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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당선 확정되자 담담하게 “내일 일정 어떻게 되지”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DJ가 당선됐다. 일산 자택 주변은 밤새 지지자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19일 오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당선증이 전달됐다. DJ와 한복을 입은 이희호 여사가 가운데 서고, JP와 박태준 자민련 총재가 함께했다. [중앙포토]



이번 호가 ‘인간 김대중 이야기’의 마지막 회다. 그동안 관심과 성원을 보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혹시 이 연재가 못마땅하신 분들이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오해를 푸시라”고 부탁하고 싶다. 2월 20일 첫 연재 때 밝혔듯이 이 글은 고인이 된 DJ를 우상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한 인간의 고뇌에 찬 뒷얘기를 증언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DJ의 지지자뿐 아니라 비판자들에게도 1990년대 정치를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됐길 바란다. 그동안 내가 구술한 각종 일화의 정확성에 대한 중앙SUNDAY의 검증 요구는 꽤나 가혹했다. 그로 인한 논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보다 정확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돼 기쁘다.

97년 11월 3일, DJ는 JP(김종필 자민련 총재)와의 공조를 완성했다. 제15대 대통령 당선이라는 최종 목표에 성큼 다가선 것이다. 거기에 박태준 의원까지 가세해 사실상 반(反)신한국당 연합전선이 완성됐다. 신한국당도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조순 후보를 내세웠던 민주당과 합당했다.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새로운 변신을 모색했다. 하지만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던 이인제 전 경기지사가 국민신당 후보로 독자 출마해 여권은 분열됐다. 분열이 단결을 넘어서기 힘들다는 건 역사가 입증하는 바다.

또 다른 고비였던 DJ 비자금 수사도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호에 밝혔듯이 김태정 검찰총장이 10월 21일 “수사를 15대 대선 이후로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모든 게 순풍이었다. DJ의 당선은 ‘따놓은 당상’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나중에 선거 결과가 보여 줬듯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제15대 대선에서 DJ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약 40만 표 차이로 이겼다. 박빙에 가까운 승부였다.

만일 당시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로 인해 여권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실망감이 극대화되지 않았다면 DJ는 집권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답은 모른다. 하지만 IMF가 유권자들에게 미친 영향이 적어도 40만 표는 넘었을 것 같다. IMF를 겪으며 비로소 DJ의 당선이 확실시 됐다는 얘기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대통령 자리는 개인의 노력만으론 얻을 수 없고, 시대적 운명 같은 게 뒤따라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DJ의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당시의 경제상황을 일별해 볼 필요가 있다. DJ는 이미 3월 28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경제 기자회견’을 열어 “앞으로 나를 경제9단이라고 불러 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때도 한국 경제는 어려웠다. 하지만 DJ가 IMF 체제를 예상하고 경제를 강조한 건 물론 아니었다. 97년 신년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최대 관심사가 경제라는 데 착안해 드라이브를 건 것이다. 때마침 기업들의 줄도산 사태가 이어지면서 DJ의 경제이슈 선점은 갈수록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부도가 난 기업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한보철강(1월 23일)·삼미그룹(3월 21일)·진로그룹(4월 22일)·대농그룹(5월 20일)·한신공영그룹(6월 2일)·기아그룹(7월 15일)·쌍방울그룹(10월 15일)·해태그룹(11월 1일)·뉴코아그룹(11월 4일). 한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10월이 되자 S&P와 무디스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잇따라 하향 조정했다. 미국의 모건스탠리는 “아시아를 떠나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이른바 환란(換亂)이라고 불린 이 사태는 정권이 바뀐 뒤 법정 공방으로까지 갔는데 YS(김영삼 대통령)가 11월 10일 홍재형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는 외환위기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11월 14일 강경식 부총리가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 돈을 빌려 보겠으나 여의치 않으면 IMF로 가야 한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공개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 16일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리에 방한해 IMF의 자금 지원조건 협상을 시작했다. YS는 11월 19일 강 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을 경질했다. 후임 부총리에는 임창렬 재경부 장관이 임명됐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였다.

11월 21일 YS가 각 정당 대선 후보들과 당 총재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경제위기에 대한 초당적 대처를 위해서였다. DJ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박태준 자민련 총재(JP는 명예총재), 조순 한나라당 총재 등이 참석했다. 여기서 DJ는 “IMF 자금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 IMF가 악영향만 주는 건 아니고 IMF의 충고와 압력은 우리 경제체질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그 다음 날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DJ의 주장 때문이 아니라 다른 방법이 없는 외통수였다.

