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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헤리티지] 출판 명가 ‘현암사’, 조미현 대표가 말하는 3대 걸친 엄한 가정교육





“한번 잘못하면 ‘네 분’께 혼났죠”



조미현 대표



“우린 한번 잘못하면 네 명한테 혼나며 컸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야단맞는 손주들을 감싸주시기는커녕 더 무섭게 나무라셨거든요. 초등학생 때 엄마한테 혼나고 집 나간다며 가방을 쌌더니, 할아버지가 ‘그래, 너 나가라’시며 ‘너 혼자 살아보라’고….”



 66년 전통 출판사 ‘현암사’ 조미현(41) 대표는 3세 경영인이다. 할아버지 조상원(1913∼2000) 1대 회장과 아버지 조근태(1942∼2010) 2대 회장에 이어 2009년 대표 자리에 올랐다. 조 대표는 일곱 명 대가족이 함께 살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신의와 성실을 강조하신 할아버지·아버지의 경영철학을 생활 속에서 배웠던 시간”이라고 말했다.



글=이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할아버지는 ‘빨간 펜’ 선생님



 조 대표의 기억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가 더 많다. 저녁 약속이 많았던 아버지의 귀가 시간은 늘 밤 늦게였다. 반면에 할아버지는 ‘오후 6시 칼퇴근’을 지키셨다고 한다. 조 대표를 비롯한 손자·손녀들의 학습지도, 생활지도에 할아버지의 역할은 컸다.



 조 대표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4년 동안 할아버지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처음엔 맞춤법, 띄어쓰기를 가르쳐주려고 시작하셨어요. 따분한 받아쓰기 연습보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신 거죠. 제가 보낸 편지를 빨간색 펜으로 교정을 본 뒤 답장과 함께 돌려주셨어요.”



 매주 두세 차례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조 대표의 국어 실력은 점점 늘었고, 4학년이 됐을 때는 더 이상 빨간 펜 교정이 필요 없게 됐다. 아쉽게도 할아버지와 손녀가 주고받은 편지는 각각 두 통씩밖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손녀에서 맞춤법을 넘어 인생의 지혜를 전하고자 했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읽힌다.



 “오늘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읍니다(※당시엔 ‘…읍니다’가 표준말이었다). 아이들이 굴 속에 가려다가 나만한 11살 남자아이가 눈 속에 파묻혀 죽었다고 합니다. (…) 4학년이 그런 위험한 곳에 가다니 철이 덜 들었나봐요. 그렇죠? 할아버지?”(81년 1월 24일)



 “네 말대로 4학년쯤 되면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쯤은 알아야 할 것이다. (…) 그러나 사람의 하는 일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이 할아버지가 거의 70살이 되어도 잘못 판단하는 일이 있으니 말이다.”(81년 1월 26일)



 금전출납부도 할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썼다. “한 달 용돈이 500원이었는데, 매달 검사하셔서 지출과 잔액이 딱 맞으면 500원을 보너스로 더 주셨어요. 1년에 세 번이나 받았을까….”



 결과적으로 조 대표는 여덟 살 때부터 창업자로부터 출판사 경영수업을 받은 셈이었다. 글 다루는 법과 돈 다루는 법에 대한 훈련이 됐기 때문이다.









조미현 현암사 대표가 돌 무렵 찍은 가족 나들이 사진을 꺼내보고 있다. 할아버지가 조 대표를 안고, 어머니(왼쪽)·할머니는 옆에 섰다. 사진을 찍은 아버지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 둘, 셋”을 외쳤을 목소리는 들린다.




#맏자식 무한 책임주의



 조 대표는 1남2녀 중 맏딸이다. “어려서부터 ‘엄마·아빠 없으면 맏이가 부모 대신’이란 말을 듣고 컸다”고 했다. 동생들이 첫째에게 대드는 것은 절대 용납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 권위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신 책임도 컸다. 특히 동생들이 아침에 제시간에 일어나도록 하는 게 조 대표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1년 365일 오전 6시30분까지 일어나 각자 제 이부자리를 개 장롱 안에 집어넣어야 했어요. 그 시간에 방 안에 펴져 있는 이부자리는 아버지가 마당으로 던져버리셨죠. 그런데 동생들이 못 일어났을 땐 제가 손바닥을 맞았어요.”



