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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 10대 소녀들과 동거, 본토였다면 ‘엄벌’ 대상

고갱 ‘해변가의 타히티의 여인들’
장애인이나 어린이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성폭력이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세기를 보면 저명한 예술가들조차 이런 문제에 대해 이러 저러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경우도 많다. 후기 인상파의 거장인 폴 고갱 또한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고갱은 처음부터 자기 나라인 프랑스와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고갱의 외가는 남아메리카의 페루 쪽 혈통이었고 그래서 그도 일곱 살이 될 때까지 페루에서 살았다. 어렸을 때 모국어는 불어가 아니라 스페인어였다.

김형진의 미술관 속 로스쿨 <28>폴 고갱의 죄와 벌

이러한 이국적 배경과 경험은 나중에 그의 인생과 그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프랑스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해군에 들어가 중남미 지역을 돌아다니다가 프랑스에 돌아와 주식중개인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때 덴마크에서 온 아내를 만나 비로소 가정을 꾸리고 다섯 자녀를 낳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자리를 잃은 그는 다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이 일 저 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았다. 가정불화도 심해졌고 결국 가족을 외국에 두고 혼자 프랑스로 돌아가게 됐다.

지독한 가난과 고독 속에서 고갱은 점차 우울증을 앓았다. 경제적으로 어렵고 심리적으로 외로웠던 고갱은 뒤늦게 화가로 인생을 새 출발했다. 그림을 통해 친구로 사귀게 된 고흐와 시골에서 잠시 같이 지내기도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별난 성격이라 둘은 여러 번 싸우다가 곧 헤어졌다.
고흐와 헤어진 후 돈이 떨어진 고갱은 남은 재산을 모두 정리해 타히티로 떠났다. 타히티는 남태평양의 섬나라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본국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던 고갱에게 타히티는 그야말로 낙원이었다. 파리의 깍쟁이들과는 달리 원주민들은 순박하고 친절했으며 게다가 생활비가 거의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갱은 타히티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그는 문명에 물들지 않은 원주민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왕성하게 작품에 담아냈다. ‘해변가의 타히티 여인들’과 같은 수많은 명작을 남겼다.

하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갱의 그림들에는 사실 원주민들의 슬픈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고갱은 이미 프랑스에서의 문란한 생활로 인해 매독에 걸려있었다. 타히티로 가서는 원주민 10대 소녀 여럿과 동거하면서 많은 아이를 낳았다. 매독은 끔찍한 고통을 주는 성병이지만 치료약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발명됐으므로 당시에는 아직 치료약도 없었다.
고갱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별다른 죄책감 없이 원주민 소녀들을 통해 타히티에 매독을 퍼뜨린 것이다.

이런 짓을 지금 한다면 아마도 형법에 따라 미성년자에 대한 간음죄 또는 의제 강간죄로 엄벌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프랑스에서 미성년자들과 문란한 성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사회적 지탄을 받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따라서 만약 고갱이 이런 행동을 프랑스에서 했더라면 그는 당시 법에 따라 아마도 중혼죄나 미성년자 성폭행죄 등의 죄목에 의해 가혹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고갱은 본국에서 온 귀한 몸으로 총독부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피해 여성들은 아무런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고갱이 원주민 소녀들과 난잡하게 지낸다고 해서 그를 고발할 사람도, 처벌할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즐겁기만 하던 타히티에서의 고갱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 것은 법적 처벌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변덕이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아름다운 바다와 푸른 하늘, 그리고 너무나도 친절하고 순박한 사람들에조차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자기가 버리고 온 화려한 대도시를 그리워하게 된 고갱은, 전에 아내와 다섯 아이를 버리고 타히티로 갔듯 이번에는 원주민 아내들과 수많은 아이를 버리고 갑자기 혼자 파리로 돌아갔다. 고갱은 타히티에서의 이국적인 경험을 소재로 미술 활동을 해 대도시 파리에서 멋지게 성공해보고 싶었지만, 파리는 그를 잊어버렸다. 그의 이국적인 화풍이나 소재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고갱은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파리에서 살아보려고 애썼지만 실패와 좌절 속에 결국 1년 만에 다시 타히티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아름다운 자연조차 그에게는 감옥의 창살 같았을 것이다. 조그만 섬 타히티에 ‘갇힌’ 고갱은 스트레스와 고독으로 인한 우울증, 매독으로 인해 생긴 정신병에 시달리면서 건강이 차차 악화됐다. 울분에 가득 차서 계속 주변 사람들과도 말썽을 일으켰다. 싸움과 욕설로 나날을 보내던 고갱은 마침내 현지의 프랑스 총독부와도 충돌해 명예훼손 혐의로 타히티 감옥에 가게 됐다.

하지만 고갱은 실제로 감옥에 가지는 않았다. 형기를 시작하기 직전 심장마비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 후 세월이 많이 흐르자 고갱이 타히티에서 했던 어두운 기억들은 역사 속으로 묻혀버렸다. 고갱의 사랑과 증오를 함께 받았던 타히티는 아직도 프랑스 식민지다.



김형진씨는 미국 변호사로 법무법인 정세에서 문화산업 분야를 맡고 있다.『미술법』『화엄경영전략』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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