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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고 지도자 해부] 총리說, 전인대상무위원장說 나오는 5세대 넘버2 리커창(李克强)





중국의 대대적인 권력 이동이 1년 앞으로 다가왔다. 시진핑(習近平), 리커창(李克强)의 권력 분할이 초미의 관심사다. 특히 넘버2로 자리매김한 리커창의 역할에 대해서는 총리와 전인대상무위원장 두 가지 설이 엇갈리고 있다. 리커창 부총리가 26일 1박 2일 일정으로 방한한다. 그의 방한을 앞두고 상무부총리 취임 이전을 중심으로 그의 인생 역정을 살펴봤다.



◇하방(下放), 안후이(安徽)성 다이먀오대대(大廟大隊) 당지부서기로

1955년 리커창은 안후이(安徽)성 딩위안(定遠)현에서 태어났다. 부친 리펑산(李奉三)은 펑양(鳳陽)현 현장을 지냈다. 그 뒤로 안후이성의 역사를 편찬하는 지방지(地方誌)판공실의 부주임을 역임한 뒤 퇴임했다.



리커창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한 수재였다. ‘문혁’기간 동안 모든 학교가 정치만을 중시할 뿐 교육은 등한시했다. 1974년 리커창은 19살에 딩위안중학(현립중학교)을 졸업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도시청소년의 취직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식청년은 농촌으로 가서 빈곤 농민의 재교육을 받으라’고 호소했다. 리커창도 이 분위기에 맞춰 안후이성 펑양현 다이먀오(大廟)공사에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펑양현은 명(明, 1368~1644)을 개국한 황제 주원장(朱元璋)의 고향이다. 안후이성의 유명한 빈곤 지역이다. 리커창은 학력도 있고 정치적으로도 당간부였던 부친의 배경 때문에 하방된 다음 해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1976년에는 다이먀오(大廟)공사 둥링(東陵)대대의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농사일과 당무 외에도 리커창은 학문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당시 그 지역으로 하방 당한 지식분자가 다이먀오 대대 부근에 살면서 문학·역사·자연과학 등 각종 장서를 1만여 권을 갖추고 있었다. 리커창은 그 지식분자를 소개받았다. 그의 집에서 책을 읽거나 빌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리커창은 5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공부를 계속해 지식분자로서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1978년 여름 덩샤오핑이 문화·교육 담당 부총리로 임명됐다. 대학 입시가 재개됐다. 리커창은 그 소식을 듣고 그 동안 갈고 닦은 공부를 복습했다. 그 해 베이징대 법학부 입시에 합격했다. 입학 후 쉴 틈도 없이 리커창은 당원 간부로 실적을 쌓을 수 있는 베이징대학 당위원회로부터 학생회간부 양성 대상에 뽑혔다. 당시 동창생이었던 장밍안(姜明安, 저명한 헌법·행정법 학자, 현재 베이징대학법학원교수)에 따르면 베이징대학 재학 당시 리커창은 노력하는 스타일의 학생으로 사상은 활발하고, 조직능력이 우수하고, 사회활동능력이 뛰어나 학생회 주석을 도맡았다. 그리고 리커창은 1982년 여름 졸업 후에도 학교에 남아 대학의 공청단 서기를 맡았다.



◇하버드 유학 기회를 버리고 공청단간부의 길을 선택하다

리커창과 함께 베이징대학 공청단 위원회에서 활동한 쉬샤오핑(徐小平)은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졸업생 중 많은 수가 해외 유학을 희망했다. 하지만 일부는 ‘국내에서의 활동과 발전에 기회가 있다고 여기고, 장래 국가의 부름에 응하겠다’고 생각하는 학생도 있었다. 리커창을 포함한 공청단위원회의 일부 학생들은 사회에 장래 공헌할 기회를 유학으로 버릴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현재 학생들의 사고방식과 달랐다. 졸업생은 ‘장관이 될 것인가 아니면 교수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당시 최고 명문 학부 주류 학생의 사고방식이었다. 졸업 후 선택은 정치가, 아니면 교육가였다.”



