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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BEST4] 이영미의 ‘위대한 식재료’ - 문경 ‘우렁쌀’

가을 들녘의 벼는 정말 아름답다. 살풋 고개 숙인 벼 나락은 수묵화 대가가 그린 난초의 선보다 우아하고, 나락의 까실까실한 질감은 댓잎처럼 짱짱하다. 작물 회전이 빠른 밭농사와 달리 1년 꼬박 애쓰고 오래 기다린 끝에 벼를 추수하는 논은 묘한 축제 분위기마저 느끼게 한다. 그 축제의 여왕이 벼라면, 신나게 뛰어다니는 메뚜기는 축제의 광대다(사진). 메뚜기는 농약 없는 건강한 논에서만 볼 수 있는 정겨운 옛 친구다.



세상을 거꾸로 사는 인간들이 있다. 남들은 다 농사에서 손 턴다는 시기에 귀농을 하고, 다들 돈 되는 특용작물 할 때 꼭 쌀농사를 고집하고, 다들 농사 규모 키워야 한다는데도 작은 규모의 소농(小農)만을 고집하는, 꽉 막힌 인간들 말이다. 이런 사람의 가족들은 참으로 속깨나 썩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이 꽉 막힌 이들이 짓는 정직한 쌀을 사먹는다면? 나는 이런 유기농 쌀을 먹는다.

뽀얀 쌀뜨물로 걱정없이 된장 끓일 수 있는 그런 쌀



사실 그동안 쌀 고르기에 꽤 고심을 했다. 대형마트에 전시된 수십 종 브랜드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지난해 초까지 18년 동안 산 곳은, 쌀 생산지로 으뜸인 경기도 이천이었고, 그곳 농협 마트에는 오로지 ‘임금님표 이천쌀’밖에 없었다. 이천 사람들이 지닌 쌀에 대한 자부심은 정말 대단하다. 보통 밥상 앞에서 반찬 맛있다는 덕담이 오가는데, 이천에서는 “밥 맛있다, 쌀 맛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만큼 쌀에 대해 민감하며 자부심도 하늘을 찌른다.



나도 이천 입성과 함께 한동안 이천 쌀을 먹었다. 확실히 맛이 있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적당하게 찰기가 있는 쌀밥의 매력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그 맛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결국 나는 편안한 압력솥을 포기하고 작은 무쇠 가마솥을 사고야 말았다. 압력솥이 찰기를 강화시켜 가벼운 냄비 밥보다는 맛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압력이 과하여 아무래도 밥이 좀 질겨진다. 그에 비해 무쇠솥은 열을 삼면으로 골고루 퍼지게 할 뿐 아니라, 뚜껑 무게가 냄비뚜껑보다는 무겁고 압력밥솥보다는 가벼워 아주 적절한 압력을 유지해준다. 밥물 넘치지 않게 불 조절을 해가면서 밥을 지으면, 정말 윤기와 적절한 찰기에 부드러움까지 갖춘 밥이 된다. 누룽지는 또 얼마나 환상적인가. 뜨거운 밥솥 밑바닥에서 바작바작 긁히는 누룽지는, 프라이팬으로 대충 만든 누룽지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그래도 계속 고민이 남았다. 막상 시골에 살다 보니 쌀에 농약 뿌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좀 끔찍한 일이었다. 사실 쌀농사에서는, 볍씨 소독부터 수확 직전 나방애벌레 방제에 이르기까지 10여 차례나 농약을 쓰는 것이 기본이란다. 여름에 비가 오고 난 직후에는 논에서 꽤 멀리 떨어진 우리 집까지 농약 냄새가 진동을 했다. 비 온 후 심해지는 병충해를 막으려 약을 친 것이다. 그러니 밥이 맛은 있지만 찜찜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에야 드디어 아는 후배가 문경으로 귀농해 유기농 쌀을 생산한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바로 그 꽉 막힌 인간 중 하나다.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그 ‘희양산 우렁쌀’을 사먹는다. 유기농 쌀의 맛은 솔직히 일반 쌀과 별다르지 않다. 농약이나 화학비료의 사용 유무보다 쌀의 맛을 가르는 건 벼의 품종과 기후인 듯했다.



추수 때 찾아가 보니 정말 그곳은 경북 오지 산골마을이었다. 백두대간 등줄기에 솟아오른 희양산 바로 아래의 작은 다랑논(계단식 논)부터 그 골짜기를 따라 죽 내려온 25만8000㎡ 논을 28가구가 ‘희양산 우렁쌀 작목반’을 결성해 유기농 벼로 경작하고 있었다. 추수는 10월 중순부터 시작해 11월 초까지 모두 끝을 낸다. 작목반의 건조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벼를 말리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논에서는 콤바인으로 부지런히 벼를 수확하고 있었다. 워낙 좁은 다랑논이라 콤바인 움직이기도 비좁다. 논 주인인 팔순 넘은 할아버지는 콤바인이 움직일 자리를 찾아 직접 낫으로 벼를 벤다. 베테랑 낫질 솜씨는 날렵했다. 콤바인이 뱉어놓은 볏짚을 들어 코에 대어 보았다. 아, 신선한 지푸라기 냄새다! 얼른 한 줌 쥐어서 가방에 넣었다. 요즘은 이렇게 농약 안 묻은 깨끗한 볏짚도 귀물 중 귀물이다. 집에서 청국장이라도 띄우려면 이게 있어야 한다.



