만 생기지 않는다면 성장세가 멈추지 않을 기세다. 박상환(54) 하나투어 회장은 “동북아 시장의 최고 여행기업이 되는 게 목표”라고 말한다. “200석짜리 동남아행 전세기를 인천공항에서 띄운다면 100석은 내국인, 나머지 100석은 중국인으로 채우겠다”는 자신감도 감추지 않는다. 실패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이의 낙관만도 아니다. 박 회장은 “제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말한다. 2시간여 인터뷰 동안 그의 입에서 ‘실패’라는 단어가 열한 번 나왔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그는 ‘얼마든지 자신 있다”는 말도 한 차례 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지난해 하나투어는 218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1993년 창립 이후 거의 매해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신종플루와 금융위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해외여행 수요가 얼어붙은 2008년, 2009년 두 해만 예외였다. 외환위기 때였던 98년에도 매출이 11% 성장했다.

●수년째 여행사 중 부동의 1위를 지켜오고 있는데, 비결이 뭡니까.

 “신뢰를 지켜온 덕분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객·직원, 그리고 전국의 대리점(1150개)들이 우리 회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를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외환위기 직후에 해외여행 수요가 95%나 급감했어요. 여행사들이 줄줄이 감원을 했어요. 직원이 128명인 어느 여행사는 100명을 잘랐죠. 하지만 우리는 직원을 한 명도 감원하지 않았어요.”

 무형(無形)의 여행상품에는 제조설비나 재고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고정비용도 대개 인건비다.

 “외환위기 당시에 ‘향후 5년 안에는 해외여행 수요가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어요. 그때 제가 직원들에게 말했습니다. ‘6개월만 버티자. 다들 감원을 하니까 여행 수요가 20%만 회복되더라도 우리는 먹고살 수 있다’고요. 98년 1, 2월에는 월급을 50%밖에 못 줬는데, 3월에 60%, 4월에 80%, 그리고 5월에 100% 봉급을 줬습니다. 외환위기가 지금까지 제일 큰 위기였죠. 그런 위기를 겪고 이겼으니까 얼마든지 저는 자신이 있어요.”

 ‘신뢰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기업이 어디 있을까. 지키고 싶지만 그렇지 못해 신뢰를 잃을 뿐이지.

 “패키지 여행을 예로 들어 볼까요. 예약을 한 고객 입장에선 가장 중요한 게 ‘실제 출발’입니다. 개별 대리점 입장도 마찬가지고요. ‘두 쌍에게 상품을 팔았으니 얼마를 벌 수 있겠다’ 식으로 기대하겠죠. 그런데 여행사들은 성원(成員)이 안 되면 출발을 안 시킵니다. 10명 넘게 차야 하는데, 8명밖에 안 되면 여행을 안 내보내요. 그런데 우리는 보냅니다. 적자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요.”

 1등이기 때문에 적자를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자를 감수했기 때문에 1등이 된 것 역시 분명하다. 93년 창립 당시 하나투어는 직원 20명으로 시작했다. 당시 큰 여행사는 직원이 150명을 넘었다. 현재 하나투어의 직원은 자회사까지 합쳐 2700명에 이른다.



●그동안 패키지상품을 주로 팔아왔죠. 개별여행자들의 기호에 부응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소비자가 원하는 컨셉트로 상품을 만들 수 있으려면 결국 여행사가 능력이 있어야 해요. 저희는 해외지사 직원이 500명이나 됩니다. 해외지사들이 개척한 현지 상품이 많습니다. 고객들이 꼭 패키지투어를 안 가도 돼요. 항공권과 호텔만 예약하고 현지에서 우리 자회사가 만든 시티투어 상품을 이용해도 돼요. 또 저희가 전국을 1주일간 도는 국내 여행상품도 4, 5년 전부터 하고 있습니다. 100만원이 넘는 상품이에요. 처음 6개월 이상 적자가 났죠. 우리나라에 그런 상품이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잘 판매되고 있어요. 4월부터는 영어권 손님을 대상으로 영어로 가이드를 하는 국내 상품도 하고 있어요. 단 한 명의 손님이라도 돌려 보낸 적이 없어요. ‘규모의 경제’를 갖췄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죠.”

●이른바 아웃바운드뿐만 아니라 인바운드 상품도 하고 계시군요.

 “그럼요. 한국을 허브로 하는 동북아 관광상품을 만들 겁니다. 내국인을 태우고 일본·중국·태국에 나간 우리 여행사 전세기가 2년 전부터 현지에서 외국인 손님을 태우고 들어와요. 우리의 2020년 비전은 글로벌 문화관광 그룹이에요. 문화와 관광을 접목하면 동북아 시장에서 최고의 여행사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K팝(한국 대중가요) 스타 콘서트 관람과 한국 관광을 묶은 상품이 대표적일 거예요. 공연 자체는 적자가 나더라도 관광에서 이익을 낼 수 있죠.”

