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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삶과 경영 ⑬ “불평할 시간에 목숨 걸고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손정의(왼쪽) 소프트뱅크 회장이 2005년 초 소프트뱅크 호크스 왕정치 당시 감독(오른쪽), 소속 선수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손 회장은 왕 감독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켜 구단 운영의 전권을 맡겼다. [소프트뱅크 제공]


경쟁의 힘은 놀라웠다. 2003년 드디어 일본의 초고속인터넷 요금이 한국보다 싸졌다. ‘작지만 매운 고추’ 소프트뱅크와 일본 최대 통신업체 NTT가 치열하게 겨룬 결과다. 물론 고비도 있었다. 2004년 2월 가입자 정보 425만 건이 유출됐다. 나는 단호히 대응했다. 범인의 협박전화를 받자마자 경찰에 알렸다. 용의자 체포 뒤 피해 규모를 파악하곤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막 본궤도에 오른 참이었다. 임원들은 내가 전면에 나서는 걸 말렸다. 이를 뿌리치고 카메라 앞에 섰다. “보안 시스템이 허술했다. 고객정보 취급 부서가 비정규직 위주로 짜여 있었다”고 곧이곧대로 알렸다. 비난이 쏟아졌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대신 누구도 토 달기 힘든 과감한 대책들을 잇따라 내놨다. 그중엔 고객정보 담당 정규직 3000명 채용 계획도 있었다. 그대로 시행했음은 물론이다.

소프트뱅크를 알려라 … 100억엔 들여 프로야구단 인수 결단



손정의 회장이 본지 연재를 기념해 써보내 온 좌우명 ‘뜻을 높게(志高く·고코로자시타카쿠)!’
소프트뱅크의 도전으로 일본에 초고속인터넷 세상이 열린 뒤 나는 직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세상이 문제네, 정치가가 잘못이네, 경기가 나쁘네, 그런 푸념 따위 해본들 소용 없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불평은 결국 본인의 그릇을 작게 만드는 거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목숨 던질 각오로 덤벼라. 그래야 파문이 일어난다.”



왕정치 … 소년 시절 우상을 만나다



2004년 12월 나는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깜짝 놀랄 만한 뉴스를 발표했다. 다이에 호크스 구단을 인수키로 한 것이다. 호크스 구단의 근거지는 후쿠오카. 내가 태어나고 또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이다. 거기서 보낸 어린 시절 나는 정말 야구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내겐 하늘 같은 우상이 있었으니 바로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 선수였다. 마침 매물로 나왔을 당시 다이에 호크스 감독은 왕정치였다. 그와 함께 팀워크를 맞춰볼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총 100억 엔에 이르는 딜에 뛰어들 순 없는 일이었다. 사업적 필요도 분명했다.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하기 전까지 소프트뱅크는 일반에 널리 알려진 회사가 아니었다. 야후재팬이 일본 사이버 스페이스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유명한 건 ‘야후’이지 ‘소프트뱅크’가 아니었다. 초고속인터넷 브랜드를 소프트뱅크BB가 아닌 야후BB로 지은 연유다. 소프트뱅크가 대중과 보다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또한 일본프로야구협회의 새 구단주 영입 심사는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다. 3개월간 기업의 재무상태는 물론 오너의 도덕성, 주요 납품처가 어디인지까지 따진다. 그런 만큼 일본에서 프로야구 구단주가 된다는 건 그만큼 깨끗하고 믿을 만한 기업이란 뜻이다.



“드라마 ‘겨울연가’처럼 운영하겠다”





2004년 11월 30일 구단 인수를 공식 발표하며 나는 드라마 ‘겨울연가’ 얘기를 꺼냈다. 당시 일본에선 한창 한류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 중심에 겨울연가와 ‘욘사마(연기자 배용준)’가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시절의 왕정치.
 “겨울연가 제작진은 하루 2~4시간밖에 못 자는 강행군 속에서도 인터넷에 올라오는 팬들의 의견을 매회 반영해 스토리를 다듬었다고 합니다. 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하겠습니다.”