조금 더 위쪽으로 더 올라갔다. 산골짜기마다 뽕나무 천지이고 심지어 다래도 있다. 또 어느 논이나 메뚜기 천지다. 벼를 건드리기가 무섭게 서너 마리씩 후닥닥 튄다.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메뚜기들이 무농약 2, 3년 만에 되돌아왔단다. 노인들의 메뚜기 장조림 솜씨도 되살아났다.



이 작목반은 10여 년 전부터 서울에서 귀농한 6가구가 토박이 농민들과 손을 잡고 운영한다. 작목반의 핵심은 40, 50대의 젊은(?) 농군들인데, 몇 년 전부터 70, 80대의 노인들까지 설득해 유기농 대열에 합류시켰다. 외지에서 온 젊은 것들, 그것도 대학 나온 먹물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소작을 부치러 온다니, 경계를 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수지도 맞지 않는 쌀농사를 계속하던 노인들은, 농협 수매가보다 월등하게 비싸게 쌀을 팔 수 있는 판로를 개척해가던 이들 젊은이에게 결국 마음을 열었고, 작목반에 합류해 유기농 경작으로 돌아섰다.



‘희양산 우렁쌀’은 올해 처음으로 유기농 인증을 받았다. 문경시의 쌀로는 최초란다. 하지만 이들은 좀 심드렁하다. 인증만 없었을 뿐 여태까지도 그렇게 농사를 지어왔다는 것이다. 여태껏 안 하고 있던 인증을 받은 것은, 노인 분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래서 유기농 인증이라 해도 ‘승격’이라 생각하지 않고, 쌀값도 지난해와 똑같다.



이들은 ‘내 얼굴이 인증인데 무슨 인증이 또 필요하냐’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이들의 쌀이 모두 직거래로 팔리기 때문이다. 지인들과 그들이 추천한 사람들이 먹는 쌀이니 신용은 생명이다. 이들의 모토는 ‘누가 먹는지 알고 짓는 농사! 누가 짓는지 알고 먹는 밥상!’이다.



이들이 소농을 고집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친환경 쌀 생산자 중에는 규모가 큰 곳들은 생산량이 많아 직거래만으로는 팔 수 없다. 그래서 중간상을 거쳐야 하니 그만큼 농가 수매가는 낮아진다. 이러다 보니 아무래도 친환경의 질이 떨어지고, 종종 일반 쌀이 섞여 나오는 식의 사고도 생기게 마련이다. 늘 똑같은 질의 쌀을 중간상이 요구하는 정도의 양으로 생산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얼굴도 모르는 최종 소비자들에게 자신들의 사정을 시시콜콜 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친환경농업을 하면서도 물량이니 미질(米質)이니 하는 눈에 보이는 측면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얼굴 없는 시장의 논리가 참으로 무섭다.



그러나 ‘희양산 우렁쌀’은 지역 한살림에 소량 납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직거래로 판다. 지난해에는 가을 폭우로 생산량이 줄었고, 미질도 떨어졌다. 올 9월 들어 물량이 바닥이 났고, 고객 모두에게 ‘품절’이라고 공지했다. 하지만 얼굴을 아는 고객들은 그런 사정을 모두 이해해준다. 많이 생산해 중간상에게 싸게 파느니, 소농으로 조금 생산하지만 친환경의 가치만은 우직하게 지키며 직거래의 신뢰를 유지하겠단다. 친환경, 직거래, 공동체적 연대와 적정 규모는 모두 피할 수 없는 한 묶음이다.



집에 돌아와 보니, 어제 도정해 부친 햅쌀이 택배로 도착해 있었다.(이들은 매주 화요일 주문 받은 만큼만 도정을 한다.) 햅쌀은 쌀뜨물 맛부터 다르다. 된장국 끓이기에 딱 좋은 뜨물이다. 뽀얀 쌀뜨물을 찜찜한 농약 걱정 하나 없이 된장국에 부을 수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햅쌀 향기 풍기며 밥이 익어간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사진=박종근 기자



이영미 1961년 서울 신설동 한옥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 개성 출신 할머니와 전북 출신 어머니의 손에서 나온 음식을 먹으며 ‘절대 미각’이 개발됐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대중문화평론가로, 음식에 대한 ‘평론’은 중간중간 취미 생활로 이어가고 있다. 『한국대중가요사』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등이 그의 직업 관련 저서. 또 2006년 음식에세이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를 펴냈으며, 2010년 3월부터 1년 동안 중앙SUNDAY에 칼럼 ‘제철 밥상 차리기’를 연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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