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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컷

빚쟁이. 사전엔 정반대의 뜻이 나란히 실려 있다. 매일 돈 갚으라고 윽박지르는 이도 빚쟁이요, 빚을 많이 지고 야반도주할까 걱정되는 이도 빚쟁이다. 채권자든 채무자든 빚쟁이란다. 두 부류의 빚쟁이가 모여 떠들썩한 잔치를 벌이면 그건 빚 잔치다. 사전적 의미로는 ‘부도나 파산 따위로 빚을 갚을 수 없을 때 빚진 사람이 돈을 받을 사람에게 남은 재산을 내놓고 빚을 청산하는 일’이다. 여기서 누가 갑(甲)이고 을(乙)일까. 채권·채무 관계에서 당연히 채권자가 갑일 텐데 그게 꼭 그리 되지 않는 법이다. 멱살 잡힌 채무자가 ‘배 째라’며 드러눕는데야 당할 재간이 없다. 빚쟁이가 채권자도 채무자도 되듯 돌연 갑이 을 되고 을이 갑 되는 것이 빚의 세계다.

빚 잔치의 묘한 역학이라면 요즘 지구촌 어느 나라부터 떠오른다. 나라 곳간이 거덜났는데도 공무원까지 시위하는 그리스 말이다.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을 하던 1998년의 대한민국, 거기에 살았던 국민이라면 고개가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는 빚 잔치에 관한 한 실전경험이 풍부하다. 유럽 역사에 처음 기록된 국가부도의 무대가 바로 기원전 4세기 그리스였다. 13개 그리스 도시국가가 델로스 신전으로부터 돈을 빌리고는 대부분 갚지 않은 것이다. 델로스 신전은 원금의 80%를 손해봤다.

근현대 그리스에서도 대외부채 상환 의무를 최소한 다섯 차례나 지키지 않았다. 그리스가 부도 상태에 있던 기간이 90년이나 된다는 계산이 나와 있다.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독립이 승인된 1832년 이래 절반의 시기가 부도상태였다.

그쯤 되면 채무자가 때론 갑이 될 수 있다는 걸 통달할 만하다. 다시 벼랑 끝에 선 그리스. 그리스 디폴트가 지구촌 경제에 혼돈을 부를 거란 걱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 나라의 뱃심은 더 두둑해지는 것 같다.

속타는 쪽은 외국 채권자다. 처음엔 파르테논 신전과 아름다운 섬들을 팔라고 압박했다. 이것보다 확실한 해법도 없었다. 수십 년치 관람료를 담보 삼아 유동화증권을 발행하거나, 섬 사용권을 파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마지 못해 일부 국유재산을 파는 시늉은 했다. 지친 쪽은 채권자다. 헤어컷(haircut)은 절대 못한다고 버티더니 이젠 앞장서서 그 비율을 숙의하고 있다. 머리카락 자르듯 원금을 깎아주자는 것이다. 그리스가 부도를 선언하면 채권이 휴지조각 될 테니 달리 뾰족한 수도 없다. 검토되는 탕감 비율은 어느새 21%에서 50~60%로 높아졌다. 앞으로 이걸 80%쯤으로 올리고 신규자금까지 대주겠다고 할지 모를 일이다. 사실 지난 200년간 부도난 90여 개 나라도 대충 그런 해법 수순을 밟았다.

외환위기 때를 돌아보면 우리나라는 정말 순진무구했다. 이자를 더 물며 만기연장을 받은 것에 무척 감격했으니…. 남의 돈 떼먹는 헤어컷은 상상도 못했다. 차제에 머리카락 잘라주고 속 아플 해외 금융회사라면 이런 착한 한국을 좀 우대하는 게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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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