 인터넷 시대에 발맞춰 구단과 팬 사이에도 양방향 의견 교환이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것이다. 그 바탕엔 ‘야구 팬도 고객’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구단주 회의 내용을 언론에 투명하게 알리겠다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다음 날 ‘스포츠닛폰’ 신문은 이런 논평을 내놨다. ‘욘사마는 수일 전 폭풍처럼 일본에 왔다 곧 돌아갔지만 손사마(손정의)의 개혁은 일본 야구계에 새 바람을 일으킬 게 틀림없다”고.



 인수 한 달 뒤 나는 주주총회를 열고 구단 이름을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바꿨다. 이어 왕정치 감독을 부사장 겸 제너럴 매니저로 승격시켰다. 현역 프로야구 감독으론 일본에서 두 번째로 임원이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오 간도쿠(왕 감독), 뭐든 당신이 다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구단 운영의 전권을 넘긴 것이다. 2006년 왕 감독이 위암 투병을 시작했을 때도 나는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냈다. 소프트뱅크 직원들도 자발적으로 나서 쾌유를 비는 종이학을 접어 전달했다. 위의 90%를 잘라내고도 그는 초인처럼 다시 일어섰다. 2008년 퇴임할 때까지 팀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대만 국적으로 온갖 차별과 역경을 딛고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신이 된 왕정치. 내가 그에게 품은 마음은 단지 존경심이 아닌 어떤 동류의식일지 모른다. 왕 감독의 피와 땀이 스민 호크스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일본 퍼시픽리그에서 우승했다. 후쿠오카인의 구단 사랑 또한 대단하다. 500만 주민 중 절반이 소프트뱅크 모바일 가입자일 정도다. 소프트뱅크 모바일은 2006년 설립한 이동통신기업이다. 이제 일본 역사상 최대 빅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꼴찌’ 이통사, 일본 역사상 최대액 인수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인수하던 해 나는 마흔일곱 살이었다. 곧 해가 바뀌었고 50대가 2년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또 한 번의 결전을 준비했다. 일본 ‘꼴찌’ 이동통신사인 보다폰재팬을 인수하기로 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이동성이다.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동통신은 피할 수 없는 승부처였다.



 2005년 말 초고속인터넷 가입자가 500만 명을 넘어서자 나는 본격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이번에도 단번에 전 재산을 던져야 할까 숙고했다. 답은 “그렇다”였다. 당시 소프트뱅크 시가총액은 2조 엔으로 회복돼 있었다. 야후BB 시작 때 2000만 엔까지 떨어졌던 것이 5년여 만에 열 배로 불어난 것이다. 그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했다. 11개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2006년 3월 인수를 마무리 지었다. 가격은 1조7500억 엔. 당시까지 일본 역사상 최고액의 인수합병 프로젝트였다. 여기저기서 “손정의가 이번엔 정말 미쳤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렇든 말든 나는 직접 새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기로 했다. 다시 백척간두의 사투가 시작됐다.



정리=이나리 기자



◆왕정치(王貞治) =일본 이름 ‘오 사다하루’, 중국 이름 ‘왕전즈’. 대만 국적을 가진 일본 최고의 홈런왕이다. 1940년 중국계 부친과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이란성 쌍둥이 중 동생으로 태어났다. 쌍둥이 누나는 출생 1년3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도 몸이 약해 세 살 때까진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학교 입학 뒤 야구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몸담았던 와세다실업고를 고시엔(선발 고교 야구) 정상에 올려놓았다. 최고 몸값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처음 3년간은 성적이 나빠 ‘왕은 왕인데 3진왕’이란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초인적 노력으로 슬럼프를 극복, 통산 홈런 868개라는 대기록을 세운다. 이로 인해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의 첫 수상자가 된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 요미우리 구단에 이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감독으로서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소프트뱅크가 호크스를 인수한 뒤엔 손정의 회장의 절대적 신임하에 구단 전체의 경영까지 책임진다. 2006년 위암 발병으로 2008년 결국 현역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여전히 소프트뱅크 호크스 이사회 회장이자 일본 야구의 ‘살아있는 전설’로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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