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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건반 위 ‘뛰어다니는’ 피아니스트 랑랑 톡톡 튀는 ‘스타카토’ 인터뷰



5등·4등·3등…. 호명이 이어졌다. 1994년 독일 에틀링겐 국제 피아노 콩쿠르. 2등상 발표 순서가 되자 열두 살 중국 소년은 귀를 틀어막았다. ‘안 돼, 2등만은 절대로 안 돼!’ 다행히 다른 이름이 불렸다. 잠시 뜸을 들인 사회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올해 최종 우승자는… 랑랑입니다.” 뉴욕타임스가 ‘클래식 음악이라는 행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티스트’라는 수식어를 붙여준 남자 랑랑(郞朗·29)의 첫 세계 무대 등장은 이렇게 이뤄졌다. 그는 박력 있는 연주와 역동적 무대 매너로 클래식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을 듣는다. 그와의 e-메일 인터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반 위를 ‘뛰어다니는’ 피아니스트답게 짧지만 톡톡 튀는 ‘스타카토’ 답변을 쏟아냈다.

뉴욕중앙일보=박숙희 문화전문기자

중앙포토
랑랑은 22일 특별한 콘서트를 열었다.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필라델피아의 버라이즌홀에서 필라오케스트라와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헝가리 광시곡 제2번’을 협연했다. 샤를 뒤투아가 지휘한 이 콘서트는 세계 270개 영화관에서도 상영됐다. 12월 27일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도 콘서트를 열 계획이다. 리스트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리스트에 대해 뭔가 특별한 추억이라도 있나.

 “그를 생각하면 두 살 때 기억이 떠오른다.”

●두 살 때가 기억난다고?

 “리스트를 처음 알게 된 건… 만화영화 ‘톰과 제리’를 보면서였다.”

 랑랑은 중국 선양에서 태어났다. 그가 피아노에 눈을 뜬 것은 자신의 말처럼 ‘톰과 제리’ 덕분이다. 흑백 TV를 통해 이 만화영화를 본 두 살배기 아기는 단박에 맘을 뺏겼다. 그가 가장 좋아한 에피소드는 ‘고양이협주곡(The Cat Concerto)’이다. 얘기는 이렇다. 근사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고양이 톰이 피아노 앞에 앉는다. 하지만 피아노 속에 들어가 단잠을 즐기다 톰의 연주 때문에 눈을 뜬 생쥐 제리가 연주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엎치락뒤치락 싸움이 벌어지지만 톰은 연주를 멈추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고양이 톰이 연주하는 곡이 바로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 제2번’이다. 혹시 랑랑의 과장돼 보이는 연주 방식도 고양이 톰의 영향인 건 아닐까. 그래서 물었다.

●톰과 제리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했나.

 “둘 다 좋아했지만… 그래도 하나를 꼽으라면 톰 아닐까? 피아노를 연주한 것은 톰이니까 말이다.”

●지금은 리스트를 어떻게 평가하나.

 “그는 나의 ‘영웅’이다.”

 리스트와 랑랑…. 둘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매력 있는 외모에 폭풍 같은 무대 매너로 ‘록스타’ 부럽지 않은 인기를 끈 것이 그렇다. 리스트는 유럽 공연 때마다 여성 팬을 몰고 다녔다. 골수 팬들은 리스트의 초상이 들어간 브로치를 달고 다니기도 했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에게는 연신 여성들의 손수건과 장갑이 날아들었다. 랑랑은 시사주간지 타임이 “클래식에서 ‘엄숙함’이라는 껍질을 걷어낸 혁명가”라고 평가한 인물이다. 리스트를 ‘영웅’으로 꼽을 만하다는 얘기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다. 둘 다 엄격한 음악가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하루 종일 피아노 연습에 매달려야 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매우… 엄격하셨다.”

 이 짧은 대답에 이들 부자(父子)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애증이 모두 담겨 있다. 그의 아버지는 좌절한 음악가였다. 중국의 전통 현악기인 ‘얼후’ 연주자였던 아버지는 문화혁명이 터지면서 음악학교에 입학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음악을 포기하진 않았다. 공장과 서커스단 밴드에서 일하며 틈틈이 개인 교습을 받아 기어이 공군 관현악단에 들어갔다. 랑랑의 대답처럼 아버지는 아들을 ‘엄격’하게 키웠다. 랑랑은 다섯 살 때 첫 출전한 콩쿠르에서 1등을 했다. 그가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짜준 일과표를 보면 숨이 콱 막힌다. 오전 5시45분 기상→1시간 연습→오전 7시 등교→점심시간 15분, 연습 45분→방과 후 2시간 연습→저녁식사 20분→추가로 2시간 연습→학교 숙제→취침.

 그는 자전 에세이 『건반 위의 골든 보이, 랑랑(원제 Journey of a Thousand Miles)』에서 “아버지의 입에서 ‘1등’이란 말이 떠나는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아들이 “작곡가들 중에선 누가 1등이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주저 없이 모차르트를 꼽았다. “모차르트는 탁월한 천재였다. 하지만 그의 음악성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아버지 덕분이지. 모차르트 ‘불멸의 신화’는 두 사람의 합작품이야.” 자신도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공군 관현악단을 그만두고 공안(경찰)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랑랑이 여덟 살 때 결단을 내렸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지방 도시 선양을 떠나 아들과 함께 수도 베이징으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전화 교환원이었던 어머니는 선양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생활비를 벌어 보내야 하니까. 꼬마 아들에게서 강제로 엄마를 떼어놓은 것이다.

