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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전 초강대국 영국에 ‘자신’을 돌아볼 거울을 주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걸리버 여행기』 때문에 오히려 조너선 스위프트(Jonathan Swift·1667~1745)의 문학적 위대성이 덜 알려졌는지 모른다. 스위프트는 로마의 호라티우스(기원전 65~8)와 유베날리스(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로부터 내려오는 풍자 문학의 전통을 근대에 되살리고 꽃피웠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30>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50)은 세계 문학에서 빠트릴 수 없는 작가 6명을 꼽는다면 윌리엄 셰익스피어, 헨리 필딩, 찰스 디킨스, 찰스 리드, 귀스타브 플로베르, 조너선 스위프트라고 했다.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예이츠(1865~1939)는 “스위프트가 늘 나를 따라다닌다. 길모퉁이마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평생 독신이었던 스위프트는 “침대의 중앙을 포기할 만큼 가치 있는 여자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영국계 부모의 유복자로 태어난 스위프트는 작가, 정치 팸플릿 저자, 성직자로 이름을 남겼다. 이름을 남기려면 사람과 때를 잘 만나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난을 피해 잉글랜드로 이주해 귀인을 만난다. 영국 서리 주 무어파크에서 준남작(準男爵·baronet) 윌리엄 템플(1628~1699)의 비서로 일한 것이다. 어머니 쪽 연고로 만난 템플은 정치인이자 외교관, 작가였다. 그는 저술 활동을 위해 비서가 필요했다. 템플이 사망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그의 곁에 머물면서 스위프트는 작가 소양을 쌓았다.

권모술수 모르는 출세주의자
스위프트는 야심가였다. 앤 여왕 통치기(1702~1714)의 후반부인 1710~1714년에 스위프트는 집권 토리당 지도부를 위해 정치 프로파간다 팸플릿을 작성했다. 요즘으로 치면 ‘스핀닥터(spin doctor)’였다. 때는 스위프트를 외면했다. 1714년 위그당의 승리로 스위프트의 출세가도가 꺾였다.

『걸리버 여행기』의 영문판 표지
1695년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은 스위프트는 신자가 달랑 15명 있는 아일랜드 시골 본당의 신부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영국 성공회의 주교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고위 성직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권모술수도 필요했다. 타협을 모르는 그에겐 없는 자질이었다. 그는 약자를 옹호하고 위선을 혐오했다. 그에겐 위악(僞惡)적인 성향마저 있었다. 풍자가로서 그는 적도 많이 만들었다. 인간혐오자(misanthrope)·여성혐오자(misogynist)라는 악평도 얻었다. 그에 대해 ‘인류는 미워했지만 인간 개개인은 사랑했다’는 좀 궁색한 옹호도 있다. 한편 앤 여왕이 스위프트를 좋아하지 않아 출세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1713년 스위프트는 더블린 성패트릭대성당의 주임 사제가 된다. 그는 생애 마지막 30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묻힌 곳도 대성당이다. 그의 성에 차지 않았지만 12세기에 건립된 유서 깊은 성패트릭대성당의 주임 사제 직은 상당히 명예로운 것이었다.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2대 종교인 장로교에 대한 혐오, 가톨릭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모든 나라와 민족을 싫어했던 스위프트다. 자신이 태어나고 교육받은 더블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일랜드는 그에게 고향이 아니라 망명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1720년대 이후 아일랜드는 스위프트 정치 활동의 주 무대가 된다.

그는 영국의 아일랜드 정책을 맹비난했다. 아일랜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게 원칙이지만, 식민지 아일랜드의 기아와 가난이 일차적으로 점령국인 영국의 탓이라고 주장했다. 『겸손한 제안(A Modest Proposal·1729)』에서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아이들을 굶겨 죽이느니 아이들을 식용으로 내다 파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영국 왕실에 대한 스위프트의 충성심은 변함이 없었다. 스위프트가 그리는 아일랜드는 그와 같은 영국계 식민주의자들의 아일랜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프트는 아일랜드의 애국자, ‘건국의 아버지’ 칭호를 받게 됐다.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인용하며 영국을 공격하고 독립을 꿈꿨다.

