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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2011 수퍼맨·배트맨 그 ‘조물주’는 한국인이다


말하자면 그는 ‘만화세계’의 조물주다. 그의 손끝에서 수퍼맨·배트맨·원더우먼 같은 수퍼히어로들이 탄생한다. 그의 그림 한 컷 한 컷을 통해 초인적 힘으로 악을 무찌르고 세계를 구하는 이 시대의 영웅서사가 완성된다. 만화를 통해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또 다른 우주, 또 다른 은하계를 창조해 낸다.

 그의 이름은 짐 리. 마블코믹스와 함께 북미 만화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굴지의 출판사 DC코믹스의 공동 발행인이다. 동시에 지금도 작품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연간 매출 8억 달러가량의 막대한 시장 규모를 유지해 오고 있는 미국 만화 출판계에서 그는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1인’이다.

 그런 짐 리가 최근 큰일을 벌였다. 만화 세상의 천지개벽에 가까운 일대 혁신이다. DC의 모든 시리즈를 처음으로 돌려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다. 이를테면 그간 수십 년을 이어져 오던 수퍼맨·배트맨·그린랜턴 등의 52개 타이틀 시리즈물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1편부터 다시 시작되는 식이다.

LA중앙일보 이경민 기자




‘DC #1 프로젝트’ 혹은 ‘DC 리부트(Reboot) 프로젝트’라 불리는 이번 이벤트로 만화계는 발칵 뒤집혔다. 올 8월 31일 그 첫 탄으로 시작된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 1편은 발행 첫날만 무려 20만 부가 팔려 나가며 그날로 품절됐다. ‘저스티스 리그’는 모든 수퍼히어로가 총출동, 연합해 악의 무리와 싸우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만화로 짐 리가 직접 그림 작업에도 참여해 화제가 됐다. 이어 발간된 타이틀들도 모두 선주문만 10만 부씩을 넘어섰다. DC코믹스는 #1 프로젝트와 더불어 매주 발행되는 새 연재물을 디지털로도 동시 공개하기로 했다. 미국 메이저 만화 출판업체로서는 첫 도전이다. 2011년 만화계의 신천지를 연 짐 리를 버뱅크에 위치한 DC엔터테인먼트 빌딩에서 만났다.

●엄청난 프로젝트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렇죠. 실로 야심 찬 계획입니다.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모든 만화의 베이스 라인이 재정립됐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캐릭터의 의상이 바뀌거나 나이가 젊어진 것은 기본이고 인물들의 관계나 탄생 배경 등에도 변화를 줬습니다. 더 멋지고 매력적인 캐릭터, 더 창조적이고 신선한 스토리 전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거죠.”

●오랜 준비가 필요했을 텐데요.

 “지난해 8월께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10월에 회의를 열어 자세히 논의했습니다. 20여 명의 톱클래스 만화가가 모이는 회의였는데 그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신선하고 업데이트된 느낌, 다이내믹하고 대중적인 캐릭터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며 내용이 구체화됐지요.”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온통 긍정적인 반응뿐이라 저도 놀랐습니다. 처음 계획을 발표했을 때는 ‘미친 짓’이라는 비난이 몰릴까 봐 두려움도 컸는데 말이죠. 처음부터 프로젝트 내용을 자세히 공개하지 않고 조금씩 디테일을 공개한 전략이 적중했던 것 같습니다. 시카고·볼티모어·뉴욕·런던까지 주요 도시를 모두 돌며 미리 로드쇼를 한 것도 효과가 있었습니다.”

●독자층도 넓어졌나요.

 “저희의 주 관심사는 한때 만화 팬이었지만 지금은 관심도가 조금 떨어진 사람들, 혹은 영화나 비디오게임을 통해 우리 캐릭터들과 친숙하긴 하지만 만화책을 사서 보진 않았던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 분들이 돌아오고 있어요. 이야기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면서 접근도도 높아지고 이해하기도 쉬워졌기 때문이죠.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만화시장도 과거에 비해선 많이 위축됐지요.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침체됐어요. 물론 90년대 초에서 중반까지 또 한 번의 부흥기가 있긴 했습니다. 당시엔 인기 만화책은 한 달에 100만 부씩 팔리곤 했죠. 웬만한 신간들은 거의 10만~15만 부씩 팔리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거기에 훨씬 못 미치죠. 하지만 아직도 시장 규모가 연간 7억~9억 달러 정도 됩니다.”


짐 리가 참여한 작품들.
●디지털화가 대안이 될까요.

