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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반금융 철학

우리 선조들은 화폐 대신 포(布:베)를 선호했다. 동전도 불신했으니 지폐는 말할 것도 없다. 저화(楮貨)가 지폐인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양왕 3년(1391)조에는 도평의사사에서 저화를 만들어 오종포(五綜布)와 함께 통용하자고 주청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고 전한다. 오종포란 오승(五升:1승은 80올)으로 짠 마포(麻布)로 오승포(五升布)라고도 한다.

 저화 유통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임금은 태종이다. 태종은 재위 1년(1401) 4월 하륜(河崙)의 건의에 따라 사섬서(司贍署)를 만들어 저화를 생산하게 했다. 대사헌 유관(柳觀) 등은 저화 대신 포를 규격화해 관청의 도장을 찍은 ‘조선포화(朝鮮布貨)’를 유통시키자고 맞섰다. 이처럼 돈 역할을 하는 포가 전포(錢布)다. 태종은 재위 2년(1402) 1월 관리들의 녹봉(祿俸)에 저화를 섞어 주도록 하고 백성이 국고(國庫) 소유의 쌀을 사려면 저화를 사용하게 했다. 이때 저화 한 장은 오승포 한 필로 쌀 두 말[斗]에 해당했지만 같은 해 9월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에서 “저화 한 장으로 쌀 한 말을 사려고 해도 살 수 없다”고 상소한 것처럼 저화의 명목가치는 실질가치의 반에 불과했다. “온 나라(一國)의 인민(人民)이 수군대면서[??] 믿지 않고 저화를 무용지물로 본다”는 양사(兩司)의 상소처럼 시장의 반발이 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태종 1년(1401) 10월 사헌부 장령(掌令) 박고(朴?)가 “백성이 중하게 여기는 것은 쌀과 포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마구 찍어낼 수 있는 지폐와 땀 흘린 노동의 산물을 같은 가치로 볼 수 없다는 노동 중시의 철학이 개재돼 있었다. 성호 이익(李瀷)이 ‘전초와 회자(錢?會子)’에서 “백록피(白鹿皮:흰 사슴 가죽)를 화폐라고 하는 것도 불가한데, 어찌 천한 것(돈)과 귀한 것(물건)을 바꾸겠느냐”고 말했다. 이익은 “나라의 재정 운용[用材]은 마땅히 빈천(貧賤)한 자를 따라야 한다”면서 “(화폐는) 다만 모리(牟利)하는 자에게 첩로(捷路:지름길)를 만들어줄 뿐”이라고 비판했다. 화폐에 대한 선조들의 이런 철학은 배금주의(拜金主義)의 노예가 된 후손들을 경건하게 만든다.

 교환수단에 불과한 화폐가 마치 가치를 생산하는 것처럼 파생상품 같은 것을 만들었다가 금융위기를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는 금융자본주의에 선조들의 노동 중시 철학은 소중한 교훈을 준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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