 억울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항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물을 끼얹든, 소리를 지르든 네 능력껏 동생들을 깨우라”는 말만 돌아왔다.



 그렇게 일어나 오전 7시부터 아침 식사를 했다. 원형 식탁에 일곱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식단은 어른 식성에 맞췄다. “맨날 냉이·달래·우거지국 같은 전통 음식·제철 음식만 먹었어요. 그땐 도시락에 소시지 싸온 애들이 제일 부러웠죠.” 조 대표는 최근 건강검진을 받으며 의사에게 칭찬을 들었다고 했다. “내장지방이 거의 없다”며 “식습관이 좋은 모양”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조 대표는 2000년에 할아버지를, 그리고 지난해엔 아버지를 여의었다. 이젠 22명 직원을 이끌며 출판사를 책임지는 대표 자리에 혼자 서 있다.



 “할아버지·아버지께 배운 대로 하려고요. 신문 많이 읽고, 책 많이 읽으라고 하셨고요. 주말에는 놀지 말고 쉬라고 하셨죠. 늘 메모지 갖고 다니며 아이디어 떠오를 때마다 적으라고 하셨고, 어떤 일이 있어도 직원 월급 밀리면 안 된다고 하셨지요. 술 마시는 원칙도 가르쳐 주셨어요. ‘필름 끊기면 안 된다’ ‘길에서 토하면 안 된다’ ‘집에 똑바로 찾아와야 한다’만 지키면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다셨지요. 그리고 ‘다음 날 절대 지각하면 안 된다’도요….”



 받은 ‘유산’이 끝이 없었다. 조 대표에게 여전히 든든한 울타리다.









조 대표가 할아버지에게 받은 목걸이·반지·편지(왼쪽부터). 할아버지 조상원 현암사 1대 회장은 손녀에게 편지를 쓸 때 항상 200자 원고지를 사용했다.




P.S. 정신적인 가르침 이외에 할아버지가 조 대표에게 남긴 유산이 궁금했다. 조 대표는 반지와 목걸이를 들고 나왔다. 반지는 조 대표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성년이 된 기념으로, 목걸이는 이화여대 섬유예술과를 졸업한 조 대표가 1994년 대한민국공예대전에서 입선했을 때 축하 선물로 해주셨다고 한다. 목걸이 펜던트 뒤에는 ‘축 국전 입선 기념’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꼭꼭 숨겨둔 목걸이를 어찌 찾았는지 도둑이 손을 댔다. 그런데 금으로 만든 줄만 가져가고, 펜던트는 그냥 두고 갔다. 조 대표는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다른 액세서리를 잃어버린 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줄은 다시 만들어 끼웠다. 조 대표가 할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은 또 있다. 96년 5월 서울 인사동 모인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했을 때, 개막식에 입고 가라며 해주신 정장 한 벌이다. 인사동 입구에 걸어놓은 전시회 플래카드도 할아버지의 선물이었다. “따로 돈 내야 하는 자리였는데, 할아버지가 잘 보이는 데 걸어야 한다며 해주셨죠.” 잘 자란 손녀를 흐뭇하게 바라봤을 할아버지의 시선이 세월을 넘어 전해졌다.





현암사



1945년 현암(玄岩) 조상원 선생이 ‘건국공론사’란 이름으로 설립한 출판사. 51년 ‘현암사’로 이름을 바꿨다. 59년 한국 최초의 법령집 『법전』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대표적인 법률서적 출판사로 자리 잡았으며, 80년대 이후 문학·환경·전통문화·어린이 분야에까지 지평을 넓혔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를 비롯한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백 가지’ 시리즈, 고전과 현대 학문의 성과를 아우르는 ‘국학’ 시리즈와 ‘현암신서’ 시리즈, 순수 국내 창작물로만 꾸며진 ‘현암아동문고’ 시리즈 등을 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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