 “신문이나 다른 인쇄미디어에는 디지털이 확실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광고 수입 의존도가 높은 매체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비즈니스는 좀 다릅니다. 만화책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주 고객은 수집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새로 나온 만화를 한 번 본다고 끝나는 게 아니죠. 만화책을 사고파는 것도 그들에겐 중요한 문화입니다. 마치 주식처럼요. 이 때문에 팬들이 구입해 소장할 수 있는 인쇄된 만화책의 기능을 디지털이 완벽히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집가와 열성 팬들은 결코 디지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리란 게 제 생각입니다. 물론 디지털 채널을 통해 만화 출판 비즈니스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새로운 독자층을 끌어들일 수는 있을 겁니다. 꼭 발간일에 맞춰 책을 사러 나가지 않아도 거실이나 침대 위에서 휴대전화나 태블릿PC로 ‘배트맨’ ‘수퍼맨’을 만나 볼 수 있다는 건 많은 이에게 매력적인 방법일 테니까요.”

●아티스트 입장에선 어떻습니까.

 “또 다른 도전입니다. 만화책에서는 중요한 장면은 더 크게 그리고 덜 중요한 장면은 작게 그릴 수 있는데 디지털은 그럴 수 없어요. 더 강조하고 싶다고 크기를 키울 방법도 없고, 덜 강조하고 싶은 것도 휴대전화나 아이패드에서는 다 똑같은 화면 크기로 나오니 오히려 아티스트가 원하는 바와 정반대가 되는 경우도 생기더군요. 하지만 모든 게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5~10년 뒤에는 크리에이티브 측면이나 테크닉 측면에서 디지털에 적응된 또 다른 작업 방식이 탄생하고 발전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짐 리는 본래 DC코믹스의 라이벌인 마블코믹스 출신이다. 80년대 후반 마블코믹스의 아티스트로 출발해 ‘엑스맨’ 등 화제작을 작업했다. 그가 마블에서 일할 당시 그렸던 ‘엑스맨’ 시리즈의 1편 단행본은 810만 부가 판매되며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만화책으로 기록되고 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다섯 가지 다른 커버 디자인으로 발간된 짐 리의 ‘엑스맨’ 1편 세트는 경매 사이트에서 800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을 만큼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가 DC코믹스의 경영 일선에 합류한 것은 98년이다. 그사이 뜻이 맞는 만화인들과 함께 이미지코믹스, 와일드스톰프로덕션 등을 설립해 만화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본인이 설립한 회사를 매각하고 DC와 손잡은 것은 경영은 물론 아티스트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싶다는 열정 때문이었다. 2010년 2월 DC코믹스는 짐 리를 공동 발행인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여전히 새롭게 시작된 ‘저스티스 리그’ 시리즈를 직접 그리는 아티스트로서도 활약 중이다.

●발행인인 동시에 현역 아티스트이십니다.

 “경영과 작품 활동을 양손에 넣고 저글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둘 다 풀타임 잡이니까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많이 의지하죠. 경영은 공동 발행인인 댄 디디오와 함께할 수 있고, 작품 활동은 크리에이티브 총괄 담당인 제프 존스와 의견을 많이 교환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입니다. 둘 중 한 가지를 안 하면서 나머지 하나를 잘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없을 정도니까요. 낮에는 경영 쪽 일을 많이 하고 밤에 그림을 많이 그리는 편이에요. 남들보다 잠이 적은 편인 데다 손이 빨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DC코믹스 만화의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한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캐릭터들을 여러 개 갖고 있다는 점이죠. 지구 반대편 중국 한복판에서도 수퍼맨이나 배트맨 로고가 그려져 있는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쉽게 만나 볼 수 있어요. 그만큼의 파워를 지닌 캐릭터와 로고를 갖고 있는 만화 출판사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밝고 희망찬 분위기를 가진 캐릭터가 많다는 점도 특징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수퍼히어로 캐릭터가 특히 많습니다.

 “미국 만화시장은 수퍼히어로물이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시아 만화에는 농구나 요리에 관한 스토리도 있고, 유럽에 가면 SF·어드벤처물도 있는데 미국 만화는 거의 수퍼히어로물 일색이죠. 저는 그래서 수퍼히어로 만화를 미국만의 독특한 예술장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미국인들의 심리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현실보다 크고 화려한 판타지를 꿈꾸는 게 아닐까요. 어찌 보면 60~70년대 서부극 장르의 진화 같기도 합니다. 외로운 총잡이가 마을을 구하는 것과 망토를 두른 고독한 전사가 악의 세력에 맞서 세계를 구하는 것. 통하는 부분이 많지 않나요?”

●사람들이 만화를 왜 볼까요.