●해외여행으로 돈을 많이 번 만큼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도 기여하자는 취지인가요.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한국을 허브로 하는 동북아 관광을 하겠다는 겁니다. 중국 30개 도시가 인천과 항공편으로 연결돼 있어요. 중국의 하얼빈이나 선양같이 추운 지역에서 따뜻한 사이판·괌으로 가는 직항편이 아직 없습니다. 인천을 경유해서 가게 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투어가 괌이나 사이판으로 가는 전세기를 매일 띄운다 합시다. 200석짜리 전세기 중 100석은 한국인으로, 나머지 100석은 중국인으로 채우는 것이죠. 중국인들은 기왕 온 김에 한국을 며칠 관광할 수도 있겠죠. 이런 비즈니스는 중국이나 일본의 1위 여행사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밖에는 할 수 없어요.”

 ‘아웃바운드’(내국인 해외 송출)와 ‘인바운드’(방한 외국인 관광객 유치)는 이분법적이다.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박 회장의 구상은 이런 울타리를 뛰어넘는다. 인트라바운드(intrabound), 즉 역내(域內) 관광이다. 그의 구상이 실현된다면 하나투어 전세기에는 내국인과 외국인이 뒤섞여 있게 될 것이다. 

외환위기 때도 감원 안 해 … 직원이 자산, 65세 정년 보장

박 회장은 올해로 ‘여행업만 30년’이다. 대학(중앙대 영어교육과 78학번) 졸업 직후인 1981년 11월 ‘고려여행사’에 공채 시험을 봐서 들어갔다. 당시 직원 160명으로 국내 여행사 중 제일 컸다 한다.

 그렇게 여행업에 입문, 93년에 직원 20명으로 하나투어를 시작했다. 지난해 하나투어의 총판매액(수탁고 기준)이 1조6448억원에 이른다.

●81년이면 해외여행이 쉽지 않던 때인데요.

 “그래요. 80년대 초 만 50세 이상에 한해 관광 목적의 여행을 정부가 허락해줬죠. 100만원을 정부에 2년간 예치하는 조건으로 여권을 만들 수 있었어요. 그러다 87년에 30세 이상으로 바뀌고, 89년에 해외여행이 자유화됐죠.”

●여행사에서 어떤 업무를 맡았습니까.

 “제가 영어를 전공한 덕에 처음에는 비자 수속, 여권 수속을 했어요. 여권이 사회적 신분의 상징인 때였어요. 여권 수수료가 2만3750원인가 했는데, 손님들이 5만원이나 10만원 주고 나머지는 용돈으로 쓰라고 했어요. ”

 박 회장은 89년 고려여행사를 나와 선후배 15명과 국일여행사(현재의 모두투어)를 차렸다. ‘여행사 중 최초 상장사’를 만들자는 목표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상장 여부를 놓고 갈등이 생겼다.

 “기존 세법에 따르면 아웃바운드 여행사는 10% 이상의 이익을 내지 못하게 돼 있었어요. ‘10% 넘게 이익을 내면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한다’는 이유였던 것 같아요. 지금 보면 현실과는 안 맞는 법이죠. 아무튼 10명을 기준으로 해서 이익이 10% 나도록 상품을 만들었는데, 실제로는 15명이 나갈 수도 있잖아요. 그럼 이익이 10%가 넘는 거예요. 법에 저촉되지 않으려면 이렇게 발생한 이익은 매출에 포함시킬 수 없었죠. 92년도엔가 법이 바뀌긴 했지만, 기존의 회계 처리 관행을 버리기가 쉽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상장 여부를 놓고 내부 갈등이 생겼어요. 해법으로 모두투어에서 100% 투자해서 국진여행사를 만들었어요. 지금 하나투어의 전신이죠. 결국은 제가 국진여행사를 인수하는 방식으로 독립을 했죠.”

 박 회장은 우리사주제를 도입했고, 96년에 상호를 하나투어로 바꿨다. 감원 없이 외환위기를 극복했고, 2000년 국내 여행사 중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했다.

●하나투어는 감원을 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더군요.

 “본인이 원하면 누구든지 65세까지 근무하게끔 보장을 해줍니다. 직원들의 평균 연령이 높아지면서 인건비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나 아웃풋이 똑같다면 적자를 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저희는 일정 나이가 되면 일을 적게 하고 대신 임금을 적게 받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보장하고 있어요.”