보수주의 입장에서 세상 풍자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비판이나 풍자가 좌파·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일종의 비판적 보수주의자였다. 스위프트는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와 군주제에 충성했으며 급진주의를 혐오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계몽주의가 아직 무르익기 전이었지만 이미 이성으로 인간이 완벽하게 될 수 있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생각이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스위프트는 이성의 힘을 믿지 않았으며 맹목적인 과학에도 반대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가 향상되기보다는 악화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걸리버 여행기』에는 스위프트가 궁정과 거리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집약돼 있다. 헤로도토스(기원전 484~420께)에서 몽테뉴(1533~1592)에 이르는 민족지(民族誌)의 성과도 포함됐다. 스위프트는 한번도 외국에 나간 적이 없지만 『걸리버 여행기』는 여행일지의 형식을 띠고 있다. 『걸리버 여행기』에는 ‘출세가 멈춘’ 스위프트의 분노도 담겨있다. 그는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에게 보낸 편지에서 『걸리버 여행기』의 목적이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게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는 소인국 릴리퍼트·블레퍼스크, 거인국 브롭딩낵,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 말의 나라 휴이넘을 방문한다. 『걸리버 여행기』는 걸리버의 행로를 통해 인간의 위선과 야수성, 정치 부패, 민생은 뒷전인 정당들의 이전투구, 영국 제국주의, 문명을 탈을 쓴 야만을 풍자한다. ‘스위프트 코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걸리버 여행기』가 겨냥하는 장소와 인물을 구체적으로 알아낼 수 있다. 암호법(cryptography)을 통해서다.

『걸리버 여행기』는 놀랄 만큼 근대적이다. 비록 허구이지만 풍성한 팩트를 제공하며 어떤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다. 설교조가 아니다. 사실 『걸리버 여행기』는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떠오르던 영국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기회를 제공했다. 『걸리버 여행기』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 성인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가 됐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말처럼 “비교에 의하지 않고서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다”는 것을 어린아이들까지 인식하게 됐다. 영국이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에 영국에 필요한 것은 풍자보다는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스위프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가 불능 혹은 게이였다는 설도 제기됐으나 미혼은 당시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귀족 계급의 20% 정도는 결혼하지 않았다. 스위프트는 고정적인 인간관계가 수반하는 감정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행복한 가정은 그에게 낯선 것이었다. 아저씨·아주머니 손에 자란 스위프트가 어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세 때였다.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 또한 이야기가 벌어진 11년 중 집에 있었던 기간은 7개월 10일에 불과했다.

스위프트에게는 사제(師弟) 관계에서 연정으로 발전한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스위프트보다 여자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본명이 에스터 존슨인 스텔라를 만났을 때 스텔라는 8세, 스위프트는 22세였다. 스텔라는 윌리엄 템플 가문에서 일하던 가정부의 딸이었다. 둘은 단둘이 만나는 경우가 없었고 한 지붕 아래에서 산 적도 없었다. 둘의 관계는 ‘사이 좋은 섹스리스 부부’ 같았다. 둘이 이복남매라는 둥 출생의 비밀 때문에 결혼할 수 없는 사이라는 설도 있다.

청결에 집착하고 분변학·정신병에 심취
제2의 여자는 스위프트가 바네사라고 부른 헤스터 배넘리다. 스위프트의 애정은 스텔라 쪽으로 기울었지만 성관계가 있었다면 대상은 바네사라는 주장이 있다. 스위프트는 바네사를 영국에 체류 중이던 1707~1709년에 만났다. 바네사도 스위프트에 홀딱 반했다. 스위프트는 스텔라와 바네사가 서로 만나거나 서신을 교환하지 못하게 했다. 1723년 문제가 터졌다. 1716년에 스위프트가 스텔라와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루머가 바네사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루머는 이들이 ‘정원에서 야외 결혼식을 올렸다’는 등 구체적이었다. 분격한 바네사는 터부를 깨고 스텔라에게 편지를 보내 루머가 사실이냐고 따졌다. 역시 격분한 스텔라는 바네사의 편지를 스위프트에게 보냈다.

바네사는 1723년, 스텔라는 1728년에 사망했다. 둘 다 지적이고 재기발랄했다. 스위프트의 차가움이 낳은 병 때문에 그들이 일찍 죽게 됐다는 억지스러운 주장도 있다. 둘이 사망한 다음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위프트의 시중을 들며 그를 넘봤다.

스위프트의 말년은 순탄하지 않았다. 1730년대 이후, 혹은 생애 마지막 3년간 병마와 싸웠다. 메니에르병(Meniere病) 때문에 난청·현기증·구역질 증세로 고생하고 마비·실어증도 왔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그는 방에서 걸어 다니며 식사를 했다.

스위프트가 살던 시대는 사람이나 사람들이 사는 곳이나 지극히 더러운 시대였다. 스위프트는 유난히 청결에 집착했고 분뇨로 건강 상태를 진단하는 분변학(糞便學·scatology)에 심취했다. 정신병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 자신이 점점 미쳐갔다. 『걸리버 여행기』의 뒷부분은 그가 미친 상태에서 집필됐다는 분석도 있다. 스위프트의 유산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더블린 최초의 정신병원 건립에 사용됐다.

라틴어로 된 비문에 스위프트는 자신을 ‘자유의 투사’로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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