 “팝컬처의 새로운 방법론이죠. 만화는 대중의 일탈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도 하고, 주인공과 독자를 동일시해 감춰져 있던 파워 판타지를 만족시켜 주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는 경제가 안 좋아질수록 만화책이 더 잘 팔려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갈구한다는 뜻이겠지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만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이 투영돼 있는 예술작품이기도 합니다. 배트맨이 처음 탄생한 것은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깃든 어두움을 처음 발견하던 시기입니다. 도심 범죄에 대한 불안도 최고조에 달했을 때지요. 악역 캐릭터들도 사람들의 심리 저변에 깔린 단면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성격적 결함을 지닌 현대인의 모습도 있고, 무정부주의의 상징도 있고, 복수와 배신의 화신도 있는 것처럼요.”

●어떤 만화가 ‘훌륭한 만화’일까요.

 “누구는 촘촘한 구조로 잘 짜인 이야기가, 다른 누구는 독자들이 동일시할 수 있는 캐릭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걸 딱 잘라 얘기할 수 없다는 게 만화란 장르의 매력인 것 같아요. 보고 재미있으면 그게 훌륭한 만화인 거죠. 지금껏 훌륭한 만화를 그린 작가들은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작업을 했을 겁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만화 팬들이 당신의 그림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배트맨을 잘 그린다, 울버린을 사악하게 표현하는 방법이 좋다, 여자 그리는 스타일이 독특하다, 액션신 묘사가 좋다 등등 좋은 말을 해 주시는 팬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게 꼭 제 그림이 좋아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스토리·대사·효과 등 모든 게 결합돼 만들어지는 시각 체험 같은 것인데, 사람들은 그걸 그냥 ‘그림이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유의하는 부분이라면 포즈나 제스처 같은 것들이에요. 보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챌 수 없지만 분명 캐릭터별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신경을 쓰는 편이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제가 DC에 들어온 것은 평생 아티스트로 살고 싶어서였어요. 독립 프로덕션을 설립해 일을 하다 보니 만화뿐 아니라 거기서 파생된 애니메이션·영화·비디오게임까지 제가 관여해야 할 부분이 많았어요. 물론 재미도, 보람도 있었지만 바꿔 생각하면 바로 그런 것들이 제가 그림과 멀어지게 했던 요소들은 아니었나 싶기도 했지요.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요. DC의 공동 발행인이자 아티스트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시도하면서 살고 싶어요.”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티스트로서 작품 활동을 쉬지 않는 것입니다. DC코믹스의 발행인인 동시에 최전방에서 아티스트로 일한다는 사실은 저에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제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새로운 만화를 발표하고 있기 때문에, 게다가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기 때문에 더 자신 있게 발행인으로서 일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어떻게 스토리 라인이나 디자인, 색깔을 쓰는 방식에 대해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멋대로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먼저 모범을 보이는 것이지요.”

j 칵테일 >> “의대 진학 딱 1년만 미루기로 했는데 …”

지금이야 ‘짐 리’라는 자신의 이름만으로도 레전드가 됐지만, 초창기만 해도 그에겐 ‘프린스턴대 출신’이란 수식어가 항상 붙어 다녔다.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이민 온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미국 최고 명문대 중 하나인 프린스턴대에 진학했다. 그러다 만화의 길로 빠졌다. 그래서 그가 그리는 캐릭터는 ‘해부학적으로 인체 비율이 아름답다’는 평가도 있다.

●만화가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프린스턴대 마지막 학기에 미술 수업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프린스턴대 학생은 음악이나 미술 같은 교양 필수과목들을 마지막 학기로 미뤄 두곤 하지요. 별도의 숙제나 프로젝트 부담이 없어 논문 쓰는 데 집중할 수 있으니까요. 일주일에 6시간 그림만 그리면 되는 수업이었죠. 뉴욕에서 온 강사들이 제게 재능이 있다고 말해 줬어요. 만화가로서의 삶도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재미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졸업하고 나서 의대 진학을 딱 1년만 미루기로 했지요. 그림을 그리려고요. 물론 당시엔 곧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 의대에 진학할 생각이었지요.”

●제일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체력요.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었어요. 매일 10~12시간씩 그림을 그리다 보니 나중엔 의자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손가락과 손목 관절이 마비되기도 하고 척추에 무리가 오기도 했죠. 수시로 뜨거운 물에 손을 담가야 했고 척추 받침대의 도움도 받아야 했습니다. 몸이 힘들다 보니 ‘내가 계속 이러고 살 수 있을까’ 고민도 많이 됐죠. 다행인 건 제가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전 이름을 알렸다는 점이지요. 덕분에 (안티 없이) 팬들의 좋은 피드백만 많이 들을 수 있었어요. 출판사로 편지가 오거나 컨벤션에서 팬이라며 찾아와 인사를 건네는 분들의 반응이 큰 힘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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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