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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69년 핵 구상…72년 말부터 핵무기 설계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75년 8월 27일 청와대를 방문한 제임스 슐레진저 국무장관(오른쪽 둘째)에게 핵 포기 의사를 전달한 것으로 간주돼 왔다. 그러나 미 CIA 문서는 핵 포기가 76년 12월 말이라고 밝힌다. 왼쪽부터 브라운 합참의장과 슈나이더 당시 미 대사. [중앙포토]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미 백악관 대통령안보담당 보좌관은 77년 1월 26일 해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과 통화한다. 보좌관은 “비밀리에 한국으로부터 핵무기를 철수하길 원한다. 계획을 마련하라”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지시를 전달했다. 이는 브레진스키가 제출한 ‘합동참모본부회의(JCS) 브리핑: 국가안보회의(NSC) 조치의 연관성’ 메모에 대한 카터의 반응이었다. 대선 내내 주한 핵무기 철수를 주장했던 카터는 취임 일주일도 안 돼 ‘한반도 안보 공약을 약화시키는’ 조치를 요구한 것이다. 브라운 장관은 일주일 내(최소 2월 1일 수요일까지) 계획을 제출키로 했다. ‘핵 철수 계획 요구’는 브레진스키가 받은 6개 지시 중 1번일 만큼 중요성이 컸다. 그 내용은 처음 공개되는 브레진스키의 ‘카터 대통령 컬렉션, 백악관 대화 메모랜덤’이란 문서에 나온다. (분류기호=지미 카터-민감: 1/77~9/78, box2)

미국 CIA 문건서 새로 밝혀진 박 대통령 시대 핵개발

이 메모는 ‘박 대통령이 알았다면’ 중단된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재추진했을 충분한 이유를 제공했을 것이다. 핵개발에 깊숙이 관계했던 한 국내 인사는 “박 대통령이 이를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카터의 지시 전에도 이미 미국이 핵무기 철수를 한국에 공식 통보했기 때문에 대책을 연구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CIA는 카터의 지시에 호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조치는 한국의 핵개발을 촉진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77년 8월 11일자 CIA 대외정책평가 센터 부국장 명의의 ‘한국 핵무기 철수의 의미’라는 3쪽 분량의 기밀 문서가 이를 보여준다. 전체 10개 항목 중 대부분이 철수에 부정적이다.

‘평양은 미군 지상(핵)무기의 철수를 지상군 철수에 따른 논리적 또 당연한 결과로 볼 것이다. 공중(핵)무기의 철수는 전쟁이 벌어질 경우 미국이 핵무기를 재도입할지 의심하게 만들 것이다.(4번)’ ‘평양은 핵무기와 관련된 미국의 의도를 모호하게 볼 것이다(5번)’ ‘남한은 핵무기 전면 철수를 향후 전쟁에서 미국의 핵무기 사용 포기로 간주할 것이다(7번)’ ‘한국은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하고 싶어할 것이다.(9번)’ ‘동맹으로서 대미 신뢰 감소와 북한의 공격적 전략은 박 대통령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재개하게 할 수 있다.(10번)’

이 문서가 카터에게 미친 영향은 파악되지 않지만 한반도 핵무기 철수는 조지 HW 부시 미 대통령때인 91년 9월 28일까지 유예됐다.

이어 78년 6월에는 ‘한국의 핵개발과 전략적 결정’이라는 19쪽 분량의 CIA 종합 분석보고서가 나온다. 보고서는 박정희가 74년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했지만 ▶현재는 실제로 핵탄두를 만들 것인지 결정하지 않았으며 ▶향후 수년간 박정희가 핵탄두나 미사일 생산을 결정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싶지 않아 할 것으로 봤다. 나아가 ‘현재 핵무기 개발,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능력 확보, 핵분열 물질의 축적’과 관련된 증거는 없다고 했다. 또 박 대통령이 76년 12월 핵무기 계획을 전격 포기했다는 점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이 수년 내 핵무기 생산 결정을 할 가능성이 있고, 이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미국 안보공약의 신뢰성과 북한 위협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문서는 미국이 한국의 핵 능력을 정밀 감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서는 박 대통령의 핵무기 구상이 69년 시작됐다고 했다. “한국의 내각 혹은 내각 일부의 논의가 그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이는 70년대 초 시작됐을 것이란 그간의 관측과 다르다. 돈 오버도퍼 전 워싱턴 포스트 기자도 자신의 저서 『두 개의 한국(Two Koreas)』에서 70년으로 썼다. 69년은 ‘아시아 방위는 아시아의 손에’라는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해다. 또 박정희는 74년 말 불분명한 보고에 의존해 단독으로 핵무기 개발 결정을 했으며 계획이 중지될 때까지 어떤 문서도 생산되지 않았다며 혹평했다.