리커창은 당시 정치의 길을 택했다. 해외유학과 다른 길에 선 것이다. 1983년 리커창은 영어 토플시험에서 630점을 받았다. 그 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 법학과에 유학 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무렵 중국공산당 조직부 부부장으로 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왕자오화(王照華)가 리커창과 면담했다. 면담 후 리커창에게 공청단 중앙 학교공작부 부부장에 임명할 것임을 암시했다. 리커창은 이 말에 하버드 유학 기회를 버리고 정계 입문을 결정했다.



그 무렵 후야오방(胡耀邦)과 후치리(胡啓立)는 공청단 계통 후계자 양성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당시 공청단 중앙 제1서기였던 왕자오궈(王兆國)는 덩샤오핑의 눈에 들었고, 후진타오(胡錦濤) 상무서기도 공산당 원로 쑹핑(宋平)의 추천을 받아 후야오방이 직접 면접한 후 발탁한 인물이었다.



1984년 5월 왕자오궈는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영전했다. 왕자오궈는 공청단 제1서기를 그때까지 겸임했지만 실제로는 후진타오가 일상활동을 처리하고 있었다.



1984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2차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경제체제 개혁에 대한 결정’을 채택했다. 공청단 활동도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경제활동으로 중점을 옮겼다. 리커창은 전반적인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베이징대학 경제학부 연구생과정에 공청단 활동을 병행하면서 입학했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리이닝(?以寧)에게 사사받았다. 경제구조의 전환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그 뒤 수 년에 걸쳐 그는 경제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땄다. 그 학력은 이후 정치 역정의 튼튼한 자원이 됐다.



1984년 11월 후진타오는 공청단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공청단 중앙 제1서기로 선출됐다. 공청단 중앙의 지도기구도 조정됐다. 그때까지 학교를 주관하던 학교부장 천하오쑤(陳昊蘇, 천이陳毅의 큰아들)가 베이징시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부는 리커창이 부장을 대행했다. 동시에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승진했다.



1985년 11월 쑹더푸(宋德福,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조직부 부부장을 거쳐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인사부부장, 중앙기구편성위원회 위원, 중앙조직부부부장, 푸젠성 당서기 역임)가 공청단 제1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선출됐다. 리커창도 회의에서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됐지만 업무였던 학교공작 주관은 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국학생연합회비서장을 겸임하게 됐다.

1986년 7월 리커창은 전국청년연합회부주석을 겸임한다.



1991년 5월 리커창이 중국사회과학원이 출판하는 격월간 제3기 『중국사회과학』에 발표한 ‘우리나라 경제의 삼원(三元)구조를 논함’은 쑨예팡(孫冶方)경제과학상 논문상을 받았다. 경제학분야에서 그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실례다. 그 밖에도 그는 항상 향촌의 경제발전, 빈곤부조 등 방면의 논문을 때때로 신문 지상에 발표했다.



리커창은 온화한 성품과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며, 인적관계도 매우 좋았다. 그는 상금과 원고료를 받으면 항상 동료들에게 대접하고, 동지의 생일도 모두 기억해 축하 선물을 보냇다. 그는 현재 환경보호국 부국장인 판웨(潘岳)와 공청단 중앙에 있던 때부터 친교가 있었다. 지금도 많은 문제들을 함께 상의한다. 이처럼 리커창을 쑹더푸도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다.



1991년 8월 리커창은 중국소년선봉대전국공작위원회 주임을 겸임한다.



1993년 5월 리커창은 쑹더푸를 대신해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선출된다. 그 때 나이 38살. 중국공산당 역사상 가장 어린 성·부급(장관급) 간부가 됐다. 이로 인해 1997년 9월 제15차 중앙위원에도 선출된다.



