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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면 오던 운도 달아난다”

능력보다는 학벌이 행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지난달 말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 결과 응답자의 29.6%가 학력·학벌 차별을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차별로 꼽았다. 장애인 차별은 10.7%, 성 차별은 2.6%였다. 고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현실에서다. 정부건 공기업이건 민간기업이건 ‘고졸 성공 신화’가 많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그런 신화를 찾기란 쉽지 않다.

국졸 출신에서 여의도까지  대학생 국회의원 임동규

한나라당 임동규(67·비례대표·사진) 의원은 초등학교 졸업이 정규 학력의 전부다. 정확하게는 ‘대학교 3학년 국회의원’이다. 2008년 4월 국회의원 당선 뒤 이듬해 경기대 경영학과에 입학해 대학에 다니고 있다. 초등학교 졸업생이 맨손으로 유리 가공 회사를 차려 중소기업으로 키워낸 과정엔 우여곡절이 많았다.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온갖 난관을 이겨냈다. 두 차례의 서울시의회 의장을 거쳐 국회의원이 된 그는 최근 약속이란 자전 에세이를 펴냈다.

그에게 학력과 학벌이 갖는 의미가 뭘까. 국정감사가 한창이던 지난달 22일 의원회관에서 임 의원을 만나 그가 생각하는 성공 인생에 대해 물었다.

-어쩌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게 됐나.
“초등학교를 나와 서당에서 한학을 6년간 배웠다. 천자문·명심보감·대학과 논어를 읽었다. 그러니 학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역이 다른 학문을 배웠을 뿐이다. 옛날엔 한학을 공부해서 재상도 하지 않았나. 학력 때문에 인생길이 막힌 것은 없었다.”

-서당을 다닌 이유는 뭔가.
“가난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6·25가 끝났다. 그때 부친의 사업이 완전히 망해 가정형편이 참 어려웠다. 아버지는 원래 충북 충주시 외곽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그런데 전쟁이 날 때쯤 시계포와 중국식당을 차렸다. 시골에 시계 찬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나. 또 나라가 전쟁으로 엉망인데 중국음식을 사먹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나. 논밭 팔아 시작한 사업이 망하자 가족 모두 거지가 됐다.”

-얼마나 어려웠나.
“아침 굶기를 밥 먹다시피 했다. 점심 도시락은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었다. 저녁은 이 집 저 집 다니며 일꾼들이 남긴 밥을 얻어 먹었다. 단칸방 셋집에 살았는데 어머니가 행상으로 생계를 꾸렸다. 매일 머리에 두부나 떡을 이고 나가 보리쌀·좁쌀과 바꾸는 장사였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어머니가 넷째 동생을 낳았다. 어머니가 일을 못 나가니 당장 먹을 게 없었다. 내가 6남매의 장남인데 60리(24㎞) 떨어진 외갓집에 양식을 얻으러 갔다. 눈 내리는 겨울에 바지 저고리에다 너덜거리는 고무신 차림으로 걸었다. 신발에 물이 차서 발이 얼었다. 그런데 외갓집도 어려워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산모는 물론이고 온 가족이 굶어야 할 걱정에 60리 길을 하염없이 울면서 돌아왔다.”

-서당 공부에도 돈이 필요한 것 아닌가.
“서당에 다니려면 벼·보리 추수기에 쌀과 보리를 한 가마니씩 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으니 노동 일로 때웠다. 내가 다닌 서당은 풍산 김씨 일족이 논을 마련하고 훈장 선생님을 모셔와 만들었다. 훈장 선생님이 직접 농사 일을 하는 게 아니어서 내가 그 일을 했다.”

-부모가 원망스럽지 않았나.
“부모는 나를 낳아서 키워 줬다. 고마울 따름이지 원망이라곤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공부하거나 재산을 만드는 것은 자기가 하나하나 쌓아가는 것 아닌가.”

