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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김열규 … ‘은퇴 없는 삶’ 즐기는 서강대 명예교수·한국학자





한국학자 김열규(79) 서강대 명예교수는 바다가 바라보이는 2층집에 산다. 쉰아홉 살이던 1991년에 아내 정상옥(76)씨와 귀향했다. 정년을 6년이나 앞둔 시점이었다. 그 뒤로 70권 가까이 책을 썼다. 올 들어서만 『행복』 『푸른 삶 맑은 글』 두 권을 냈다. 책 제목에는 그의 일상이 엿보인다. 2008년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올해의 청소년 도서’로 꼽은 『독서』,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교양도서로 선정된 『공부』가 대표적이다. 『노년의 즐거움』이라는 제목의 책도 썼다. 경남 고성군 하일면 자란만(紫蘭灣)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책을 쓴 지 20년이 흘렀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자택으로 찾아갔더니 김 교수는 취재진에 커피를 손수 대접했다. 직접 내린 원두커피에 설탕 한 숟가락, 그리고 코냑 두 숟가락을 타줬다. “시골 와서 살고 있으니 자기 관리라는 게 중요해요. 결국 시간관리죠. 제가 20대 후반 이후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커피를 마셔요. 이때 빼놓곤 알코올은 거의 입에 안 댑니다.”

●귀향하고서 책을 꾸준히 쓰셨죠.

 “70여 가지 내긴 했어요. 『욕, 카타르시스의 미학』은 17판까지 나왔어요. 세상 사람들이 그 책을 보고 울분을 푸는 모양이에요.”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기셨나요.

 “제가 몸이 아주 약했습니다. 별명이 ‘약골’ ‘병골’이었어요. 학교 조회나 체조 시간 때도 당번이랑 교실을 지켰어요. 책 읽는 게 제 일상의 전부였죠. 그게 없었더라면 제 자신의 오늘날 인생이란 없었겠죠.”

●학자로서 한국학을 연구해 오셨죠.

 “신화, 문학, 민속 이 세 가지를 두루 공부했죠. 한국인의 집단적 무의식, 그러니까 한(恨) 같은 게 제 관심사였어요.”

 김 교수는 자신이 마시는 커피를 ‘카페 로열’이라고 불렀다. ‘왕가의 커피’라는 뜻인가. 카페 로열과 한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귀향은 어떻게 하시게 됐죠.

 “저에 관한 기사는 그때 제일 많이 나온 것 같아요. 정년을 앞두고 일찍 그만두는 교수가 거의 없던 때니까요. 제가 병골이라 알레르기가 심했어요. 노상 병원엘 다녔어요. 그게 귀향의 첫째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제가 문학을 강의하며 자연을 칭송하고 찬미했는데,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제 생활이 들어맞지 않는다 싶었어요.”

●‘귀향하자’고 할 때 사모님이 반대는 안 했나요.

 “전혀요. 아무 소리도 않고 ‘그러자’ 했습니다. 화랑을 하던 것도 기꺼이 그만두데요. 지금도 생각하면 제가 눈물이 나려고 그래요. 저 같으면 그걸 그만둘 수 없었을 텐데. 우리 부부는 평생 티격태격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부산대 국문과 출신의 아내 정상옥씨는 재주가 많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출신의 수필가다. 그림을 보는 눈이 있어 귀향 직전까지 인사동에서 갤러리를 운영했다. 조경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서울의 명망가 댁의 정원도 여럿 만들어줬다. 김 교수의 집 안팎은 이런저런 나무로 잘 꾸며져 있다. 아내의 솜씨다.

●교수님이 멋지게 사시는 모습을 보고 시골로 따라오신 분들은 없나요.

 “몇몇이 저하고 같이 살겠다고 땅을 샀습니다. 그런데 부인들이 반대를 한대요. 결국 땅 다 팔고 안 오고 말던데요. 허허.”

●귀향 이후로 뭘 하셨나요.

 “쉰아홉에 여기 왔는데, 김해 인제대에서 저를 오라 합디다. 그러고 나서 일흔에 그만뒀는데, 대구 계명대에서 또 석좌교수로 오라고 해요. 그래서 제가 일흔셋까지 대학 전임을 했어요. 교수 정년이 예순다섯이니까 다른 교수들보다 8년을 더 한 겁니다.”

 귀향하고서 그는 더 바빠졌다. 대학 전임교수를 접고는 재작년까지는 지리산고등학교에서 고3 과외교사를 했다.

 “5년 넘게 가르쳤습니다. 교장 선생을 개인적으로 잘 알았어요. 저보고 ‘이제 대학 전임 자리도 없으니까, 와서 고3들을 가르쳐 달라’고 해요. 오후에 과외교사를 했어요. 대안학교였어요. 제가 문학, 신화 얘기를 들려주니까 아이들이 신바람이 나는 거예요. 저도 좋아하고 참 즐거웠습니다. 지금은 진주 경상대에서 시간강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쉬지 않고 일하시는군요.

 “제가 릴케를 참 좋아합니다. 무명의 릴케가 파리에 와서 로댕의 비서를 했습니다. 그때 로댕이 릴케에게 가르친 것이 ‘항상 일하라’였어요. 릴케가 로댕에게서 받은, 평생의 좌우명입니다. 저는 릴케를 통해 그 좌우명을 또 받았고요. 오늘날 제게 일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 쓰는 것만 일이 아니에요. 컴퓨터 앞에선 안 풀리는 것이 산책하다가, 잡초 뽑다가, 채소 손질하다가 풀리곤 하니까요.”

●귀향 이후로 심심한 적은 없으셨겠습니다.

