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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사대교린

조선의 외교는 명·청과는 사대(事大)하고 일본·유구 등과는 친한 이웃으로 지내는 교린(交隣)정책이 핵심이었다. 이 사대교린(事大交隣)은 굴욕외교가 아니라 조선에 실질적 이익을 안겨준 실용 외교정책이었다. 중인 출신 역관(譯官)들이 쟁쟁한 사대부 가문들을 제치고 조선의 최대 갑부가 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 있었다. 명나라는 삼년에 한 번 조공하는 ‘삼년일공(三年一貢)’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1년에 세 번 조공하는 일년삼공(一年三貢)을 주장했다. 조공무역(朝貢貿易)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조공은 일방적 행위가 아니라 조공이란 형식 속에서 교역품을 맞바꾸는 행위였다. 조공의 원칙은 ‘조공이 있으면 사여(賜與)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조공품(朝貢品)을 전달하면 그 대가로 사여품(賜與品)을 내려야 했는데,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많은 것이 원칙이었다. 상국(上國)이란 체면 유지 비용이자 평화 유지 비용이었다.



 조공품과 사여품을 맞바꾸는 것이 공무역(公貿易)이라면 사행(使行)을 따라간 역관들의 상행위가 사무역(私貿易)이었다. 조선은 역관들에게 여비를 지급하는 대신 인삼 팔포(八包)를 가져가라는 무역권을 주었다. 역관들은 중국의 지배층에게 고려 인삼을 팔고, 그 돈으로 조선의 지배층이 선호하는 비단·금은 세공품 등을 가져와 이중으로 이익을 남겼다. 그래서 역관들이 주도하는 국제무역을 팔포무역(八包貿易)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명·청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도 조선의 국부(國富)와 역관들을 살찌웠다. 청나라는 중기까지는 해금(海禁)정책을 썼기 때문에 일본은 청과 직접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청나라는 조공외교의 틀 속에서 조선과의 무역만 허용했기 때문에 일본은 동래 왜관에서 조선 역관들에게 청의 물품을 구입하는 삼각무역을 해야 했다. 조선의 역관들을 상역(商譯) 또는 역상(譯商)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역원(司譯院:역관 관청)의 기록인 『통문관지(通文館志)』는 “사행(使行)이 갈 때마다 응당 가지고 가는 팔포(八包)를 합하여 계산하면, 1년에 압록강을 건너가는 은화(銀貨)가 거의 50, 60만 냥에 이르렀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막대한 은화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이었다. 조선은 사대교린이라는 외교정책으로 평화를 유지하면서 막대한 국제무역의 이익도 취했던 것이다.



 한국이 일본에 이어 중국과도 통화 스와프를 확대한다는 소식에 선조들의 지혜로웠던 외교정책의 단상(斷想)이 떠올랐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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