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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스페셜 - 화요칸중궈(看中國)] 청 황제도 사돈 맺은 ‘2500년 공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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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탄생 2562년 … 천하제일 가문의 역사



공자 탄신 2562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달 27일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에서는 공자를 기리는 공연이 펼쳐졌다. 배우들이 논어의 구절을 노래하고 있다. [신화사=연합뉴스]











공자(孔子·BC 551 ~ BC 479)













지난달 28일 중국 저장(浙江)성 취저우(衢州)에선 공자 탄신 2562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공자의 75대 적장손(嫡長孫, 맏손) 쿵샹카이(孔祥楷·73), 덴마크와 짐바브웨 등 세계 10개국에서 온 공자학원 원장 등 500여 명이 참석했다. 한국에선 송용호 충남대 총장이 대표단을 이끌고 참가했다. 공자 탄신 기념행사가 공자의 고향인 산둥(山東)성 취푸(曲阜)가 아닌 멀리 양쯔(揚子)강 아래 항저우(杭州)에서도 남서쪽으로 약 250㎞ 떨어진 취저우에서 열린 까닭은 무얼까.



공자를 무척이나 존경해 취푸를 8번이나 찾았던 청나라 건륭(乾隆)황제 에게 딸이 있었다. 부족할 게 없는 공주였지만 고민이 있었다. 역술가에 따르면 공주는 황제보다 더 존귀한 집안으로 시집을 가야 화(禍)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건륭은 묘안을 냈다. 공자 후손에게 시집을 보내자는 것이다. 자신은 한 왕조의 귀족이지만 공자 집안은 역대 왕조 대대로의 귀족이란 이유에서였다. 공자 후손은 한(漢)나라 때 봉사군(奉祀君)을 시작으로, 송(宋)나라 때부터는 연성공(衍聖公)이란 귀족 칭호를 받아온 터였다. 공주는 결국 공자의 72대손 공헌배(孔憲培)와 결혼했다. 그가 우부인(于夫人)이다.



 이처럼 공자 집안은 중국에서 ‘천하 제일의 가문(天下第一家)’으로 불린다. 그러나 어디 풍파가 없으랴. 기원전 551년 태어난 공자로부터 지금까지 2500여 년간 공자의 제사를 주관하던 적장손이 고향을 떠난 게 세 차례 된다. 첫 번째는 공자의 9대손 공부(孔鮒).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영을 내린 진시황이 산둥으로 온다는 소식에 허난(河南)성 쑹산(嵩山)으로 피신했다. 그는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반란군에 참여했다가 병사했다.



 두 번째는 48대손 공단우(孔端友). 1128년 금(金)나라가 침입하자 송은 수도를 임안(臨安, 지금의 항저우)으로 옮긴다. 이때 황제를 따라 내려온 공단우는 취저우를 식읍(食邑)으로 받는다. 공단우의 남하는 양쯔강 이남에 유학 붐을 일으키며 대학자 주자(朱子)를 낳고, 이에 따라 조선의 성리학을 꽃피우게 하는 배경이 된다. 이후 105년 동안 송과 금은 저장성 취저우와 산둥성 취푸에 각각의 연성공을 내세워 공자 집안은 6대에 걸쳐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으로 나뉜다. 중국을 통일한 원(元)의 쿠빌라이는 누가 정통인지를 따지게 했다. 이때 남종의 연성공 공수(孔洙)는 “취푸의 자손이 선영을 지켜 조상께 공이 있다”며 자리를 양보해 이후 북종이 연성공 작위를 세습하게 된다.



