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j Global] 미국 광고·영화용 라틴음악의 거장, 대니얼 인다트





“어머니가 준 재능 … 긁적대면 곡이 나오죠 ”









건반이 좁아 보였다. 88개나 되는데. 그 많은 건반 위에서 타고난 DNA는 손끝으로 춤을 췄다. 사진을 찍기 위해 피아노 앞에서 ‘치는 척만 해 달라’고 했지만 그는 곧바로 ‘작곡 모드’에 빠져들었다.



요즘 미국에서 광고와 TV 드라마, 영화까지 라틴음악계를 주름잡고 있는 작곡가 대니얼 인다트(55)다.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어루만지듯 두드리던 그는 “사람은 누구나 삶으로 창작한다(Living is Creating)”고 화두를 던졌다.



그런 음악철학은 우리말 ‘짓다’의 의미와 꼭 들어맞는다. 짓다는 삶을 꿰뚫는 동사다.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다. 의식주가 단어 하나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회적 행위이기도 하다. 짝을 짓고, 죄를 짓는다.



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삶 너머 무엇인가를 찾는 몸짓이다. 곡을 짓고, 글을 짓는다. 짓다는 곧 인간 그 자체다. 사반세기 동안 창작해온 그는 짓는 일을 “거창한 대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일 자체가 창작”이라고 정의했다.



때로는 설익고, 때로는 태우면서 뜸들이는 기다림을 배운 그를 만났다.



LA중앙일보=정구현 기자



꿈을 짓다



그는 음악과 함께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남미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인 아르헨티나의 ‘테아트로 콜론(Teatro Colon)’ 소속 ‘프리마 발레리나(제 1 무용수)’였다.



 음악은 밥처럼 친숙했지만 ‘놀이’였지 ‘꿈’이 될 수 없었다.



 “어려서 공부를 잘해 심리학자를 꿈꿨다. 베네수엘라 일류대학에 입학했지만 얼마 안 가 군사정권이 폐교 조치를 내렸다. 학교가 문 닫은 1년 반 동안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놀이 삼아 음악을 했다.” 방학 아닌 방학 기간에 그의 표현대로 “놀듯이” 작곡을 했고, “장난 삼아” 나선 경연대회에서 연거푸 대상을 받았다.



 내친김에 록밴드를 조직해 음반사와 계약했다. 나이 스무 살에 정식 음반을 두 장 내고 나니 음악에 욕심이 났다. 어머니까지 “네 갈 길은 음악”이라고 거들었다.



 1980년 스물다섯에 음악 전공 국비 유학생에 선발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세계 최대 사립대학인 보스턴의 버클리음악대학이 그가 꿈을 지을 곳이었다.



성공을 짓다



그는 미국에 유학 오기 전까지 한번도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지 못했다. 피아노도 대학에서 처음 배웠다. 영어도 익숙하지 못했다. 차석으로 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재능은 있었지만 성공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졸업 후 2년간 생계형 작곡가로 살아야 했다.



●흔히 말하는 배고픈 시절을 통과했다.



 “힘들었다. 작곡하고, 연주하고, 녹음까지 해서 곡당 200달러 받았다. 배고픔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성공의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기타 레슨을 해주던 한 학생의 부모가 디너파티에서 그의 ‘음악 테이프’를 틀었다. 파티 손님 중 한 명이 대형 광고회사 대표의 아내였다. 음악은 대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곧 전화가 걸려왔다.



●첫 번째 작업은 어떤 것이었나.



 “쿠어스 라이트 맥주 광고였다. 크리스마스 시즌 캠페인 광고로 대형 프로젝트였다. 학생들의 왈츠인 ‘에스투디안티나(Estudiantina)’풍의 음악을 원했다. ‘이거다’ 싶어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작업이 쉽지 않았을 텐데.



 “만돌린과 탬버린, 15명의 남성 합창이 가미된 활기찬 음악이다. 그런데 내게는 돈도, 좋은 기계도 없었다. 친구 집에서 방 문틈을 막고 녹음했다. 친구 두 명을 불러 나까지 세 명이 서로 다른 톤과 목소리로 15명분을 합창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젊었고, 용감했다.”



 그리고 30초짜리 음악을 보냈더니 그에게 2만 달러 수표가 돌아왔다. 한번도 만져 본 적 없는 거액이었다. 그는 아직도 그 수표 복사본을 갖고 있다. 당시의 열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그의 처녀작은 미 전국방송을 탔다. 하루 20여 차례 15일간 꼬박 방송됐다. 광고 의뢰 전화가 쏟아졌다. 이듬해 그는 15만 달러를 벌었다. 2년 뒤 스튜디오를 차려 1인 제작자 인생을 시작했다.



●성공했다고 느꼈을 때는.



 “첫 작품 후 4년쯤 지났나. TV를 틀었는데 광고음악 10개 중 7개가 내 작품이었다. 광고음악은 ‘무대 뒤의 일’이다. 비록 일반인에게 나는 무명인이지만 뿌듯했다.”



