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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확정 뒤 소련선 “매국노”… 추방 피하려 수상 거절

2011년도 노벨상 수상자 명단이 모두 발표됐다. 그런데 매년 속이 쓰리다. 과학과 경제·문학 분야에서 한국인 수상자는 아직 소식이 없다. 이웃 일본은 모두 19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물리 8명, 화학 7명, 문학 2명, 의학과 평화가 1명씩이다.

노벨상 하면 단연 유대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의학과 물리학에서 각각 2명, 그리고 화학에서 1명 등 모두 5명의 수상자를 냈다. 크게 잡아 1600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매년 노벨상을 받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다. 1901년 시작된 110년 노벨상 역사에서 단체와 기관을 제외한 개인 수상자 중 유대인은 무려 188명에 이른다. 전체의 23 %다. 여기에다 자신이 유대인임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은 인물 몇 명을 추가하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13억 인구의 중국도 대만과 홍콩을 합쳐 17명을 배출했을 뿐이다. 16억 명의 이슬람 인구 중 수상자는 올해 예멘 여성 저항운동가를 포함해 9명이다. 유대인들에게 노벨상은 일상적이고 흔한 연례 행사다.

1600만 유대인, 노벨상 188명 배출
1910년 독일 문인 파울 폰 하이제를 시작으로 2005년 영국인 극작가 해럴드 핀터에 이르기까지 유대인은 14명의 문학상 수상자를 냈다. 58년엔 러시아(당시 소련) 유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의사 지바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에 선정됐다. 그는 제정 러시아 말기인 1890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아버지는 후기 인상파 화풍의 유명 화가이며 어머니는 피아니스트다. 그의 가계는 동유럽 유대인 박해(일명:포그롬) 때 러시아 정교로 개종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파스테르나크는 평생 특정 종교에 매이지 않고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

부모의 영향으로 그는 어린 시절 문화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의 집엔 항상 당대 유명 문화·예술계 인사의 출입이 잦았다.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체코 태생의 서정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리고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 등이다. 소년 파스테르나크는 음악을 특히 좋아했다.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이웃집에 살던 피아니스트며 작곡가인 알렉산드르 스크랴빈과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음악가가 되려고 모스크바 음악 학교에 입학해 이론과 작곡 기법을 몇 년간 배웠다. 그런데 갑자기 철학에 흥미가 생겨 중도에 음악 교육을 그만두었다. 모스크바대를 졸업한 후 1910년 독일 마르부르크대에서 철학을 전공한다. 후기 칸트주의자이며 19세기 석학으로 손꼽히는 유대인 헤르만 코헨 교수로부터 철학을 배웠다.

학자도 적성은 아니라고 판단한 파스테르나크는 1916년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그는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을 만난 후 문인이 될 것을 결심했다. 그해 첫 시집을 냈다. 1917년 두 번째 시집 장벽을 넘어서, 그리고 1922년 누이, 나의 삶을 출간하면서 러시아 문단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의 문학 사상은 상징주의다. 공산혁명 초기의 서슬 퍼런 잣대로 보면 그의 작품은 다분히 부르주아적이고 전위적이었다. 혁명 분위기와는 전반적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930년대 말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 내내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스탈린의 출생국인 그루지야 문학 작품을 번역해 겨우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56년 파스테르나크는 그의 유일한 소설 의사 지바고를 탈고한 후 한 월간지에 게재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그의 글은 잡지에 실리지 못했다. 대신 57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출판사가 이 소설의 저작권을 샀다. 58년엔 영문 번역판이 나왔고 이어 18개국에서 출간됐다. 의사 지바고는 공산 혁명에 따른 가치관의 급격한 전환, 그리고 불확실하고 혼란한 사회 환경 속에서 비극적인 사랑을 품었던 한 지성인의 삶을 그렸다. 그러나 혁명의 폭력성과 잔혹성도 함께 부각돼 있어 당시 소련 당국은 이 책을 불온서적으로 간주했다.

58년 10월 스웨덴 한림원은 파스테르나크를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그러자 소련 작가 동맹이 그를 매국노라고 비난하면서 문단에서 제명하고 국외로 추방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수상자 발표 직후 파스테르나크는 스웨덴 측에 일단 감사의 뜻을 표했지만 며칠 후 수상을 사양하는 내용의 답신을 다시 보냈다. 노벨상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는 흐루쇼프 공산당 제 1 서기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대신 노벨상 수상을 거부해 자신의 안전을 얻는 방안을 선택한 것이다.

사후 문단서 복권되고 박물관 건립
파스테르나크는 모스크바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자신의 다차(별장)에서 심장병과 폐암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내다 60년 세상을 떠났다. 87년 그는 소비에트 문단에서 복권되고 의사 지바고도 뒤늦게 소련에서 출간됐다. 그가 말년을 보낸 다차도 그를 추모하는 박물관으로 복원됐다. 파스테르나크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의 소련 반체제 운동가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노벨상 수상자 선정 기준은 창의성이다. 응용력은 아무리 커다란 성과가 있어도 대상에서 제외된다. 유대인은 어려서부터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키운다. 그리고 교육 단계마다 지식의 기본 개념부터 충실히 이해하면서 창의력과 실용적 응용력을 배양한다. 자연·인문·사회과학, 그리고 문화·예술 분야에서 이들의 창의성은 오래전부터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교육열은 세계 최고지만 주입과 암기, 시험에만 매달리는 우리의 목표 없는 승부형 교육이 언제나 창의력 중심으로 바뀔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장기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남보다 앞서가는 유대인의 창의력이 인구에 비해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을 특히 상기시키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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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