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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치료 24번 받으면서도 ‘괜찮심다’며 안심 시켜”

김정자 여사가 아들이 마지막으로 사인한 야구공을 들고 이야기하고 있다. 뒤쪽 앨범에 최동원의 젊은 시절 사진이 붙어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아까 신문에 최동원박물관 짓는다고 기사가 났데요. 그걸 읽고 집에 들어와 동원이 사진 보면서 얘기했어요. ‘우리 큰애야, 니는 정말로 짧은 인생이지만 굵고 보람 있게 살다 갔구나. 팬들이 모두 니를 그리워하고 이렇게 좋은 일들을 하려고 나서는 걸 보니까 엄마는 너무너무 좋다.”

굵고 강렬하고 살다 간 고(故) 최동원의 어머니 김정자(76) 여사는 부산시 용호동의 한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로 45년을 봉직한 그는 매일 아침 집을 나선다. 두 군데 복지관에서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정신지체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7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정정하고 꼿꼿했다.

그렇다고 한들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픔이 쉽게 가라앉을 수 있을까. 인터뷰 사이사이 그의 눈매는 흔들렸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5일 오후, 최동원의 숨결이 배어 있는 사진과 야구공, 유니폼을 앞에 놓고 우리는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고 애를 썼다.

-아드님이 아프다는 건 언제 알았습니까.
“3~4년 전 한화 코치로 있을 때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겹쳐서 대장에 아주 작은 뭐가 생겼다고, 그래서 간단한 제거 수술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은 그때부터 항암치료를 했는데 통 내색을 안 했어요. 나한테는 ‘괜찮심다, 괜찮심다’ 하면서 계속 안심을 시켰어요. 그 뒤에도 간에 뭐가 조금 생겼는데 아주 초기라서 간단하게, 수술 잘 했다고 했지요.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줄은 몰랐어요.”

롯데 시절 만든 엽서에 어머니가 한마디를 남겼다.
-심각한 상황인 걸 알았을 때는요.
“지난 연말에 7~8시간 대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서울로 올라갔더니 너무 수척해져 있어서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지요. 집에 내려와서 가만 생각해 보니 선수 생활 하면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가 쌓였을까, 시합 지고 나면 팬들로부터 원망 듣고, 선배나 감독 눈치도 보고. 그래서 생긴 병이니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생각했습니다. 속에 있는 것 다 풀어놓기에는 교회가 좋겠더라고요. 저는 절에 다니지만 동원이한테 ‘엄마 생각 하지 말고 교회 가서 하나님한테 매달리든지 누구한테 매달리든지 속에 있는 것 다 털어놔라’ 했지요. 아들이 허허 웃기만 하더니 며칠 뒤에 교회 나가겠다고 하더라고요.”

-8월에 마지막 선고를 받았다고 하던데요.
“담당 의사가 저를 불러서 3개월 남았다고 하면서 보통은 항암치료를 권하는데 선배님은 그동안 항암치료를 24차례나 받았고 너무 고통스러워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항암치료 하면 성공 확률이 어느 정도냐고 물었더니 30%도 장담하기 힘들다고 해요. 그렇다면 본인이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하지 말자고 했지요. 집에서 동원이 사진 보고 울고, 또 사진 보고 울고 며칠을 그랬지요. 1984년 코리안시리즈 당시를 생각하면 제일 가슴이 아팠습니다.”

-너무 혹사를 당해서요?
“그렇지요. 당시 롯데 감독님은 동원이가 나온 게임에서 지면 욕을 덜 먹고, 안 나온 게임에서 지면 욕을 훨씬 더 먹었어요. 그래서 동원이는 매 게임 등판 준비를 했지요. 84년 코리안시리즈 7차전에서는 얼마나 피곤한지 입이 비틀어진 게 보이더라고요. 유두열이 스리런 홈런 쳐서 역전한 뒤부터는 공 한 개 던질 때마다 숨을 쉴 수 없었어요. 경기 끝나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뒤로 쓰러졌지요. 그렇게 죽도록 고생했는데….”

-롯데에 서운한 게 많았던 것 같네요.
“동원이는 늘 ‘내가 나고 자라고 야구를 배운 부산, 내 팬들이 계신 이곳 마운드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어요. 가족들도 기대를 많이 했죠. 그런데 구단에서는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잖아요.”

88년 선수협의회 결성 주동자로 지목된 최동원은 삼성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돼 부산을 떠났다. 그 후 23년 만인 지난달 30일 사직구장에서 그의 등번호(11번) 영구 결번식이 열렸다. 김 여사는 “롯데가 늦게나마 추모행사를 열어주고, 손자 장학금까지 준다고 하니 감사하다”며 마음을 풀었다.

-무테 안경에 싸늘한 표정 때문에 도도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그런 얘기 들으면 엄마로서 억울하죠. 걔는 할아버지·할머니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른 공경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정말 살갑게 대했어요. 그런데 마운드에만 올라가면 승부욕이 대단했죠. 안경은 중학교 때 포수 사인이 잘 안 보인다고 해서 맞췄는데, 테가 있으면 견제구 던질 때 방해가 될 수 있어서 무테로 했습니다.”

-여자들한테 인기도 대단했죠.
“고등학교 땐가 하루는 동원이가 집에 뛰어들어오면서 ‘어무이, 문 잠그소’라면서 우물 쪽으로 도망가더라고요. 조금 있다가 여학생 세 명이 찾아왔는데 동원이 책가방을 들고 있어요. ‘너거들이 우리 아이 책가방은 와 들고 있노’ 물었더니 ‘오빠한테 회포나 풀자면서 책가방을 잡았는데 그냥 달아나버렸어요’ 그래요. ‘회포 푸는 게 뭔데’ 했더니 양과자점에서 빵 먹으면서 얘기하는 거랍니다. 좋게 얘기해서 돌려보냈지요.”

-남몰래 좋은 일도 많이 했다던데요.
“아버지하고 동원이는 ‘연봉은 노력한 만큼 받는 거고 나머지는 이웃을 위해 쓴다’는 원칙이 있었어요. 그래서 주간·월간 MVP 같은 상을 받으면 꼭 100만원씩을 붙여서 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놨어요. 84년 코리안시리즈 MVP로 받은 로열 승용차는 곧바로 방위성금으로 내지 않았습니까.”

-그 반면에 재테크에는 젬병이었다면서요.
“아버지는 남한테 기분 내는 건 좋아했지만 동원이 이름으로 부동산 사는 건 이미지에 맞지 않다고 해서 절대 반대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 이름으로 된 부동산이 거의 없어요.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죠.”

어머니는 아들이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 진출도 나라가 막아서 못 갔고, 지금은 당연하게 인정받는 선수협의회도 초창기에 총대를 메는 바람에 선수로서 전성기에 꺾여버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감사하며 살기로 했다. 큰일을 치르면서 아들이 팬들로부터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는지를 알게 되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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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