리커창이 공청단 중앙에서 활동하던 5년 동안은 주로 공청단 향촌지원대 복무활동을 추진하고, 향촌의 빈곤부조와 산촌의 의무교육을 개척하고, 게다가 후진타오의 공청단파 후계자 발탁의 구상에 협력한 저우창(周强), 후춘화(胡春華), 류펑(劉鵬) 등 공청단파 신 간부를 육성했다.



◇중국에서 가장 어린 성장이 되어 허난(河南)성에서 실적을 쌓다

1998년 6월 리커창은 43살 나이로 중앙에서 허난성 부서기 겸 성장대리로 업무 코스를 바꿨다. 언론매체들은 ‘중국의 내일의 별’ 중국에서 가장 어린 성장, 최초의 박사학위를 가진 성장 등등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허난성은 인구와 농업 대성이다. 리커창이 취임할 당시 전성인구는 9300만 명으로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1인당 GDP가는 4976위안으로 전국 순위 21위였다.



리커창은 취임 후 조사·연구를 거쳐 업무 조정 및 교육수준, 경제발전의 순서에 따라 다섯 항목의 추진 방안을 제정했다.



1. 제품구조를 조정하여 제품의 부가가치와 과학기술의 함유량을 높인다.

2. 산업구조를 조정하여 공업화 템포를 적극적으로 올려 제2차산업과 3차산업의 비중을 높인다.

3. 도시와 농촌의 구조를 조정하여 도시화 템포를 적극적으로 빠르게 한다.

4. 소유제 구조를 조정하여 점차 공유제 실현형식을 탐색한다.

5. 인재양성구조를 조정해 기초교육을 강화하고, 고등중학과 대학 교육을 크게 발전시켜 허난성 고등교육 수준을 제고한다.

그 다음으로 구체적 조치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 허난을 우량 전용소맥의 생산, 가공기지, 축산품의 생산, 가공기지로 만든다.

2. 식품공업, 알루미늄 공업을 주로 하는 비철금속공업, 석유화공공업, 기계공업, 경방직공업 5대 지주산업을 대대적으로 육성, 개조, 향상시킨다. 이와 동시에 후발로 유리한 정보화를 통해 공업화를 촉진하고 하이테크 산업 발전을 빠르고 새로운 경제성장점으로 삼는다.

3. 쑹산(嵩山) 소림사 등을 주로 하는 우량 관광업 발전을 촉진한다.

4. 농업 수리 건설을 강화하여 홍수, 관개, 가뭄 대응능력을 키운다.

5. 각성, 직할시와 잇는 3종, 3횡 고속도로망을 건설한다.

6. 약간의 대규모 탄광직결발전소를 건설한다.

7. 정저우(鄭州)를 중원의 중심도시로 하는 도시화 건설을 추진한다.

8. 허난의 대학생을 5년 이내에 두 배로 늘인다.

허난성 지방간부의 회상에 따르면 리커창은 취임 당시부터 신중하게 새롭게 허난에 취임한 간부가 실적이 우수하면 4년간 인사이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허난성의 정치, 경제, 사회 전분야에 걸쳐 행정 경험이 풍부한 인력풀의 축적을 이룰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리커창도 다음 정치 행보를 시작할 수 있었다.



2004년 10월 리커창은 신화사기자의 독점방문을 받고 ‘중원굴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무렵 ‘중원굴기’는 국가전략 차원으로 격상됐다. 동부선행, 서부대개발 사이에 위치한 허난성에서 리커창이 제창한 슬로건은 ‘동부로부터 도입해, 서부로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즉, 동부지구와의 협력을 강조하고 동부의 인재와 자금·기술·브랜드 등의 장점을 이용해 허난 시장을 개발하고, 자원과 노동력, 지역적 장점으로 허난의 우위산업과 각종 경제요소로 서부개발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허난의 발전공간을 개척하겠다는 논리였다.



또 하나의 움직임으로 ‘공업화, 도시화, 농촌현대화’를 강조했다. ‘중원도시 그룹의 경제굴기 벨트’를 추진했다. 허난성의 더딘 현상황을 바꾸려는 노력이다.



