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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의 길 개척했지만 잦은 변신으로 오점

1975년 펜클럽 회장 시절의 백철. [중앙포토]
1970년대 중반 백철 평론가가 신문에 1920~30년대 문단 이야기를 연재할 때 한동안 그를 자주 만났다. 내가 ‘꼬부랑 글씨’라고 명명한 그의 원고에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꽤 있었고, 간혹 문장과 문맥에 연결되지 않는 대목이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가 칠십을 바라보는 연배와 묵직해 보이는 외양과 달리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재하던 글에도 그런 기질이 나타나곤 했지만 그 무렵 출간된 그의 자전적 문단 회고록 『진리와 현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예를 들면 1935년의 이런 대목이다. 당시 이화여전의 음악교수로 있던 안기영이 제자인 김현순과 사랑에 빠져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외국으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일이 있었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30> 1세대 비평가 백철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들 남녀의 불륜과 부도덕을 지탄하는 비난의 화살이 마구 쏟아졌다. 특히 미션스쿨인 이화여전 당국과 기독교계에서는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저주를 퍼부었다. 신문들이 연일 그들에 관한 독설로 ‘도배질’하는 가운데 백철은 크게 분개했다. 백철은 속물주의적인 기성의 도덕관을 비판하고 그들 남녀를 옹호하는 60장 분량의 글을 써 종합월간지 ‘중앙’에 보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사랑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제 간이라고 해서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애정 없는 가정은 감옥인데 그 감옥에서 탈출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이 글이 실리면서 이번에는 백철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 어떤 목사는 “백철은 악마의 화신이며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로부터 3년쯤 전 ‘개벽’지에 근무할 때 여류 작가이며 기자인 송계월과의 ‘자유연애’로 문단의 화제가 된 적도 있었지만 백철의 진취적 기질은 이미 청년 시절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190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백철은 어렸을 적부터 두뇌가 명석해 신의주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도쿄 고등사범 문과에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했다.

재학 중 바이런, 셸리 등 영시를 탐독하고 습작으로 시를 쓰던 백철은 3학년 때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돼 ‘나프(NAPF·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한다. 그때부터 일본어로 시와 이론을 발표하면서 문학활동을 시작한 백철은 1931년 귀국해 ‘개벽’의 기자로 일하면서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해 중앙위원이 된다. 국내에서의 데뷔작은 평론 ‘농민문학의 문제’였다. 그의 문학적 생애에 전환점이 된 것은 1934년 ‘카프’ 2차 검거 때 체포돼 1년 반 동안 투옥됐다가 풀려 나면서부터였다. 프로문학에서 우파 성향의 문학으로 전향한 것이다.

1935년의 이른바 ‘휴머니즘 논쟁’ 때 좌파를 공격하고 우파를 옹호하는 글을 쓴 백철은 프로 계열의 문인들로부터 호된 공격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과의 인간관계마저 단절된 것은 아니었다. 사교적이며 소탈한 성격 덕분에 백철은 문단에 두터운 친분을 쌓은 문인이 많았다. 고향 후배인 정비석을 비롯해 김동리, 최정희, 박화성 등과 한때 ‘카프’ 활동을 함께한 임화, 한설야, 김남천 등 좌파 문인들이었다. 특히 임화와의 우정은 유명해서 임화는 백철이 전향했음에도 ‘이념보다는 우정’이라며 백철을 감싸기도 했다.

그때의 전향을 시작으로 그 이후 백철의 잦은 변신은 두고두고 그에게 오점으로 따라다녔다. 1939년부터 일제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일하면서 창씨개명을 하고 친일의 글을 발표하는가 하면, 광복 뒤에는 좌익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화전선’의 편집을 맡은 일 따위가 그렇다. 6·25전쟁 때는 피난을 가지 못해 조선문학가동맹의 신분증으로 납북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 학계와 문단에서 백철의 위상이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1세대 비평가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을 뛰어넘을 만한 것이 거의 없고, 그에 필적할 만한 후진을 찾아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1957년 미국에 건너가 1년 동안 예일대와 스탠퍼드대에 교환교수로 다녀온 뒤 ‘뉴 크리티시즘’, 곧 신비평 이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면서 그의 위상은 더욱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사실 문학평론가로서 백철의 존재는 광복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후진들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었고,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조연현이 몇몇 글 속에서 조심스럽게 백철의 이론에 반기를 든 것이 그 출발이었다. 특히 1956년 22세의 이어령이 그의 첫 평론이라 할 수 있는 ‘우상의 파괴’에서 백철을 비롯한 선배 평론가들을 싸잡아 폄하한 것은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신호탄의 의미가 있었다.

문단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게 된 것은 그가 신문이나 문예지의 문학월평을 도맡다시피 한 데다 그의 인정을 받아야 행세하는 등 평단을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사소한 실수는 말할 것도 없고 다소의 편향적 시각도 용납되지 않았다. 1960년 말 최인훈의 ‘광장’과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 대한 백철의 월평은 오독(誤讀) 혹은 작품 해석상의 문제 따위를 놓고 정비석, 황순원, 서기원, 강신재, 신동한 등 후배 작가, 평론가들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기에 이르렀다.

30대의 평론가 신동한은 논전 중 50대를 갓 넘어선 그를 ‘백철옹(翁)’이라고 지칭했다. 지금 같으면 ‘야유’라고 했겠지만 그 지칭에는 얼마간 ‘권위’의 뜻도 포함돼 있었다. 어쨌거나 백철은 1962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위원장 직에 올라 그 ‘권위’에 힘을 보탰다. 1970년대 막바지 회장 직을 모윤숙에게 물려줄 때까지 백철은 20년 가까이 그 자리를 굳게 지켰다. 펜클럽의 정관은 2년마다 임원을 개선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후배들의 우회적 퇴진 압력에도 그는 못 보고 못 들은 체 꿋꿋하게 버텼다. 그래도 1970년 제37차 국제 펜대회 서울대회 대회장으로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것은 그의 큰 업적으로 꼽혔다. 일선에서 물러난 1980년대 이후에도 백철은 글을 쓰고 강의에 나가는 등 노익장의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으나 1985년 10월 77세를 일기로 파란의 삶을 마감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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