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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37>
지식인이라 자처하던 수험생들은 펑수즈에게 호감을 느꼈지만 시간이 갈수록 뤄이눙에게 복종했다. “뤄이눙은 지도력이 뛰어났다. 투쟁은 한 편의 예술이었다. 험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의 지도와 비판, 심지어는 멸시까지 달게 받아들였다. 그는 사상이나 종교보다 인간을 믿는 사람이었다.”
뤄이눙은 펑수즈를 대수롭게 보지 않았다. 공자(孔子)가 환생했다며 공부자(孔夫子)라고 불렀다. 유물론자로 자처하던 혁명가들에겐 욕이나 매한가지였다.
중국에 돌아오자 사정이 달라졌다. 한발 먼저 귀국한 펑수즈는 당 중앙위원, 뤄이눙은 보통간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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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을 준비하던 중앙당이 베이징에 있던 뤄이눙을 상하이로 호출했다. 뤄이눙은 도착하자마자 펑수즈를 찾아갔다. 같은 층에 살던 당원 한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하루는 천비란이 달려왔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방금 뤄이눙이 다녀갔다. 방 안에 나 혼자 있었다. 침대 두 개가 있는 것을 보고 펑수즈에게 애인이 생겼느냐고 물었다. 대답을 안 하자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몸을 살짝 피했더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냥 가버렸다.”
뤄이눙은 대범했다. 행동거지가 샹징위(向警予·향경여)를 모스크바로 떠나 보낸 후 펑수즈가 보여줬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브랜디도 마시지 않고 청승맞게 공원을 산책하지도 않았다. 한번은 새벽같이 중앙당에 보고할 일이 있었다. 당서기 천두슈(陳獨秀·진독수)는 입원 중이었고 취추바이(瞿秋白·구추백)와 장궈다오(張國燾·장국도)도 상하이에 없었다. 펑수즈는 천비란과 침대에 나란히 드러누운 채 뤄이눙의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다. 천비란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꼼짝도 안 했다. 뤄이눙은 태연자약했다. 이 일을 계기로 뤄이눙의 위상은 펑수즈를 압도했다.
하루는 친구에게 “어제 강연을 하다 보니 앞에 앉은 여자가 나를 넋 나간 사람처럼 바라봤다”며 좋아했다. 얼마 후 뤄이눙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당원들 사이에 나돌았다.
상대가 주유룬(諸有倫·제유륜)으로 밝혀지자 청년당원들은 “펑수즈와 다를 게 없다”며 “뤄이눙을 비난했다. 말수 적기로 유명한 상하이대학 교수 리지(李季·이계)까지 나섰다. “뤄이눙은 당원들 간의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사람은 조상의 무덤을 파헤치는 무리들과 같다는 말을 자주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조상 무덤을 파헤친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뤄이눙을 저주해야 한다. 그는 우리 당의 체면을 파괴했다.”
주유룬은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 허룽(賀龍·하룡) 등과 함께 홍군을 창설한 허창(賀昌·하창)의 애인이었다. 당시 허창은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