●베이징에 갔을 때 뭐가 가장 그리웠나.

 “엄마의 요리였다.”(그는 “아버지의 음식이 어찌나 괴상한 맛이었던지, 먹은 것을 다 토해버렸던 기억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면서 얻은 것이 있다면.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것을 배웠다.”

 베이징에 도착한 부자를 반긴 것은 빈민가의 썩은 개천 냄새와 코를 찌르는 오줌 냄새였다. 화장실은 공동 사용이었고, 겨울이면 난방비가 없어 덜덜 떨며 피아노를 쳤다. 랑랑은 “거의 미치광이 수준으로 연습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통’은 이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새로 만난 피아노 선생님은 랑랑을 싫어했다. 재능이 없다며 쫓겨난 다음 날 랑랑이 학교에서 늦게 돌아오자 아버지는 폭발했다. “너 같은 놈은 살 가치도 없어. 당장 뛰어내려! 뛰어내려 죽어 버려!” 아홉 살 아들은 울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벽을 치기 시작했다. “내 손이 싫어요! 아빠도 싫고, 피아노도 싫어요! 피아노 때문에 아빠는 돌았어요!” “그만해. 미안하다…. 제발 손만은 안 돼!” “이제 다신 연습하지 않을 거예요! 죽을 때까지 피아노는 건드리지도 않을 거예요!”

 랑랑이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넉 달이 지나서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자신도 피아노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압적인 아버지에게 반항하긴 했어도 그 역시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다. 랑랑은 베이징 생활 18개월 만에 3000명의 지원자 중 1등으로 중앙음악원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유·소년기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인가.

 “아니다. 피아노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내게도 ‘평범한’ 어린 시절이 있었다. 하긴 다른 이들과 좀 다르긴 하겠지…. 그래도 그 자체로 즐기기 위해 노력했다.”

 열두 살 나이로 독일 에틀링겐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랑랑은 이듬해 일본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콩쿠르에서도 우승했다. 소년은 중국의 샛별이 됐다. 하지만 아버지는 “더 넓은 세상을 보자”며 미국행을 결정했다. 랑랑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커티스음악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했다. 이 학교는 미국의 모든 고등 교육기관 중에서 합격률이 가장 낮은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번에도 어머니는 함께 가지 못했다.

 미국 생활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등만이 전부라고 배웠던 랑랑에게 스승 게리 그래프먼은 “더 이상 콩쿠르에 나가지 마라”고 했다. “이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면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변함없었다. 그에게 끊임없이 연습을 강요했다. 한 번은 참다 못한 아들이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에게 “미치광이 독재자”라며 “지옥에나 가버리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당장 두들겨 맞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어딘가 쓸쓸한 표정이었다. “그래… 내가 중국으로 돌아가마.” 아버지가 짐을 싸서 공항으로 떠나자 아들은 두려워졌다.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다. 아들은 공항으로 달려갔다. “가지… 마세요.” “진심이냐?” “네, 가지 마세요.” 아버지는 가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순간을 꼽는다면.

 “열일곱 살 때 미국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 마지막 순간에 앙드레 와츠의 대타로 무대에 오른 것이다.”

 이날 밤 그는 크리스토프 에센바흐의 지휘로 시카고심포니와 함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했다. 그 한 번의 연주가 모든 것을 바꿔놨다. 랑랑은 세계적 스타가 됐다. 그는 시카고심포니·뉴욕필·보스턴심포니·클리블랜드·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미국의 ‘빅5’ 오케스트라와 모두 협연했다. 베를린필하모닉·빈필하모닉과도 함께 연주했다.

●어릴 때 동경했던 음악가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아서 루빈스타인, 그리고 나의 멘토인 게리 그래프먼,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야핀 주…. 그들이 내 ‘롤 모델’이었다.”

 그는 2008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40억 명 이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아노를 쳤다. 이듬해엔 시사주간지 타임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젠 본인이 많은 이들의 롤 모델이 됐다. 그들에게 조언한다면.

 “내가 뭘 원하는지부터 명확히 하라. 그리고 목표에 집중하라. 많이, 더 많이 연습하라.”

앞으로 연주하고 싶은 곳은?
“만리장성·우주 … 어디서든 할 수 있다”


랑랑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의 꿈은 뭘까. ‘스피드 퀴즈’처럼 일문일답을 주고받았다.

●올림픽, 백악관, 노벨상 수상식에서 연주했다. 앞으로 연주하고 싶은 곳은.

 “만리장성, 아크로폴리스, 우주…. 누가 알겠나. 어디서든 할 수 있다.”

●랑랑에게 피아노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

●피아노를 안 쳤다면?

 “글쎄, 토크쇼 사회자가 되지 않았을까.”

●클래식 말고 듣는 음악은.

 “팝·R&B·재즈…. 모든 장르를 다 듣는다.”

●콘서트를 앞두고 습관적으로 하는 일은.

 “침착해지려고 노력한다.”

●찬사도 많이 받았지만, 그냥 피아노를 ‘쾅쾅’ 두드린다는 평도 있다.

 “내 음악을 내 방식대로 연주할 뿐이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다.”

●유니세프 친선대사로도 활동 중인데.

 “자선활동을 홍보하고 있다. 어린이들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60세의 본인 모습을 예상한다면.

 “여전히 피아노 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으면 좋겠다.”

●200년 후 어떤 연주자로 기억될까.

 “그건 내가 아닌 청중에게 물어봐야지.”

●요즘 공연을 다닐 때도 아버지와 함께 다니나.

 “보통 어머니가 함께 다니신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나.

 “확·실·히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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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