그밖에 허난성에서 주목 받은 또 하나의 움직임은 대량의 고급인재를 유치해 2004년 2월에는 380여 명의 박사와 1820여 명의 석사를 초빙해 ‘박사 정치참가’ 현상이 한 때 흥성하기도했다.



2004년말 리커창이 허난을 떠날 무렵 허난성의 1인당 GDP는 1998년의 4976위안에서 2003년 7590위안으로 늘었다.

그리고 허난성 농민의 1인당 현금 수입은 평균 20%가까이 늘어 도시주민 수입 증가율을 상회했다. 리커창이 허난에 있을 무렵 장쩌민, 리펑, 주룽지, 웨이젠싱, 리란칭, 원자바오, 우방궈, 쩡칭훙, 뤄간 등 정치국상무위원회 멤버가 허난성을 시찰 혹은 조사연구로 방문해 리커창 활동을 평가했다.



하지만, 밖에서 허난의 리커창 활동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리커창의 전임자인 리창춘이 허난성을 주재했던 시기에 발생한 에이즈 문제에 대해 리커창이 충분한 대책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 간행물에서 리커창이 주마뎬(駐馬點)을 세번 방문해 에이즈 환자를 문병했다고 전하지만, 허난성에는 지금도 에이즈가 만연하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동북진흥’을 추진해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에 진입하다

2004년 12월 원자바오가 지명하고 중국공산당 고위층의 동의를 거쳐 리커창은 랴오닝(遼寧)성 당서기에 임명된다. 그는 국무원이 제출한 ‘동북진흥’ 추진이란 중책을 맡게 됐다.



랴오닝은 동북지구의 경제 대성이다. 보하이(渤海)경제권과 동북아시아경제권의 중요 구성지역이다. 하지만 랴오닝성에는 중국 국유기업 1/10이 집중해있다. 시장경제의 높은 파고 속에서 결손기업이 해마다 증가하고 해고노동자가 급증해 인심이 흉흉해지고, 대중적인 쟁의 사건과 상소사건이 증가하고 있었다. 농업대성에서 공업대성으로의 변화한 랴오닝성에 대해 중앙이 허난성 경제구조를 조정하고 모델 체인지에 성공한 리커창의 경험을 높이 산 것이다. 동시에 그를 발탁한 것은 의식적으로 리커창의 집정능력을 높이고 국정에 대한 전면적인 이해를 높이고자 한 것이었다.



랴오닝성에서 리커창이 처음 착수한 것은 각지의 조사연구였다. 그는 혼자 열차를 타고 비서도 없이 전 성을 다녔다. 조사연구를 나간 첫 지역은 자원 고갈형 도시인 푸신(阜新)시였다. 그 곳에서 그는 두 가지를 실행했다. 하나는 푸신시의 실업보험금의 부족금 500만 위안의 문제를 국가개발은행 사이에 다리를 놓아 해결하고, 두 번째로 푸신광업집단의 투자문제에 대해 내몽고와 연대를 통해 해결했다. 리커창은 4개월의 조사연구를 거쳐 다음과 같은 랴오닝 경제진흥 구상을 2005년 5월에 발표한 뒤 곧 전 성에 실시했다.



첫째, 국유기업개혁을 주로 하는 신체제를 수립했다. 현재까지 70% 이상의 국유대형기업이 점차 형식적으로 주식제 개조를 실현하고, 중소국유기업은 100%가까이 주식제 개혁을 실현했다. 각 대기업은 개조 후에 국내외 대기업과의 합자 혹은 주식참가를 추진해 랴오닝성 안팎 및 국내외 시장을 이용 혹은 정리 하여 자금·기술자·원재료 등 생산요소의 체제적 장애를 넘어 신흥 산업으로 함께 발전하는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둘째, 전통적 산업의 경쟁력을 기초로 하는 산업전략을 조정하여 제품과 시장의 전면적 결합을 실행했다.



