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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최후 은신처는 배수관 200m 떨어진 가정집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20일(현지시간) 시민군에 잡혔던 시르테 주요 도로 인근의 배수관 앞에서 본지 이상언 특파원이 포즈를 취했다.카다피가 도시 밖으로 도주하던 중 나토군의 공습을 받자 황급히 피신했던 곳이다. 그는 배수관에서 끌려 나온 뒤 자신이 갖고 있던 황금권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가 보도했다. [시르테=이상언 특파원]


오래 묵은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파리들이 들끓었다.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최고지도자는 그곳에서 공포에 떨며 숨죽이고 있었을 것이다. 지름 90㎝의 시르테 배수관, 지난 20일(현지시간) 카다피가 시민군에 붙잡힌 현장이다.

이상언 특파원, 카다피 마지막 현장 시르테를 가다



  리비아 과도국가 위원회(NTC)가 23일 오후 리비아 해방을 공식 선포한 가운데 22일 오후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약 500㎞ 떨어져 있는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를 찾았다. 그곳에는 국민에게 버림받은 독재자의 최후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보여 주는 흔적이 널려 있었다. 42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독재자의 마지막 은신처였던 배수관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황량한 들판을 지나는 도로 아래에 놓인 길이 약 10m의 땅굴과 같은 것이었다. 시민군에 따르면 카다피는 도주 중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군의 폭격을 당하자 4남 무타심과 측근 두 명이 함께 배수관에 뛰어들었다. 연명을 위해 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던 그는 시민군 병사에게 발각되자 목숨을 구걸하며 기어 나왔다. 시민군 병사의 총격에 사망하기 조금 전의 상황이다.



 배수관은 이틀 새 관광명소가 돼 있었다. 시민군과 일반시민들이 잇따라 찾아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시민군은 “신은 위대하다”고 외치며 허공을 향해 연방 총을 쏘아댔다. 배수관 주변은 낙서로 얼룩져 있었다. 시민군에 물어보니 아랍어로 ‘해방 리비아’ 등의 구호를 쓴 게 대부분이었으나 방문자들이 적고 간 이름도 있었다.



카다피가 최후를 맞기 전 머물렀던 시르테의 민가 내부. 각종 화기에 맞아 크고 작은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다. [시르테=이상언 특파원]


 그곳에서 200m 떨어진 곳에는 카다피가 잠시 기거했던 가정집이 있었다. 이웃 주민들은 카다피가 그곳에 얼마나 머물렀는지 몰랐으나 시민군의 공격을 받자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담은 시민군의 공격으로 허물어져 있었다. 거실 벽에도 크고 작은 총알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집 앞에는 전소한 차량이 석 대 있었다. 카다피와 무타심, 측근 및 경호원들의 차였다. 카다피의 차로 추정되는 도요타 랜드크루저 안에는 불에 탄 무전기가 보였다. 한 주민이 기념품으로 간직하려 한다며 차 번호판을 떼고 있었다.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인근에서는 카다피 경호 부대원이 이용했던 승용차 10여 대가 나토군의 공습으로 불탄 채로 널려 있었다. 그 옆에는 40여 구의 시신이 나란히 정리돼 있었다. 피부색이 짙은 걸로 봐서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 온 용병으로 짐작됐다. 승용차 안에는 불타고 뼈만 남은 시신도 방치돼 있었다.



 시민군은 카다피의 시신을 시르테에서 차로 약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미스라타의 정육점 냉장창고에 넣어 두고 일반 시민에게 공개했다. 허름한 담요에 싸인 카다피의 시신이 사살된 4남 무타심의 시신과 함께 창고 바닥에 놓여 있었다. 악취가 심하자 시민군은 마스크까지 나눠 줬다. 수백 명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렸다.



 이슬람권에서는 사망 24시간 내에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것을 망자에 대한 모독으로 여긴다. 8세짜리 아들까지 데리고 현장에 온 시민 하산(40)은 “수만 명의 국민을 죽인 카다피는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며 “길에 매달아 놓고 국민이 돌을 던져 죽였어야 했는데 고통 없이 보내 안타깝다”고 말했다.



 만나본 리비아 사람 대부분은 카다피가 시민군 병사가 의도적으로 가한 총격에 숨졌다고 믿고 있었다. 시민들은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는 별 관심이 없었다. 시민들은 “그가 일찍 죽은 게 리비아 재건에 도움이 된다” “나라도 그 자리에서 죽였을 것이다” 등의 말을 했다. 미스라타에서 만난 대학생 출신 시민군 무함마드 알자디드(22)는 기자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북한에서는 왜 김정일을 축출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나지 않느냐. 우리를 보내 주면 곧바로 해결된다”고 말했다. ‘독재 종결자’로서의 자부심에 가득 찬 말이었다. “카다피가 자신이 대머리라는 사실을 숨기려 끝까지 투항하지 않은 것”이라는 우스개도 있다.



 ◆비참한 최후의 나날=카다피는 죽기 직전 시르테의 빈집들을 전전하며 경호원들이 약탈한 쌀과 파스타로 연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카다피 최후의 순간 그와 함께 있다 생포된 인민수비대 사령관 만수르 다오 이브라힘은 22일(현지시간) 리비아 해안도시 미스라타의 시민군 정보본부에서 뉴욕 타임스(NYT)와 인터뷰를 하며 이같이 밝혔다.



 그에 따르면 카다피는 8월 21일 10여 명의 경호원과 함께 고향인 시르테로 도주 했다.



궁지에 몰린 카다피는 인근의 생가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20일 오전 3시를 출발시간으로 정했다. 혼란으로 이동이 지연되면서 차량 40대로 구성된 카다피 일행은 해가 훤히 뜬 오전 8시에야 출발했다. 카다피 일행은 출발 30분 만에 나토군 전폭기와 시민군의 공격을 받았다.



시르테·미스라타=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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