 9월 28일 취저우에서 공자 탄신 2562년을 주재한 이는 바로 공수의 후손 쿵샹카이다. 그는 6세 때인 1944년 국민당 정부로부터 남종의 마지막 봉사관(奉祀官)으로 임명돼 48년까지 제사를 주관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출범한 뒤엔 20년가량 허베이(河北)성의 금광을 전전했다. 대학 때 토목을 전공한 탓이다. 이후 선양(瀋陽)황금학원 부원장으로 재직하다 취저우로 돌아온 건 1993년.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의 집권 이후 유학(儒學)이 조명을 받고, 취저우시 입장에선 공자의 후손을 부활시키는 것만큼 더 좋은 문화상품을 개발할 수 없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내 어깨에 얹힌 2500년의 짐을 잊은 적 없다”는 쿵샹카이에게 주어진 직책은 ‘공씨남종가묘(孔氏南宗家廟) 관리위원회 주임’. 이후 가묘(家廟)를 수리, 공자 탄신 2555주년을 맞은 2004년 9월 28일 처음으로 공개적인 제례(祭禮)를 지냈다. 쿵샹카이로선 56년 만에 다시 조상께 올리는 제사였다. 공자의 제사를 지낸 것은 한나라 때부터로 사람들이 공자를 본받게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쿵샹카이가 주도한 이날 제사의 형식은 과거와 완전히 달랐다. 변화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사람으로서의 공자’를 강조한 측면이다. 위패엔 ‘대성지성선사(大成至聖先師)’만 쓰여 있을 뿐 뒤에 따르는 ‘신위(神位)’ 두 글자가 없다. “공자께서 신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신이 됐겠느냐”고 쿵샹카이는 말한다. 둘째는 ‘오늘의 예로써 제사를 지낸다’는 점이다. 이날도 기념행사는 전통의 복식과 춤, 음악이 아닌 평상복에 쿵샹카이가 직접 작곡한 공자 찬가로 진행됐다. “청(淸)나라 때 형식으로 제사를 지내면 시대가 바뀌었는데 이 사람들이 왜 이럴까 하며 공자께서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쿵샹카이는 말했다. 셋째는 제사가 학생 위주로 치러진다는 점이다. 황의동 충남대 대학원장은 “공자의 가르침을 어린이에게 보급하려는 노력은 우리도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말했다. 농아 학생들도 나와 논어의 구절을 수화로 표현했다. 사실 취저우 어딜 가도 공자와 마주치게 된다. 취저우 각 학교마다 공자상이 서 있고, 각 호텔 로비마다 공자 말씀이 새겨져 있다. 말끝마다 “쿵샹카이 선생이 공자의 75대 적장손”임을 역설하는 상칭(尙淸) 취저우 시장의 말에선 남종의 정통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현재 취푸에는 북종의 적장손이 있지 않다.



 북종의 정통성을 잇던 77대손 쿵더청(孔德成)이 바로 세 번째로 고향을 떠난 이다. 1936년 국민당 정부에 의해 ‘대성지성선사 봉사관’에 임명됐던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취푸를 떠났다가 장제스(蔣介石)를 따라 대만으로 갔다. 문화혁명 때 공묘(孔廟)가 파괴되자 “어떤 일이 있어도 대륙에 다시 가지 않겠다”던 그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2008년 대만에서 사망했다. 1980년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을 맡아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던 그는 생전인 2006년 증손자(80대손) 쿵유런(孔佑仁)을 봤다.



 그러나 남종의 적장손 쿵샹카이에겐 아들과 딸이 있지만 닝보(寧波)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에게선 아직 후사가 없다. 현재 외손녀만을 본 쿵샹카이에게 “제사를 지낼 대(代)가 끊어지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자 “영국에는 여왕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웃는다. 건륭의 묘안이 필요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취저우=유상철 기자





“남종 75대 적장손 쿵샹카이



2500년의 짐 … 잊은 적 없다”



쿵샹카이가 바꾼 공자 제사










남종 75대 적장손 쿵샹카이



1. 사람으로서의 공자-공자께선 신이 있다고 한 적 없다



2. 오늘의 예로써 지낸다-전통 복식 대신 현대 평상복으로



3. 학생 위주로 치른다-공자 가르침 어린이에게 보급해야





한국의 공(孔)씨 8만3000명



고려 공민왕 때 공소가 시조




한국의 공(孔)씨는 고려 때부터 시작한다. 공민왕(恭愍王)과 혼인한 원(元)나라의 노국공주(魯國公主)가 고려로 올 때 따라왔던 한림원 대학사 출신으로 공자의 54대손인 공소(孔昭·1304~81)가 시조다. 또 20세기 초 산둥성에서 건너온 공씨도 일부 있다. 한국의 공씨는 약 8만3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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