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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 찾아 월남, 남쪽서도 ‘자유’ 못 찾아

구상 시인의 1998년 모습. [중앙포토]
1975년 구상 시인은 그때까지 써 온 시·평론·희곡·시나리오 가운데서 주요 작품을 추려 ‘구상 문학선’을 상재했다. 600쪽이 넘는 두터운 이 책 케이스의 앞뒤 면에는 화가 이중섭(1916~56)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림 두 점이 표지화로 실려 있었다. 구상과 이중섭의 오랜 우정은 널리 알려진 일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 그림에 얽힌 뒷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구상은 이 그림들이 52년께 제주도에서 그려진 것으로 추정했다. 그 무렵 6·25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정국은 이른바 ‘제1차 정치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영남일보 주필이던 구상은 기명 칼럼으로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고 항거하는 글을 계속해서 쓰고 있었다.

그해 가을 구상은 그 글들을 모아 ‘민주고발’이라는 제목의 사회평론집을 펴냈다. 당시 제주도에서 머물고 있던 이중섭은 친구 구상이 책을 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상과 연락이 닿지 않은 상황에서 ‘민주고발’이라는 제자(題字)와 표지화 두 점을 그렸다. 하지만 구상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고 있던 중 책은 변종하 화백의 그림을 장정으로 이미 출간됐고, 이중섭의 그림들은 어느 수장가의 수중에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어쨌거나 ‘민주고발’은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 조치됐고, 구상은 특무부대에 쫓겨 피신을 다니다가 마침내 체포되고 만다. 이 책을 빌미로 구상은 이른바 ‘레이다 사건’에 연루되면서 투옥돼 고초를 겪기에 이르렀다. 구상이 당한 두 번째 필화사건이었다.

1919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난 구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41년 귀국한 구상은 함흥 ‘북선매일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46년 ‘원산문학동맹’이 펴낸 동인 시집 ‘응향’에 시 ‘길’ ‘여명도’ 등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응향’이 출간되자마자 북한의 문화예술을 총괄하던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구상의 작품들을 문제 삼고 나선다. 부르주아적이고 퇴폐주의적이며, 반역사적이고 반인민적인 ‘반동 시’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첫 필화였다. 구상은 여러 차례 ‘동맹’에 끌려가 신문을 받아야 했고, 직장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빠지자 표현의 자유가 없는 북한을 떠날 결심을 한다. 이듬해인 47년 구상은 가족과 친구 이중섭을 남겨둔 채 홀로 월남했다.

월남한 구상은 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일하면서 ‘백민’ ‘문예’ 등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남한에서의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월남한 지 3년 만에 겪게 되는 6·25전쟁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계기였다. 피란 행렬을 따라 대구로 내려온 그는 국방부가 발행하던 ‘승리일보’ 주간을 맡는 한편 ‘문총구국대’의 선봉에 서서 전란의 충격으로 정신병 증세를 보인 서정주 등 어려움에 빠진 동료 문인들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9·28수복 며칠 전에는 군 지프를 타고 아직 북한군이 남아 있던 서울로 들어와 ‘승리일보’를 거리에 살포하는 대담성을 보인 일화도 있다. 1·4 후퇴 때 월남한 소설가 김이석, 시인 양명문, 작곡가 김동진 등에게 ‘승리일보’ 기자증을 마련해 줘 남쪽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한 것도 구상이었다.

박정희를 처음 만난 것이 그 무렵 대구에서였다. ‘승리일보’를 주관하던 육군본부 작전국장이 이용문 준장이었고 차장이 박정희 대령이었다. 이용문의 소개로 인사를 나눈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자주 만나면서 우정을 키워나갔다. 박정희가 34세, 구상이 32세 때였다. 5·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후 박정희가 구상을 불러 국정에 참여해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으나 구상은 ‘마음으로만 돕겠다’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유신 시절에는 거의 만나지 못하다가 10·26 사태를 한 달여 앞둔 79년 9월 구상이 마지막으로 박정희를 찾아가 간곡하게 은퇴를 권유했으나 박정희는 끝내 묵묵부답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반공을 국시’로 삼던 군사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다정한 친구였는데도 구상이 겪은 세 번째 필화가 관계당국으로부터 ‘이적(利敵) 혐의’를 받으면서 시작됐으니 아이로니컬한 일이었다. 65년 여름의 일이다. 그는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기 위해 ‘수치’라는 제목의 희곡 한 편을 완성했다. ‘지리산 빨치산의 여대원 한 명이 능욕이 자행되는 산속에서의 짐승 같은 생활에 지쳐 정말 인간적인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귀순하지만 거기서도 전투경찰의 비열한 유혹과 가혹한 행패가 자행되고 있음을 보고 그에 저항하다 죽음을 택한다’는 줄거리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무대에 올려지기도 전에 사전심의에 걸려 공연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구상은 관계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 부분적인 묘사들이 국립 경찰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구상은 또 다른 필화사건을 겪을 뻔한 일이 있었다. 5공 말기의 일이다. 구상은 60대에 접어든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생애를 통틀어 가장 왕성한 작품활동을 펴고 있었다. 매년 한 권꼴로 시집을 내놓았고 86년에는 ‘구상 시 전집’을 펴냈다.

87년 3월에 발표한 ‘까마귀’라는 시가 그 무렵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어른은 젊은이를 물 먹여 죽이고, / 이 독사의 무리들아, 회개하라…’ 등의 대목이 그해 1월의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읽는 이마다 그 작품이 몰고 올 파장을 우려했으나 뒤이은 민주화 열기에 파묻혀 정권의 눈총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구상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늘 앞장섰다. 하지만 두 아들을 병으로 잃는가 하면 여의도의 작은 구형 아파트에서 30여 년을 사는 등 그 자신의 삶은 그리 유복하지 못했다. 젊었을 때 폐결핵을 앓아 폐 한쪽을 절제하고도 비교적 건강을 유지하던 그는 폐결핵이 다시 악화하면서 2004년 5월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구상은 죽음을 앞두고 장애인 문예지 발간을 지원하기 위해 2억원을 쾌척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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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