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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알고 싶거든 침묵하세요

정진홍
논설위원
# “침묵은 너무 정확해.” 서울 중구 필동의 이해랑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레드’에서 화가 마크 로스코 역을 맡은 배우 강신일이 극중의 자기 작품을 응시하며 던진 대사다. 그것은 2시간 가깝게 쉴새 없이 쏟아지는 대사 중에서도 유독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은 한마디였다.

 #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선 안 된다. 작품에 어떠한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뿐이다. 내 작품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오직 침묵뿐이다.” 로스코가 남긴 육성이다. 그렇다. 작품 앞에 서는 최선의 자세는 침묵이다. 그 침묵이 관점을 낳는다. 꼭 요즘 같은 날씨였던 지난봄의 어느 날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마주했던 로스코의 작품이 떠오른다. 그가 자살한 1970년 그해 그렸던 ‘무제(無題·Untitled)’의 작품. 혼돈과도 같은 회색 위에 영원한 침묵 같은 검은색이 절묘하리만큼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그림이다. “아, 저런 것이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그 작품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나로 하여금 작품을 응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울러 침묵도 색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 교향곡의 진수를 맛보고 싶다면 침묵해야 한다. 오케스트라의 장중한 음을 완성하는 것은 다름아닌 침묵이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의 완결은 4악장이 끝난 뒤 여전히 내려올 줄 모른 채 허공에 정지해 있는 지휘자의 손이 만들어낸 완벽한 침묵에 있다. 그 침묵을 누군가의 마음 급한 박수 소리가 깨버린다면 그날 연주는 그것으로 망친 셈이다. 얼마 전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서울시향을 통해 들려준 말러 교향곡 6번도 마찬가지다. 청중의 침묵 속에서 시작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장장 90여 분 동안 거침없이 진행된 후 4악장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포디엄 위에서 동작을 멈춘 채 서 있는 그 몇 초 안 되는 침묵의 시간이야말로 교향곡을 완성하는 순간이다. 위대한 교향곡만큼 완벽한 침묵을 요구하는 경우도 없다. 단 2초의 침묵이 90여 분의 교향곡 연주를 완결 짓는다. 그런 점에서 침묵은 음의 진정한 구현자요, 위대한 완성자다. 침묵을 모르면 결코 음을 알 수 없다.

 # 말은 다투지만 침묵은 다투지 않는다. 요란한 말의 다툼이었던 10·26 재·보선도 끝났다. 세상은 변화를 원하는 게 아니라 이미 변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마치 로스코의 그림처럼 분명한 색들이 뚜렷한 단층을 이룬 ‘시대의 변화’라는 작품이 놓여 있다. 그 나누어진 색들은 한번 쓱 붓질해 만들어진 것들이 결코 아니다. 수십, 수백, 수천 번의 붓질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색이다. 분명히 나누어져 뚜렷한 단층을 이룬 색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시대의 변화’란 이름의 작품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 섣부른 얘기로 관념적 덧칠을 할 때가 아니다. 침묵 속에 깊이 살피며 봐야 한다. 극명하게 나뉜 색들이 켜켜이 쌓여 이뤄진 그 바닥에 뭐가 있는지를!

 # 가을 산은 깊은 침묵을 만든다. 나에게 최고의 산행은 산에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간혹 그런 산행의 경험이 없지 않다.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다. 그때 비로소 깊은 침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 소리, 새 소리, 낙엽 밟는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없을 때 마주하게 되는 깊은 침묵이야말로 고독한 산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가을 산행에서 마주하는 그 깊은 침묵은 다름아닌 나를 정조준한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침묵은 정확하다. 지금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몰골인지,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지, 누구를 바라보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며 하나하나 되묻게 만든다. 참으로 고맙고 소중한 침묵이 아닐 수 없다. 정말이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침묵할 일이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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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