 “하늘이 내린 혜택을 받았다고 저 스스로 말하고 있죠. 여전히 글 쓰고 책 읽고 있으니까. 현재도 컴퓨터로 책 세 가지를 쓰고 있어요.”




김열규 교수의 대표작

●두세 달에 한 번씩 책을 내시는데 어떻게 가능한가요.

 “제가 생각해도 참 신기합니다. 나이 탓인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띵해요. 그런데 커피 한잔 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머리가 그렇게 맑아질 수 없어요. 이게 제 팔자인가 봅니다.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기찬 표현이 나오고, 좋은 착상이 나옵니다. 저 스스로 무릎을 탁 치고 그러니까요. 그러니 제 좌우명이 ‘오직 일하라’일 수밖에요.”

●현재의 생활을 주변에서 많이 부러워할 것 같습니다.

 “부러워하죠. 저희 집사람이 시집 오니까 우리 어머니가 며느리 보고 ‘너희 남편, 40을 넘기면 좋겠다’ 그러더래요. 그만큼 약골이었죠. 그래서 제가 음식을 아주 조심했습니다. 그 덕에 제가 무려 여든까지 오게 된 거죠. 제가 이 나이에 촐랑대고 까불대고 할 수 있는 것은 병약했던 덕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교수는 인터뷰 도중에 커피를 여러 차례 권했다.

 “커피는 저는 좋은 것만 마십니다. 꿀꺽 삼키면 안 돼요. 입에 머금고 쉼 호흡을 해야 온몸에 번지는 거죠. 커피 맛은 쓴맛 하고 고소한 맛이 잘 어울리는 거죠. ‘인생은 쓴데 그 쓴 것을 견디면 인생이 고소하게 된다’는 것이 커피의 가르침이죠.”

●글쓰기를 참 좋아하셨나 봅니다.

 “그건 어머니께서 익혀준 겁니다. 경남 서부에는 ‘언문 제문(祭文)’이라는 풍속이 있었어요. 시집간 딸들이 친정 집 초상에 와서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가 이렇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하는 내용의 글을 지어와서 제문을 읽게 돼 있었습니다. 딸들이 제문을 읽으며 얼마나 사람을 울리는가 하는 게 관심거리였어요. 저희 어머니가 고리짝 속에 남들이 쓴 제문을 가득 갖고 계셨어요. 그걸 꺼내서 읽으시면서 울고 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글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자기 부모님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딸 자신의 인생이 겹쳐진 글들이죠.”

 누구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김 교수도 마찬가지다. 김 교수 부친은 일제시대에 부산시 동평동에서 주류 도매상을 했다. 모터보트를 타고 바다낚시를 즐길 정도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런 아버지가 홀연히 사라졌다. 김 교수가 초등학교 5학년을 다닐 때였다.

 “남로당원이었던 모양입니다. 아버지가 가게 다 그만두고 함경도 단천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가난해졌죠.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에 아버지를 찾아서 단천에 갔다니까요. 거기에 무슨 아지트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부친 인생은 미스터리군요.

 “아마 그 비극은…. 제가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를 갑니다. 그렇게 형편없이 무책임한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두 세대가 훌쩍 지난 일이다. 그런데도 김 교수는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목이 메었다. 김 교수는 6·25 전쟁이 터진 해에 서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해방 정국과 전쟁,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가 뜨겁던 시절, 그는 ‘좌익분자의 아들’이었다. 두어 개 지방대학을 거쳐 우여곡절을 겪으며 스물아홉에 서강대 교수가 됐다. 대학 교수를 하면서도 보안당국에 불려가 수시로 취조를 받았다.

●교수님은 아버지로서 어떤 분입니까.

 “2남1녀를 길렀습니다. 둘은 대학교수를 하고 있고, 하나는 고교 교사를 하고 있어요. 자식은 비교적 잘 키운 셈이죠. 아이들 교육은 아내가 도맡아서 했습니다. 제가 민속답사를 참 많이 다녔습니다. 집안일이나 아이들에 대해선 요만큼도 신경쓴 게 없어요. 애비 노릇은 거의 안 했다고 해도 좋겠죠. 허허허. 대단히 이기적인 애비였던 셈이죠. 그래도 우리 애들이 참 잘합니다. 아주 효잡니다.”


j 칵테일 >> “도둑 덕에 그림 처분 잘 했죠”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던가. 귀향 후 김열규 교수 내외에게 궂은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집에 도둑이 든 일이다. 아내 정상옥씨가 서울 인사동에서 화랑을 했던 연유로 집에는 그림이 제법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밤중에 도둑이 들어 그림만을 훔쳐간 것이다.

 “한 8년 됐어요. 개를 두 마리 키우고 있었는데, 도둑이 약을 먹여서 개를 죽이고 그림을 훔쳐갔어요. 수천만원어치는 될 겁니다. 귀향한 이후뿐 아니라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충격이었죠.” 그런데 아내 정상옥씨의 설명은 좀 다르다. “도둑놈이 그림을 제대로 몰랐는지 진짜 귀한 그림은 안 가져갔더라고요. 도둑맞은 뒤에 남아 있던 그림을 몽땅 처분했어요. 그때만 해도 그림 가격이 제법 좋았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그림값이 계속 떨어졌어요. 우리가 도둑맞은 덕택을 본 거죠. 도둑 덕에 그림 정리를 잘 했어요. 사람은 미련을 안 가져야 해요.”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현재로는 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네요. 그 순간에 기(氣)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오르고, 일하고 난 뒤에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누리는 삶의 리듬 가운데서 가장 높게 솟아오르는 리듬은 일하는 순간에 느껴지니까요. 에너지가 없다가도 일하면 에너지가 솟아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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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