-6년간 서당 공부를 한 후엔 뭘 했나.
“서울로 왔다. 셋집 주인의 사위가 서울에 있던 판유리 공장 기술자였다. ‘나도 유리 기술 좀 배우자’고 부탁해서 그 인연으로 상경했다. 유리 공장이 원남동에 있었는데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2년간 죽도록 일하다 군에 입대했다. 그러곤 월남 파병을 자원했다. 막내 동생이 개그우먼 임미숙이다. 내가 월남 간다고 하니 어머니가 막 태어난 막내 동생을 업고 군부대로 면회 온 기억이 난다.
‘가면 죽는데 왜 가느냐’고 밤새도록 울면서 말렸다. 그런데 그땐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월남전 가서 죽으면 나라에서 유족연금을 준다고 하니 걱정도 크게 없었다.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이 연금을 받아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월남 가서 돈은 벌었나.
“그때 병장 월급이 54달러였다. 쌀 8가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월급 받으면 모두 집에 부쳤는데 그때부터 우리 식구들이 밥을 굶지 않게 됐다.”

-군대 제대한 뒤 유리 공장을 차려 성공했다. 비결이 뭐였나.
“유리 기술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돈이 없어 점포는 못 차렸다. 혼자서 영업하고 제작하고 별짓 다 했다. 물건 진열하는 쇼 케이스를 만들어 파는 게 주된 일이었다. 그러다 유리를 사다 강화 유리로 가공해 파는 유리 가공 공장으로 키웠다. 91년 서울시의원에 당선됐는데 그때 종업원이 50명쯤 됐다.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학은 나름대로 깊이가 있다. 인생살이에 대한 통찰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경영기법과 세계의 움직임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그래서 서울대 최고경영자 과정 등 여러 곳의 대학원 과정을 5~6년간 다녔다. 단순하게 간판을 따려는 것은 아니었다. 간판이 인생을 결정한다면 명문대 나온 사람들은 모두 성공해야 하지 않겠나. 경영을 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았나.
“20년 전에 30억원이란 거금을 들여 국내에서 가장 큰 유리 가공 기계를 수입했다. 우리나라 건축 문화가 대형 유리를 많이 쓰는 쪽으로 가는 데 착안했다. 그런 눈을 뜨게 해준 게 대학원에서 배운 선진 경영기법이다. 외국 동향을 배우고 일본 공장 견학을 다니면서 뭔가 느낌이 생겼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망한다고 했지만 대한민국엔 그런 기계가 우리 것 하나밖에 없어 돈을 좀 벌었다.”

-학력·학벌 때문에 고민하는 젊은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꿈을 크게 가져라’ 같은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말은 선생님이나 교수님들이 하는 말이다. 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보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자동 생산이 보편화되면서 젊은이가 원하는 대기업 일자리는 늘어나기 힘든 구조가 됐다. 국내에서만 자기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 시대는 지났다. 소박하지만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걸 배우고 익혀 세계 무대로 나가야 한다. 세계 어디로든 가서 현지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좌절을 이겨낸 힘은 뭐였나.
“긍정의 힘이다. 내가 어렸을 땐 벼 베고 난 논에서 이삭 줍고, 배추 뽑고 나면 시래기 주우려 들판을 헤맸다. 그것도 모자라 지게를 지고 나무하러 다녔다. 동네 산에서 억새풀 긁어서 지고 내려오다 산 주인에게 뺏기는 일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들이 나를 강하게 만든 힘이라고 믿었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에겐 운이 오다가도 달아난다. 지금까지 자수성가한 사람을 여럿 만났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긍정적이고 겸손하다. 어떤 어려움도 해결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려움은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지 않나.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허우적거리니 더 어려워진다.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노력하면 물에 뜨게 돼 있다.”

-어릴 때 꿈은 달성했나.
“배고픈 게 가장 큰 설움이니 배고픔을 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하지만 돈을 벌어서 큰 부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꿈이었다. 더 공부해 박사 학위를 따고 싶다. 꿈을 이뤘다기보다 아직도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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