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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년 명성’ 이명래 고약집, 호프집으로

서울 충정로에서 50년 넘게 운영돼 온 ‘이명래 고약집’(왼쪽)이 지난 6월부터 호프집(오른쪽)으로 바뀌어 있다. [여행작가 홍광범씨 제공]


서울 지하철 충정로역 9번 출구 옆 골목.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붉은 벽돌 담장을 두른 건물에 호프집 간판이 반짝인다. 흐릿한 유리에 금속 테두리가 쳐진 출입문이 영락없는 옛날 건물 모양새다. 호프집 안에 들어서자 한약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곳곳에 보이는 나무 문틀이 이곳이 옛 한약방 자리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종기치료제로 유명한 국산 신약
충정로 한의원 6월 간판 내려
명맥 잇던 둘째 사위 숨져
손자 “조만간 옛 모습 살릴 것”



 “이 자리가 간판만 걸린 채로 비어 있던 게 15년은 됐을걸요. 그런데도 손님들은 아직도 고약 냄새가 난대요.”



 호프집 주인 장경찬(31)씨는 이곳이 옛 ‘이명래(李明來) 고약집’으로 유명한 명래한의원 자리였다는 것을 알려 줬다. 이명래 고약은 1980년대까지 종기 치료제로 널리 쓰인 대표적인 고약 상표다. 지금 40대 이상이라면 어릴 적 이명래 고약을 성냥불에 녹여 종기 부위에 붙여 본 기억을 갖고 있을 정도다. 기름종이에 싼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검은색 고약을 손수 만들던 이명래 고약집. 이곳이 지난 6월 호프집이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이명래 고약
 이명래(1890~1952년) 선생이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비법을 전수받아 고약을 개발한 것은 1906년이다.



이후 지금 종근당 건물이 서 있는 중림동 터에 1920년 명래한의원을 차려 고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고약은 인기를 끌었고 활명수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특효 신약’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전쟁 때 명래한의원은 폭격을 맞았다. 이 사고로 이명래 선생의 둘째 딸이 숨졌다. 이후 둘째 딸의 남편 이광진(1996년 타계)씨가 재혼한 뒤 명래한의원 간판을 걸고 고약을 계속 만든 곳이 지금의 호프집 자리다. 막내 딸 이용재(2009년 타계) 여사는 1956년 명래제약을 세워 대량생산에 나섰다. 이후 벌어진 정통성 논란은 명래한의원이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만 고약을 처방하기로 하면서 끝났다. 하지만 2002년 명래제약이 도산하면서 시중 약국에서 이명래 고약이 모습을 감췄다. 2009년 다른 제약사가 판권을 인수해 고약을 만들고 있지만 밴드 형식으로 개량된 상품이고 이마저도 흔치 않다. 이용재 여사의 아들 유종(55) 포항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는 “할아버지께서 만든 뜻깊은 약인 만큼 조만간 옛 모습을 살려 그 명맥을 잇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선욱 기자



◆고약(膏藥)=상처·염증 등을 치료하기 위해 피부에 붙이는 접착성 한약제. 1980년대까지 널리 이용됐지만 양약 연고류와 항생제가 보급되면서 시장에서 밀려났다. 현재 한의학계 일부에선 비염·축농증 치료용으로 고약을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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