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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밀려 벙커에 박힌 카트, 사방에선 “포어” 외침

아일랜드 서해안의 명문 코스 발리뷰니언 골프장. 웅장한 둔덕과 하얀 파도, 강한 바람이 휘도는 이 골프장은 매우 어렵다. 폭풍이 부는 날에는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것처럼 괴롭지만 골퍼들은 포기하지 않고 라운드를 마친다. 성호준 기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안경을 썼는데도 바람 때문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다. 폭풍 속 라운드는 전투였다. 비가 내릴 땐 바람은 더 강했고 얼굴이 따가웠다. 맞바람을 받고 언덕을 오를 때는 장롱을 지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았다.

아일랜드, 골프의 낙원을 걷다 <중> 폭풍의 언덕 발리뷰니언

나와 동반자들은 앞 팀이 그린을 비우기를 기다릴 때 둔덕에 숨어 비바람을 피했다. 벙커가 있으면 그곳에 들어갔다. 모닥불가에 둘러앉듯 옹기종기 모여 오순도순 얘기를 했는데 그렇게 안락한 곳이 없었다. 벙커는 양치기들이 비바람을 피하려 판 구덩이였다고 한다. 실감할 수 있었다. 나의 동반자인 미국인 골퍼들은 늘 햇살이 비추는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코스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 악천후에도 그린은 매우 빨랐다. 물기가 하나도 없었다. 진짜 링크스는 모래 땅이다. 경포대 백사장 뒤 모래땅에 소나무가 자라듯, 서유럽에선 잔디가 자란다. 물은 곧바로 빠지고 바람은 그린을 순식간에 마르게 한다. 폭풍 속 골프에서 그린에 도달할 때까지 2타 정도 타수가 더 나온다면 그린에서도 한 타 이상은 타수가 올라간다. 그린에서 바람을 타면 공은 하염없이 굴러갔다.

여성 골퍼들은 라운드를 포기하고 클럽하우스로 향했다. 그러나 나와 동반자는 계속 전진하기로 했다. 아일랜드의 최고 코스인 발리뷰니언에서 중간에 포기할 수 없었다. 캐디인 파드릭은 그냥 끝내자고 하면 “생큐”라고 할 눈치였지만 계속하겠다는 말에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파드릭은 그 바람 속에서도 담뱃불을 붙여 맛있게 담배를 피워댔다. 그는 “불 붙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데 바람 때문에 담배가 빨리 꺼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씩 웃었다.

아일랜드는 폭풍의 종착역이다. 위도가 낮은 한국에서는 태풍이 그냥 지나가지만 위도가 높은 이곳에서는 허리케인이 소멸될 때까지 며칠 동안 방황한다고 한다. 바람이 가장 강하다는 아일랜드의 서부에서 폭풍을 제대로 만났다. 원래 아일랜드의 폭풍은 9월에는 거의 없다는데 골프의 신은 나에게 바람의 맛을 제대로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가는 배가 끊길 정도였다.

1893년 만들어진 발리뷰니언 코스의 원 설계자는 명확하지 않다. 디 오픈 네 차례 우승자인 톰 모리스라는 설도 있고, 다섯 차례 우승자인 제임스 브레이드라는 설도 있다. 그게 누구이든 이 웅장한 둔덕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을 것 같다. 포클레인도 없던 시절이었다. 코스의 진정한 설계자는 자연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프로골퍼들은 장엄한 느낌이 나는 이 골프장을 매우 좋아한다. 디 오픈 챔피언십 직전 링크스를 경험하려 이곳에 오는 선수가 더러 있다. 코스는 공정하고 다양한 도전과 스릴을 준다고 한다. 그들에게 매우 재미있다면 일반 골퍼에게 친절한 골프장은 아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8년 이곳에서 평소 타수만큼 멀리건을 썼다고 한다. 파드릭은 “발리뷰니언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어려운 골프장”이라고 말했다. 둔덕들은 매우 크다. 바람이 세다는 뜻이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풀인 매럼은 바다에서 날아온 모래를 잡아 놓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 매럼은 공도 다 잡아 먹는다.

1번 티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이것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잭 니클라우스는 이 홀에서 티샷을 무덤으로 보냈다. 그를 지켜보던 동네 사람이 “잭, 우리는 묘지로 공을 보내는 사람들을 많이 봤으니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세요”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처음엔 바람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커다란 둔덕을 넘어 보이지 않는 그린을 향해 샷을 해야 하는 3번 홀부터 바람이 부쩍 강해졌고 나도 망가지기 시작했다. 파드릭은 “아주 실력이 좋고 바람이 적다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골프장이지만 오늘처럼 바람이 많이 분다면 스코어는 잊고 그냥 골프를 즐기라”고 말했다. 골프를 즐기라는 것은 정확한 말이 아닌 것 같다. 서바이벌 게임을 즐기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페어웨이에 세워둔 수동 카트가 바람에 밀려가 벙커에 거꾸로 처박혔다. 옆 홀에서 친 공이 바람에 밀려 이 홀 페어웨이를 지나 다음 홀 러프에 박혔다. “포어(공을 조심하라)”라는 골퍼의 고함 소리가 링크스 곳곳에서 들렸다. 골퍼의 비명처럼 들렸다. 바람과의 전투가 시작됐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코스는 어려워진다. 정말 오랜만에 공이 없어서 라운드를 끝내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11번 홀(파 4, 402야드)이었다. 바닷가에 접한 홀인데 웅장한 둔덕 너머에 페어웨이가 있었고 또 다른 둔덕 두 개가 그린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두 개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곳.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곳. 이 골프장을 개조한 톰 왓슨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파 4홀”이라고 했다. 더블보기를 했다. 그러나 가장 멋진 홀이라는 얘기 때문에 바람을 잊고 집중할 수 있었고 샷의 질은 매우 좋았던 것 같다. 그 바람 속에서 더블보기면 파나 다름 없기도 했다.

노하우도 배웠다. 티샷을 할 때 동반자들과 캐디가 에워싸 주는 것이다. 확실한 바람막이 역할을 했다. 어드레스와 스윙이 훨씬 편했다. 대회에서라면 2벌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선수들은 광고판과 갤러리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우리도 죄책감 없이 했다. 전우들의 엄호 속에 우리는 가끔 멋진 샷을 날리기도 했다.

바람은 계속 불어댔지만 가끔 해도 떴다. 그럴 때 들판은 환상적인 빛으로 살아났다. 숨어 있던 야생화가 갑자기 솟아올랐고 풀의 노란색과 초록색, 바다색과 하늘색이 팝콘이 터지듯 차례로 불을 켰다. 오락가락하는 비와 태양 때문에 무지개도 수시로 떴다. 황금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는 무지개의 끝에 서 보는 경험도 했다. 그런데 무지개가 아주 흔하기 때문에 아일랜드 사람들은 무덤덤했다.

18번 홀은 파로 홀아웃했다. 으쓱했다. 동반자에게 “골프는 자연과의 대화이며 비와 바람이 없다면 골프도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양식이 아닌 자연산 광어를 먹은 것 같은 느낌에 뿌듯했다. 공을 많이 잃어버린 것은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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