셋째, 연해지역 자원의 발견, 발굴에 중점을 둔 새로운 종합자원개발로 랴오닝이 국내외 ‘두 개의 자원, 두 개의 시장’을 이용하는 통로를 타개했다.



넷째, 민심을 안정시키는 ‘1호 민심 프로젝트’를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한 가정에 한 명은 반드시 취업할 수 있도록 ‘제로 취업가정’을 없애고, 동시에 백만 명이 집중 거주하는 판자촌 주택지역의 해소에 노력했다. 실용적인 민간주택구역을 건설했다.



이러한 개혁에 따라 2006년에는 랴오닝 지구 생산총액이 1994년 이래 가장 높은 수치인 13.8% 성장을 기록했다. 또 하나의 경제 지표는 2006년 랴오닝 설비제조업의 부흥이다. 전성 설비제조업 완성 성장액이 처음으로 석유화학공업과 야금공업을 넘어서 랴오닝성 최고 산업이 됐다.

2007년 우방궈와 원자바오, 후진타오 등이 앞 뒤로 랴오닝성 시찰을 내려와 리커창의 활동을 평가했다.



당시 선양철도국 간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커창은 두 개의 데이터, 즉 ‘전성 철도화물수송증대율과 전성 전력소비증대율’을 특히 중시했다. 그것은 첫째 그 데이터가 가장 착오가 있을 가능성이 적고 신뢰할 수 있는 수치이며, 둘째, 그 수치들이 랴오닝성 공업경제의 발전상황, 특히 제1차, 2차, 3차 산업의 발전 변화와 구조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리커창의 실무적이고 독특한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제17차 당대회에서 리커창은 52세의 젊은 나이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최연소 위원에 선출됐다.



2007년 10월29일 리위안차오 중앙조직부 부장이 중앙을 대표해 중국 공산당 랴오닝성 위원회를 방문해 ‘리커창이 동 위원회 서기를 담당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고 특히 중앙을 대표해 랴오닝성에서의 리커창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리커창 동지가 허난성에서 랴오닝 성으로 전임해 3년에 걸쳐 일하던 시기는 랴오닝성이 낙후한 공업기지에서 전면적으로 부흥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리커창 동지는 전력을 다해 개혁을 추진해 랴오닝의 광범한 간부 대중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리위안차오 부장은 특히 랴오닝이 최근 진행한 ‘판자 주택지의 대규모 개조, 제로취업가정 원조, 민생문제 해결 노력, 현성 경제 발전, 도시와 농촌의 공동발전 등의 성과’를 칭찬했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다- 任重道遠

제17차 당대회 후 리커창은 국무원 당조부서기, 중앙재경영도소조 부조장을 겸임했다. 특히 중앙 주요 부위를 시찰, 조사연구하고 2007년 말에 개최된 중앙경제공작회의 준비에 참가했다.



2008년 3월 리커창은 제11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상무부총리로 선출됐다. 리커창은 중국경제가 큰 전환기를 맞은 중요한 시기에 새로운 직무를 맡아 다음 두 개의 시련에 직면했다.



첫째, 어떻게 원자바오와 협력해 중국경제 발전을 지키고, 동시에 인플레이션과 런민비 환율, 주식 버블을 교묘하게 처리할 것인가, 또 매크로 경제 조정을 적절하게 실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둘째, 도맡은 정부의 행정체제개혁을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국무원에 소속된 29개 부 위원회를 정리하여 각 기구의 중복된 부분의 정리에 착수해 감독과 관리의 효율을 높여, 에너지·교통운수·금융·건설 등의 분야에서 몇 개의 ‘슈퍼 部·委’를 설립한다. 또 장래 자원개혁을 위해 에너지 가격과 안전, 금융안전 등에 대한 장기전략을 제정하는 것이다.



2008년 이후 리커창의 업적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평가가 드물다. 실적이 미비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12차 5개년 규획 기간은 중국 경제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시기다. 리커창이 총리로 나라 살림을 도맡을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맡고 왕치산에게 총리직을 넘길지는 아직 1년을 더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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