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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의 즐거운 인생 여행

취미에 대해 물어보면 대답하는 것 중의 하나가 고전 ‘완역판’ 읽기다. 다른 취미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즐거움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레 미제라블은 누구에게도 일독을 권하고 싶고 몽테크리스토 백작도 좋았지만 이 못지않게 큰 즐거움을 줬던 작품이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완역판이었다. 마침 지난주 중앙SUNDAY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란에 걸리버 여행기가 한 면에 걸쳐 실린 것을 보고 무척 반가웠다.

흔히 모험심을 불어넣어 주는 동화로 알려진 이 작품의 핵심은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당시 유럽 문명과 정치에 대한 가혹할 정도의 신랄한 비판이다. 특히 그러한 비판은 18세기 유럽뿐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인국인 릴리퍼트에 있는 두 당파는 구두의 뒤축 높이를 놓고 싸운다. 여기서 이념 싸움은 보수도 진보도, 좌도 우도 아닌 ‘구두 뒤축의 높이’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 운영의 목표가 국가 발전과 국민 복리 증진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사회구성원 간 협력과 신뢰를 의미하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과 유사한 개념도 나온다. 누구든지 73개월간 법을 준수했다는 증거를 제출하면 일정한 특권과 기금을 받고, 법의 준수자란 의미의 ‘스닐팔’이라는 칭호가 이름 앞에 붙는다. 법과 제도의 준수를 통해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구성원 간의 신뢰와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사회적 자본의 효시라는 생각도 든다.

16년7개월에 걸친 걸리버의 여행 지역 중에는 발니바르비 왕국이 있다. 이 나라의 싱크탱크인 ‘계획자 아카데미’라는 곳에서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제안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의회에서 모든 의원은 자기 의견을 발표·토론하고 그 의견을 방어한 뒤에는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쪽에 표결해야 한다. 투표가 그런 식으로 된다면 그 결과가 틀림없이 국민의 이익을 위한 표결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권이 교체되고 여야가 바뀌면서 가끔씩 과거 상대방이 주장했던 내용을 거꾸로 주장하는 우리 현실을 보면 이 제안이 생각나곤 한다.

한 걸음이 9m나 되는 거인의 나라 브롭딩나그에서 걸리버는 국왕과 많은 대화를 나눈다. 국왕은 영국의 정치·의회·사법·교육제도 등에 대해 물어보고 신랄한 비판을 하는데 그 내용이 아주 종합적이다. 재미있게도 ‘건전재정’에 대한 내용이 있다. 세출이 세입을 훨씬 초과하는 영국의 적자재정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국가에 대한 채권자는 누구며 빚은 누가 갚는 것인지, 영국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파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따끔한 지적을 한다. 글로벌 재정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요즘 재정건전성의 중요성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걸리버 여행기가 주는 교훈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유효하다. 걸리버가 어디를 여행해도 조국에 대한 긍지를 잃지 않았던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풍자와 비판을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이 배울 점이다. 정책을 통해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려 노력하는 것이 사명인 공직자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사회 문제에 대한 깊은 성찰과 균형 잡힌 시각이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생각과 경험만이 옳다고 믿는 ‘확신범’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런 기초 위에서 기존 인식의 틀과 관행을 과감히 깨는 ‘유쾌한 반란’이 공직사회에서 일어나야 한다. 몇 해 전 갑자기 미국으로 발령 나 함께 근무했던 90여 명의 직원에게 책을 선물한 적이 있다. 모두에게 각기 다른 책을 선물했는데 유일하게 걸리버 여행기 완역판만 복수의 직원에게 줬던 것도 이런 교훈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걸리버의 즐거운 인생 여행’. 미국으로 떠나던 해 만든 미니홈피의 이름이었다. 살면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글로 쓸 생각을 하며 붙인 제목이었다. 걸리버처럼 문제의식을 갖고 건강한 사회 변화를 추구하고 싶었고,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에서처럼 인생은 아름다운 소풍길 같은, 길지 않은 ‘여행’이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닥쳐도 긍정적이고 감사하며 ‘즐겁게’ 부딪치고 싶은 마음으로 고른 이름이었다.



김동연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으로 2008년 경제위기 극복에 기여했다. 미시간대 정책학 석·박사. 덕수상고 졸업 후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1982년 행정·입법 고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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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