다들 헤매고 있었지만 DJ는 IMF 사태 때문에 오히려 부각됐다. 금융위기를 해결하려면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걸 위해선 DJ가 적격이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망명을 하며 형성된 해외 인맥이 예상치도 않던 상황에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반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경제나 외교보다는 법에 가까웠다.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는 나라의 명운을 걸기엔 너무 젊다는 핸디캡이 있었다. IMF 사태만 없었다면 이런 게 문제가 될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11월 26일 클린턴 대통령의 대변인이었던 조지 스테파노플러스가 일산 자택으로 찾아왔다. 클린턴의 핵심 참모였던 그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DJ가 초청한 것이었다. 이날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스테파노플러스(이하 스테파노)=지역과 종교와 성별과 이념을 넘어 한국민 모두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게 뭔가. ▶DJ=경제위기다. ▶스테파노=그럼, 오늘부터 선거가 끝날 때까지 다른 이슈를 일절 언급하지 말라. 경제 문제만 집중해라. ▶DJ=국민과 언론이 지루해하고 싫증나지 않겠나. ▶스테파노=그건 후보가 아니라 언론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언론은 신경 쓰지 말고 선거에서 승리할 이슈만 생각하라. 경제만 계속 얘기하면 언론은 처음엔 재탕이라고 안 쓸 것이다. 새로운 이슈를 요구할 것이다. 그래도 바꾸지 말라. 클린턴도 그렇게 성공했다. 형식과 격식과 장소는 바꾸되 내용은 똑같은 이슈를 일관성 있게, 반복해서, 집중적으로 때려라. 언론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따라온다.”

그의 주장은 그럴듯했다. 결과적으로 옳았다. 하지만 다 맞진 않았다. DJ가 자신의 최대 약점인 고령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경로사상이 강하니 나이가 많다고 공격하는 상대방을 버릇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회담을 마친 뒤 DJ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건넸다. 외환위기를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스테파노플러스는 “2주일 뒤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니 꼭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12월 3일 대한민국은 IMF 체제로 편입됐다. IMF가 대한민국 정부에 2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한다는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사실상 국가 부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집권 여당이 승리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여야 정권 교체는 영원히 불가능할 뻔했다. 하지만 결정은 유권자가 하는 거였다.

제15대 대선은 12월 18일에 치러졌다. DJ는 이희호 여사와 함께 일산4동 저동중학교 제2투표소에서 투표했다. “국민이 현명한 판단을 내리고 50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 교체가 실현될 것을 확신한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경제 발전에 가려 민주주의가 희생돼 왔고 그 결과 경제도 민주주의도 제대로 안 돼 오늘과 같은 사태를 불러왔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DJ는 일산 자택 안방에서 TV 개표방송을 지켜봤다. 초반에는 김대중, 이회창 후보가 각각 39% 정도씩 얻으면서 접전했다. 오후 9시쯤 되자 이 후보가 3%포인트 정도 리드하기 시작했다. DJ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봐 장 동지, 틀림없이 되는 거야?” 내색은 안 했지만 어지간히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총재님, 걱정 마십시오. 됩니다.” “그런데 왜 벌써 3%포인트나 차이가 나지?” “영남 지방부터 개표해 그렇고 호남 쪽은 아직 안 열었습니다.”

그걸 몰라서 물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후 10시쯤부터는 엎치락뒤치락이 이어졌다. TV 화면은 국민회의와 한나라당 양쪽 당사에서 환호하는 당직자들의 모습을 비췄다. 오후 11시까지 선두가 5~6번씩 바뀌는 난전이었다. 마침내 19일 오전 1시30분, ‘DJ 당선 유력’ 보도가 처음 나왔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방송사들은 “DJ의 제15대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된다”고 보도했다.

너무 기뻐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해야 했다. DJ에게 최초의 당선 축하인사를 했다. “약 40만 표 차이로 당선이 확정될 것 같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셨습니다. 총재님, 축하드립니다.” 나는 DJ가 뛸 듯이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표정이 담담했다. “장 동지도 고생 많았어요. 그런데 내일 아침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주무십시오. 당선인사를 정리해 놓았으니 아침에 보시고 정정해 발표하시면 됩니다. 국립묘지 참배, 내외신 기자회견 등 나머지 스케줄은 다 짜여 있으니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래요, 들어 가 눈 좀 붙여야겠어요.

일산 자택 밖에서는 수천 명의 지지자가 몰려와 밤새 ‘김대중’을 연호했다. 나는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았다. 정말 긴 과정이었다. DJ는 그렇게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50년 만의 수평적 정권교체였다.

※인간 김대중 이야기는 30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데 감사드립니다.

정리=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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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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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