 하나투어는 2005년에 잡셰어링(job-sharing)을 도입했다. 50세 이상을 대상으로 ‘주 4일 근무 + 80% 급여’ ‘주 3일 근무 + 60% 급여’ ‘주 2일 근무 + 40% 급여’를 적용하는 제도다. 제도 도입 직후부터 박 회장도 이 제도를 실천하고 있다. 현재는 주 3일을 일하고 급여의 60%를 받는다. 업무 특성상 주 2일을 쉬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매일 출근하되 오전에만 근무를 한다. 박 회장은 이 제도를 활용해 대학원을 다녔고, 2010년 관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행사는 사람이 재산이에요. 우리 회사 시가총액이 1조원 넘는데 실자산가치가 1500억원, 그리고 영업권이 2500억원 정도예요. 결국은 사람이라는 것이죠. 직원이 우리 회사의 동력인 거예요.”

 박 회장에게는 사람이 ‘재산’인 정도가 아니라 ‘전부’인 것 같다. ‘하나투어’라는 이름은 박 회장이 직접 지었다. 뜻을 물어보니 ‘함께 하나가 되자’라 한다.

 박 회장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 출신이다. 예부터 과일 맛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 인구가 2500명 정도이니 박 회장의 성공은 ‘개천에서 용 난 격’이다. 박 회장 스스로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소리를 진짜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 박 회장이 “젊을 때 내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박 회장은 중학교를 재수해서 들어갔다. 고사장에 5분 지각한 까닭이다. “5분 지각 했다고 입실을 안 시켜주는 거예요. 1년을 꿇고서 제 초등학교 1년 후배들이랑 같이 옥과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후로도 실패는 거듭됐다. 광주의 명문고등학교에 진학하길 희망했으나 시험에 미끄러졌다. 대학도 재수를 했으나 그마저 떨어졌다. 전남 순창에서 6개월 정도 ‘면 서기’(지금의 9급 공무원)를 했다. 재수 생활을 했던 서울이 그리워 삼수에 도전했다. 중앙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영어’를 전공하면 갈 수 있는 직장이 많을 것 같아서다. 대학 졸업 후 무역회사 취업에 도전했다. 그러나 족족 떨어졌다. 그래서 “여행업이 뭔지도 잘 모르고 여행사에 들어왔다”고 했다.

●종합상사 시험 안 떨어졌으면 지금의 하나투어는 없었겠군요. 떨어지신 게 참 다행입니다.

 “다행이죠. 하하하. 인생이란 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제가 이렇게 된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j 칵테일 >> 동네마다 ‘하나투어’ 유지되는 까닭

웬만한 도시라면 하나투어 로고가 붙은 점포를 거리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다. 면(面) 단위 시골에서도 종종 눈에 띈다. 하나투어 여행상품만 파는 판매점들이다. 하나투어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이런 판매점이 1150곳(직원 숫자론 5000명) 정도 된다. 그런데 인터넷 시대에 이들 오프라인 판매점이 어떻게 유지될까.

 소비자가 이들 판매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면 하나투어는 9%의 수수료를 판매점에 준다. 그런데 여행자가 온라인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경우에도 여행자 거주지의 판매점에 수수료(7%)를 준다. 왜일까.

 “고객들 취향이 참 다양합니다. 온라인으로 예약하더라도 ‘항공기 좌석을 앞자리로 달라’ ‘방은 남향이냐’ ‘우리 가족 중 아버지 음식은 소금을 빼 달라’ 등 세세한 것들을 주문합니다. 이걸 온라인 시스템으로 다 해결할 수가 없어요. 결국 고객과 통화해야 하죠. 이런 서비스를 우리 판매점 직원들이 다 해주는 거예요.”

 ‘우리 동네에서 인천공항 가는 방법’도 이들 판매점이 안내해준다. 다만 전문판매점은 하나투어 이외 여행사 상품은 판매할 수 없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저희 가족이라고 봅니다. 가족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내줄 수 있잖아요. 부모라면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식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우리 아버지한테 배웠거든요. 아버지는 굉장히 무책임하셨어요. 천석지기 막내아들로 태어나셨는데, 평생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요. 할아버지한테 받은 재산은 다 까먹었고요. 결국 우리 어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어요. 우리가 5남1녀인데, 어머니는 끝까지 자식들을 지키셨어요. 제가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 어머닙니다.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도 어머니이고요.

 어머니에게 자식들이 소중하셨듯이 제게도 아들, 딸이 중요하죠. 나를 평생 믿고 따라와준 아내도 너무 고맙고요. 딸은 저희 회사에 같이 있고, 군대 가 있는 아들도 ‘여행업에 관심이 있다’고 말해요. 하지만 자식들에게 제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들이 가업을 잇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너희들이 가업으로 이을 수 있는 개인 회사가 아니다’고요. 저희 애들은 사원으로 들어와서 순식간에 임원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아버지가 창업자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조금 유리할 수는 있겠죠. 그 이상은 절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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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