할리우드에서 짓다



광고음악 성공을 발판 삼아 TV 드라마와 영화음악으로도 역량을 넓혀갔다. CSI, 킹핀, 덱스터, 소프라노스 등등 히트작 뒤에는 그가 있었다.



●드라마 음악을 하게 된 계기는.



 “광고음악을 10년쯤 하다 보니 회의가 왔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상품을 최고라고 선전하는 데 죄책감마저 들었다. 고민하던 차에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봤는데, 또 ‘이거다’ 싶었다.”



●영화가 감동적이었나.



 “반대다. 콜롬비아 현지 촬영 신에서 전혀 엉뚱한 음악이 나왔다. 뭔가 맞지 않았다. 마치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장면에 일본음악이 나왔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인디애나 존스는 거액 프로젝트다. 메이저 영화에서조차 라틴음악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생각하니 성공이 보였다.”



 예상은 적중했다. 1998년 ‘댄스 위드 미’ 삽입곡이 히트했다. 마흔두 살에 또 다른 악보가 그에게 펼쳐졌다. 할리우드였다.



대니얼 인다트



올해 쉰다섯 살의 라틴음악 프로듀서다. 광고음악과 TV 드라마, 영화 음악을 만든다. 30초짜리 TV 광고음악 한 곡에 3만 달러를 받는다. 초당 1000달러로 업계 최고 대우다.



 1955년 ‘야구’와 ‘미인’의 나라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다. 최고 명문 국립대학인 베네수엘라 중앙대학에 입학했지만 군사정권의 대학 폐교 조치로 꿈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했다. 보스턴의 버클리음악대학(Berklee College of Music)에서 4년 장학생으로 공부했다.



 졸업 후 2년간 배고픈 무명 시절을 거쳐 우연히 맡은 쿠어스(Coors) 맥주 TV 광고음악이 대박 나면서 광고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그해부터 지금까지 25년간 라틴음악 광고 제작자 1위 자리를 지켰다. 현대자동차, 밀러 맥주, 맥도날드, 인앤아웃, 켄터키프라이드치킨 등 대기업이 그의 광고주들이다. ‘CSI’ 시리즈, ‘프리즌 브레이크’ ‘소프라노스’ ‘킹핀’ ‘닙턱’ 등 히트 드라마 곡도 썼다. 영화음악으로는 ‘더티 댄싱’ ‘그랜 토리노’ ‘댄스 위드 미’가 있다. 25년간 1000여 곡을 지었다.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음반사 ‘인다트뮤직앤드사운드(IMS)’의 대표이자 ‘셰퍼드유니버시티’의 교수로 학생을 가르친다.



인생을 짓다



작곡가 인생을 걸어온 지 올해로 25년째다. 그의 음악은 초당 1000달러다. 매년 20~30여 곡을 만든다. 그는 백만장자다. 밸리에 살면서 마이애미에 별장도 갖고 있다. 입지도 탄탄하다. 굳이 홍보하지 않아도 그의 음악은 광고나 드라마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는 이제 “호흡하듯 무리 없이 음악을 한다”고 했다.



●음악은 무엇인가.



 “어머니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다. 피아노도 대학 가서야 정식으로 배웠다. 하지만 악기 연주나 작곡은 본능처럼 자연스러웠다. 몇 번 만지작거리면 제 음이 나왔고, 긁적이면 악보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많은 곡을 만들었는데 큰 상은 한번도 받지 못했다.



 “데뷔 당시 배신당한 경험 때문에 메이저 음반사에서 단 한 장도 판을 내지 않았다. 상을 받으려면 그들과 타협해야 하는데, 싫다. 게다가 이미 난 최고 대우를 받고 있다. 상은 별 의미가 없다.”



●가장 난감했던 광고음악은.



 “큰 회사였는데, 간부가 부연 설명도 없이 ‘녹색 느낌(feels like green)’의 음악을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 또 있다. ‘어쿠스틱한 바람소리’를 들어 봤나. 황당한 요구가 많았다.”



●영감은 어떻게 얻나.



 “피아노 앞에 앉으면 저절로 나온다. 다른 작곡가들은 외로워야 곡을 쓴다던데 난 반대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때 오히려 곡이 더 잘 써진다.”



●생애 최고의 창조를 꼽는다면.



 “내 딸이다. 5년 전 쉰이 넘어 결혼해 첫딸을 얻었다. 프리실라다. 아직도 내 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예쁘다(그 후 5분간 그는 딸 자랑만 하는 ‘바보 아빠’가 됐다).”



 스스로에게 음악가로서 몇 점을 줄 수 있느냐 물었다. 숫자 대신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열심히만 하려 하지 않고 최고로 잘하려고 한다.”



 그는 광고음악 제작자로, 드라마와 영화음악 작곡가로, 늦둥이를 둔 아빠로 최고의 인생을 짓고 있다.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태그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