아울러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이름은 ‘890계획’이었으며 박 대통령은 74년 12월 핵ㆍ화학탄두 미사일 개발 계획으로 공식 승인했다고 했다. 핵개발에 관계했던 국내 한 고위 인사는 “당시 6~7개의 이름이 다른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890란 이름은 못 들었다”며 “그러나 전체 계획을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CIA는 한국의 핵 프로그램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 내용은 지금까지 공개된 어떤 것보다 구체적이다. 문서에 따르면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72년 말부터 핵물리학자 1명이 기술자의 도움을 받으며 핵무기를 설계했다. ADD의 핵무기 설계팀은 75년 중반 ▶탄두 구조 ▶고폭탄 제작 ▶컴퓨터 코드 3개 분야로 모습을 분명히 드러냈다. 탄두 분야에 수십 명 박사급 과학자와 더 많은 수의 기술자가 배치됐다. 문서는 “외부로 정보가 유출되지는 않고 있으나 내부 알력, 기술적 무능으로 인해 전전은 별로 없다”고 평가했다. 화학탄두 팀은 75년 2월 10여 명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활발한 분야는 미사일로 76년 중반까지 250명 이상의 연구자와 기술자가 있었다.

문서는 890계획의 중단 시점을 76년 12월 말이라고 했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청와대와 내각 인사의 설득이 있었지만 주요 이유는 ADD의 부진과 당장 핵무기 개발을 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던 점을 꼽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핵 프로그램과 연구기관의 재조직 책임을 청와대 오원철 수석에게 맡겼다. 오 수석은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한국핵연료개발기구(KNFDI)의 기능을 국제기준에 맞게 전환한 것을 평가했다. 이는 미국의 76년 제안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핵우산 사라지면 핵무장론자 득세”
그러나 ADD의 핵ㆍ화학 탄두 제조에 관여됐던 연구자들이 별개 팀으로 남아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고 의심한다. 나아가 ‘핵무기 설계가 현재 진행 중이란 증거’는 없으나 고폭탄 연구ㆍ생산 분야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고폭탄은 핵무기 개발 재개 시 아주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탄두본부 160명 연구자들의 반 이상이 이 일에 종사한다고 우려했다.
또 고폭탄의 성능 평가에 필요한 초고속 카메라, 오실로스코프 같은 장비를 한국이 갖고 있는데 이들이 어디에 설치됐는지 불확실하다. 레이저 동위원소 분리작업에 사용되는 장비에 대해서도 의심했다. “원자력 연구원이 레이저 연구를 한다”며 “그러나 우라늄 농축 기술을 개발하는 데 한국이 관심을 보인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문서는 한국이 현 단계에 핵연료를 축적하고 탄두를 설계하며 무기를 개발하고 배치하는 등의 중요한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으며 핵무기 옹호자들도 80년대 초ㆍ중반까지는 결정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그러나 미국이 80년대 초 미 지상군 철수를 완료하면 서울의 미국의 핵우산에 대한 신뢰는 약화될 것이며 이는 핵무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국민대 홍성걸 교수가 제공한 74~75년 미공개 문서는 철저했던 미국의 압력을 재확인해준다. 예를 들어 75년 5월 3일자 ‘한국 무기 계획’이란 제목의 국무부 부장관의 메모는 ▶‘한국이 10년 내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는 최종 평가에 따라 이를 중단시키되 ▶그럼에도 미국 국익과 지역 안정을 해치는 기술ㆍ장비는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안보 불안과 관계없이 미국의 ‘핵비확산’ 정책에만 몰두한 것이다. 또 감시를 위해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인사의 한국 핵 관련 시설 방문을 강화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주한 미대사관의 과학관 로버트 스텔러가 안하무인 격으로 한국의 과학시설을 드나들었던 배경을 설명해준다. <중앙일보 1992년 3월 20일 25면>

또 포드 대통령 도서관 소장 ‘대화 메모랜덤’ 문서는 ‘박 대통령이 미국에 핵 포기를 약속했다’고 간주되는 75년 8월 회동이 사실과 다름도 보여준다. 제임스 슐레진저 미 국무장관이 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 핵비확산조약(NPT)을 극도로 중요시한다. 한국이 NPT를 준수해야 한다”고 했고 박 대통령은 “한국은 충실히 지킬 것”이라고 했다. 이에 슐레진저는 “포드 대통령은 분명하게 한국을 지지한다…해외 주둔 미군 감축에 대한 의회 압력은 약해졌다. 75년엔 없었고 76년에도 그럴 것이며 77년에나 있을 것”이라며 대한 안보공약을 재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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