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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 없는 사회

요즘 참 살기 힘들다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그동안 잘살아보자는 일념 하에 정말 열심히 살아 왔는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상은 미래뿐 아니라 당장 현재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상황이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 했던가? 경제·정치·교육,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듯 불안하기만 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 혼돈을 정리하고 우리에게 비전을 제시할 그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는 영웅을 절실히 원하면서도 영웅을 인정하지 않는 묘한 풍토가 있다.

토머스 칼라일은 영웅이란 ‘일반 대중이 행하고자 또는 도달하고자 노력한 것의 모범과 패턴을 만든 인물이요, 넓은 의미에서 그것을 창조한 인물’이라 했다. 즉 영웅은 용맹함과 지략으로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기도 하고, 지성과 성실성·통찰력으로 시대정신을 대변하거나, 불의에 맞서 진실을 밝혀 사람들을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웅은 승리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어찌 보면 영웅이란, 승자가 자신의 승리를 미화하고 지배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허상일지도 모르고, 여기에 어리석은 백성이 속은 것뿐이라며 영웅 미화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영웅의 이야기가 없는 사회는 동화가 없는 어린 시절처럼 뭔가 삭막하고 먹먹하기만 하다.

영웅은 하나의 신화다. 그것은 한 용감한 사람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자 믿음이다. 그는 어떠한 어려움도 좌절하지 않고 이겨내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안다. 즉 영웅이란 다름 아닌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들이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전쟁·테러·자연재해 같은 큰 충격을 입고 두려움과 무기력감과 자존감의 상실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구원이다. 즉 커다란 외상(外傷)으로 충격에 휩싸인 사람들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들 앞에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으며 그들의 공포를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상징적 대상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TV나 매스컴은 이런 사건을 적과 영웅, 생존자와 희생자가 있는 하나의 스토리로 만들어버린다. 9·11테러 당시엔 사람들을 구하다 참사를 당한 소방관들이 영웅으로 추앙됐다. 이렇게 어떤 참사를 영웅이 탄생하고 활약하는 이야기로 바꾸게 되면 사람들은 충격적 사건과 자신을 분리하고 그 사건과의 거리 두기가 가능해진다. 이런 면에서 영웅화 작업은 충격을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담아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영웅이 없다. 아니 있는 영웅조차도 온갖 인간적인 약점을 물고 늘어져 그를 나무에서 떨어뜨리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천 년이란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변변한 영웅의 이야기가 없는 실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영웅이 없는 사회는 불안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영웅이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의 전형이다. 영웅은 보통 사람들에게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내적·외적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것은 자아의 힘에 대한 믿음과 비례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어떤 위험도 이겨나갈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을 준다.

영웅이 없는 사회는 이런 롤 모델(role model)을 상실한다. 영웅이 없는 사회는 만성적인 무력감에 시달린다. 힘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나갔던 위대한 선조나 동시대의 사람에 대한 서사가 없는 사회는 그저 견디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모른다. 그리고 자신들의 열등감과 비참함을 돌릴 다른 대상이나 이유가 필요하게 된다. 위험한 외부세계로 나갈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내부에서 찾게 된다. 즉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소모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자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그들의 두려움과 무력감을 외부로 투사해 특정 사람들을 지목해 처벌하는 일종의 마녀사냥의 형태로 나타나거나, 자신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권위에 대한 반발과 반항으로도 나타난다.

영웅은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의 상징이다. 상징은 우리의 공포나 환상, 폭력성 등을 어떤 표상으로 담아냄으로써 그것들을 안전하게 분출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상징을 잃어버린 사회는 즉흥적인 행동화와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살게 된다. 바로 영웅을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처럼 말이다.



김혜남 52세. 고려대 의대 졸업. 2006년 한국정신분석학회 학술상 수상, 저서로 『어른으로 산다는 것』 『심리학이 서른 살에게 답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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