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food&] 박찬일의 음식잡설 ⑮ 커지는 냉장고 그리고 블랙아웃





우린 냉동식품이 아니라 전기를 먹고 있는 게 아닐까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얼마 전 거실에 앉아 한동안 냉장고를 바라봤다. 늘 여닫는 존재이지만, 차분히 바라보기는 처음이었다. 중고로 사서 벌써 십 년이 넘었으니 무생물이건만 식구 대접을 받을 만했다. 양문형이라 살 때는 그토록 든든했는데, 요즘 나오는 집채만 한 신제품에 비하면 초라한 크기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의문 하나. 예전에 비해 다들 식구 수는 줄어드는데 왜 냉장고는 점점 커질까. 집 평수는 늘어나서 놓을 공간도 커졌는데 왜 늘 냉장고는 모자란다고 아우성일까. 냉장고도 모자라 김치냉장고까지 들여놓고도 더 집어넣을 공간이 없다고 왜들 그렇게 푸념일까. 기원후로만 따져서 2000년 동안 인류가 살면서 냉장고를 끼고 있던 시간은 불과 50여 년밖에 안 되는데 말이다. 우리는 혹시 냉장고라는 마약에 중독된 건 아닐까.











요즘 애들은 모르겠지만, 우리만 해도 냉장고 없던 시절의 기억이 있다. 구멍가게에서는 소금과 드라이아이스를 담은 고무 주머니로 ‘아이스케키’를 보관했다. 그 속의 ‘하드’를 꺼내 입에 물면 짭짤한 소금 맛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수박화채라고 먹을라치면 새끼줄에 매단 얼음을 50원어치 사야 했다. 새끼줄이 필요했던 이유를 인생 후배들에게 설명하자면, 얼음을 담을 비닐주머니 따위가 없었으니까. 새끼줄에라도 묶어놔야 얼음이 미끄러지지 않았으니까.



집에서는 찬장에 음식물을 보관했다. 그 작고 옹색한 찬장이 예닐곱 식구의 건강을 책임졌다. 당연히 어머니는 매일 장을 봤다. 어머니를 따라 오후 서너 시쯤 시장에 가면 치맛자락 펄럭이며 장을 보는 아낙들로 만원이었다. 잘 쉬는 두부나 콩나물은 새벽에 장수가 돌아다녔고, 생선 리어카가 자반과 오징어를 팔던 때였다.



가위 혁명이었다. 집에서 얼음을 만들어 먹고 일주일이 지나도 반찬이 상하지 않았다. 냉장고가 등장하면서 인류는 많은 부분에서 해방된 것 같다. 가사노동이 줄었고(한꺼번에 반찬을 많이 해놓을 수도 있고), 시장에 자주 가지 않아도 됐다. 염장 식품이 줄고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위암을 비롯한 위장병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 냉장고가 고마운 존재를 넘어 우리의 조화로운 삶을 위협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고 있다.



얼마 전에 친구랑 냉장고 얘기를 하면서 한참 웃었다. 냉동실 청소를 했더니 남아공 월드컵의 추억(?)에 빠졌단다. 냉동 고기를 둘둘 싸맨 신문이 전한 소식이었다. 유통기한이 다 된 듯하면 우리는 만병통치약처럼 냉동실에 음식물을 넣는다. 사족이지만 고기나 생선을 냉동 보관해도 유통기한이 있고, 맛도 크게 떨어진다. 어쨌든 집마다 냉동실을 털면 60만 대군이 며칠 먹을 식량이 나올 거란 농담도 나왔다.



얼마 전 기록적인 정전 사태가 있었다. 심각성을 깨닫고, 문책을 하니 전기요금을 올려야 한다느니 대책이 쏟아져 나왔다. 에어컨이 주범처럼 지목됐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냉장고에 주목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에어컨을 켜면서 아직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언론에서 에어컨 과용을 집중 진단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냉장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김치는 과거보다 훨씬 적게 먹는데 김치냉장고는 필수를 넘어 장롱만큼 커진다. 특히 전기를 많이 먹는 냉동실이 더 커지고 있다. 냉동식품은 더 화려해지고 다채로워진다. 맞벌이 부부가 아닌데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냉동식품을 사들인다. 언젠가 먹겠지, 유용하겠지 하면서. 그 식품을 차갑게 유지하게 위해 냉장고는 땀을 뻘뻘 흘린다. 과장하면 우리는 김치와 냉동식품을 먹는 게 아니라 전기를 먹는 건지도 모른다. 전기를 만들어내는 수입 원유를 마시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블랙아웃. 전기가 사라지던 날 우리는 더 이상 저 냉장고들이 우리 건강과 삶을 지탱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져야 했다. 합리적 의심, 그건 인류가 발전하는 한 동력이다. 당신의 자식들도 지금 우리처럼 거대한 크기의 냉장고를 사용할 수 있을까도 물론 함께 의심해야 했다.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