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가을산에서 인생을 배운다




정진홍 논설위원

# 지난 주말 오대산을 올랐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옛길은 고즈넉했다. 상원사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지나 비로봉에 올랐다. 멀리 설악의 대청과 중청이 화답하고 대관령 위로 쉬어가는 구름이 손짓한다.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이미 단풍이 들었다. 산은 그 변화에 저항하지도 반항하지도 않았다. 변화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 가을산의 풍광은 그야말로 빛났다. 단풍은 산 위에서 아래로 하루 40여m씩 내려가며 물들고 또 북에서 남으로 하루 25㎞씩 번져간다니 어쩌면 이것이 ‘가을의 속도’이리라. 하지만 가을산의 단풍은 머지않아 마지막 잎새마저 땅에 떨구고 하나의 사이클을 매듭지을 것이라는 너무나도 분명한 메시지다. 그래서 가을산은 인생을 생각하게 만든다.

 # 당신이 만약 337세라면? 기쁠까? 즐거울까? 행복할까? 지난 주말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해외초청 공연작이었던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극중에서 337세를 산 에밀리아 마르티는 이렇게 말한다. “100세까지는 그런대로 살아가겠지. 하지만 300년을 살아갈 순 없어. 싫증나니깐. 모든 것이!” 매듭지을 수 없다는 것은 불행한 거다. 끝이 없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저주다. 매듭짓고 끝이 보여야 다시 해볼 희망도 있고 새로운 미래도 있다. 끝없이 펼쳐지는 것은 덧없는 세월일 순 있어도 구체적으로 뭔가 해볼 수 있는 미래는 결코 아니다. 우리에겐 매듭이 필요하다. 끝이 절실하다. 매듭지을 때를 알고 끝이 있음을 알게 되면 분발하게 된다. 삶은 끝을 보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분발할 때 비로소 한 발짝씩 나아간다.

 #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던 이는 영조다. 그는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 연잉군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펼쳐지는 ‘초상화의 비밀’전에서 그 연잉군의 초상을 마주했다. 6·25 한국전쟁 당시 화폭의 3분의 1이 불에 타 없어졌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얼굴 부분만큼은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1714년(숙종 40년) 도화서 화원이었던 박동보가 그린 당시 20세의 연잉군 초상은 300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할 만큼 생생히 살아있다. 그의 단호하게 닫아 문 입술선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했던 그의 처지를 웅변했고, 인중을 덮을 만큼 길게 뻗어 내린 육중한 콧날선은 권력에의 숨은 의지를 머금은 채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와 심지를 담고 있었다. 아울러 가늘지만 선명한 그의 눈매는 정면보다 약간 아래를 향해 있는데 거기엔 무엇인가의 끝을 노려보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시련의 끝’이었으리라. 이 초상이 그려진 지 10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무수리의 소생이란 꼬리표가 붙었던 그가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반세기가 넘는 51년8개월 동안 조선을 다스렸다. 하루하루를 생존하기 위해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그가 마침내 왕이 돼 그토록 오랫동안 군림할지 그 누가 알았으랴, 자신인들 알았으랴. 어쩌면 매일매일 절박하게 끝을 생각했던 그였기에 역설적으로 반세기 넘는 치세를 이룰 수 있었던 것 아닐까?

 # 자고로 끝을 알면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 스티브 잡스가 이뤄낸 소문자 아이(i)의 놀라운 세계(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등) 역시 자신의 ‘끝’이 다가온다는 강박관념을 역전시켜 창조해낸 것이었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럼 당신은 정말로 잃을 게 없다”는 잡스의 유언 같은 이 한마디가 담고 있는 진실은 그 끝이 절실함을 낳고 다시 그 절실함은 놀라운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이다. 논어에 ‘절문이근사(切問而近思)’라는 구절이 나온다. 절실하게 묻고 구체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렇다. 끝이 있는 삶을 향해 절실하게 물어라. 그리고 가까이 있는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사유하며 한걸음씩 그 끝을 향해 내디뎌라. 그때 비로소 삶은 빛난다.

정진홍 논설위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중앙일보 핫 클릭

PHOTO & VIDEO

shpping&life

뉴스레터 보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 군사안보연구소

군사안보연구소는 중앙일보의 군사안보분야 전문 연구기관입니다.
군사안보연구소는 2016년 10월 1일 중앙일보 홈페이지 조인스(https://news.joins.com)에 문을 연 ‘김민석의 Mr. 밀리터리’(https://news.joins.com/mm)를 운영하며 디지털 환경에 특화된 군사ㆍ안보ㆍ무기에 관한 콘텐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 사람들
김민석 소장 : kimseok@joongang.co.kr (02-751-5511)
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