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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는 신의 영역 … 인간은 어디선가 본 걸 재구성할 뿐





[김정운의 에디톨로지 창·조·는·편·집·이·다]②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경영은 없다





가치는 노동을 통해 나온다. 지식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가? 변혁의 주체는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여야만 하는 것인가? 그럼 사회변혁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도대체 뭔가.



대학 시절 마르크스의 일본어판 자본론을 놓고 벌였던 어설픈 논쟁의 핵심이다. 세상은 참 빨리 변한다. 그토록 침 튀겨가며 토론했던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이젠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내 전공인 심리학 교과서보다 더 중요하게 외웠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자본주의적 모순 관계에 관해서도 지난 10년간 전혀 들어본 적 없다. 생산 수단과 생산관계와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물론 인간 소외현상에 관해서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 이상 노동으로 매개되는 산업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식이란 정보와 정보의 관계 변화

우리가 몸으로 직접 겪은 지난 수십 년간의 엄청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지식기반사회, 지식사회(Wissensgesellschaft), 정보화 사회 등은 그래서 나온 개념들이다. 아주 그럴듯해 보인다. 가치가 이제는 지식이나 정보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지식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는 뜻이기도 하다. 옳다. 그런데 좀 더 물어봐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지식인가, 정보는 또 무엇인가.



지식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다! 이렇게 정의하면 지식을 다루기가 아주 편해진다. 에디톨로지는 지식에 관한 손에 잡히는 새로운 정의에서 출발한다. 이렇게 하면 새로운 지식의 정의도 간단해진다. 새로운 지식이란 정보와 정보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식을 구성하는 정보는 또 무엇인가?



정보는 의미가 부여된 자극이다. 이미 설명한 대로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극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이 지각한 자극에 의미를 부여한다. 해석한다는 이야기다. 해석은 의미 부여다. 의미가 부여된 자극을 ‘정보’라고 부른다. 정보는 다른 정보들과의 관련성 속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이렇게 지식이 구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도끼·망치·나무·톱, 이들 각각은 정보다. 혼자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중 하나만 빼라면 뭘 빼겠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양상은 달라진다. 사람에 따라 정보 간의 의미가 달라지며 새로운 지식이 만들어진다.



당신이 만약 나무를 뺐다면 도시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도시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는 대부분 나무를 뺀다. 도끼·망치·톱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이 맥락에서 꼭 ‘연장’이라는 이들이 있다. 그건 주로 조폭들이 쓰는 단어다. 점잖은 자리에선 피하는 게 좋다.) ‘도구’와 ‘대상’이라는, 나무를 베는 것과는 상관없는 관념적 분류인 것이다. 이를 ‘추상적 지식(abstract knowledge)’이라 부른다.



반면, 실제로 나무를 베어본 사람은 나무를 빼지 않는다. 나무 없는 도구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좀 고민하다가 망치를 포기한다. 망치는 없어도 대세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당신이 이런 생각으로 망치를 뺐다면 당신은 ‘시골’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시골 출신이 아닌데도 망치를 뺐다면, 당신에겐 분명 출생의 비밀이 있다. 아무튼 나무를 베는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구성되는 이런 종류의 지식을 ‘실천적 지식(practical knowledge)’이라고 부른다.



미시간대의 비교문화심리학자 니스벳은 문화적 차이란 바로 이런 지식 구성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원숭이·바나나·판다 중 둘을 엮어보라는 문제를 제시하면, 결과는 문화권에 따라 사뭇 다르게 나타난다. 서양인들은 원숭이와 판다를 엮는 반면 동양인들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엮는다. 서양인들은 동물과 식물이라는 추상적 범주로 정보를 엮어내는 반면, 동양인들은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는다’라는 구체적 행위의 차원으로 정보를 엮어낸다. 지식이 다른 것이다.



지식기반사회란 이렇게 정보와 정보를 엮어내는 방식에 따라 사회의 구성 원리가 달라지는 걸 의미한다. 정보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지식은 보다 높은 수준의 메타 지식을 구성하고 이 메타 지식은 또다시 보다 높은 단위의 메타-메타 지식을 구성한다. 이런 식으로 끝없는 지식의 깊이가 만들어진다. 이를 가리켜 ‘아는 게 많다’고 한다.



생전 듣도보도 못한 것은 생각해낼 수 없다.

언젠가부터 ‘창조경영’이란 말이 상식이 돼버렸다. 이전과는 다른 뭔가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내자는 뜻이다. 그러나 창조경영은 맥락이 틀린 단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을 창조라고 한다. 인간은 절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다. ‘창조(creation)’는 신만 한다. 인간은 흉내를 낼 따름이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creative)’, 즉 ‘창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창의성(creativity)’이 옳다. (그러나 ‘창조경영’이란 단어가 일상어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혼자 ‘창의성’이라고 우기면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한마디로 ‘웃기는 짜장’이 된다. 창조경영이란 단어를 쓰더라도 일단 맥락은 정확히 하자는 이야기다.)



정말 많은 사람이 창조, 창의성을 이야기하지만 서로 뜻하는 바가 매번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한 지식인(?) ‘네이버’에서 ‘창의성’을 검색하니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는 특성”이라고 나온다. 또다시 물어봐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새로운 것인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 상상도 못하는 것? 이런,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생각’이라는 우리의 인지적 과정 자체가 그렇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 상상도 못하는 것은 절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던 것들, 들은 적이 있었던 것들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인지발달심리학자 피아제(Piaget)는 생각의 본질을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presentation, 즉 ‘보여주다’의 의미에 반복을 뜻하는 ‘re-’가 붙은 것이다. ‘다시 보여주다’라는 의미다. 어디서 본적이 있었던 것을 그림처럼 머릿속에 다시 한번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다.

우리의 생각은 그림인가, 아니면 문장인가. 심리학의 아주 오랜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이를 ‘심상(image)’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 생각의 내용이 그림인가 문장인가.



우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를 특징 짓는 대표적인 모습들, 웃는 모습, 아니면 어릴 때 야단치는 모습 등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는 이야기다. 문장은 그 다음이다. 복잡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생각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중얼거리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다. 논리적 사유는 2차적 과정이다. 그래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해가 진 다음에 난다. 지식인이 비겁한 이유다. (그래서 난 교수가 정치인이 되는 것에 절대 반대다!)



아이가 도대체 언제부터 생각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피아제는 ‘지연모방(deferred imitation)’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흉내를 내기는 하되, 한참 지난 후 하는 흉내를 뜻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을 바로 흉내내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 신경세포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런 본능적인 모방 행위는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상대방의 정서를 공유하는 최초의 의사소통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후 약 1년이 지나면서 아기는 ‘지연모방’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상대방의 행동을 머릿속에 사진처럼 저장한다는 뜻이다. 상징으로 매개되는 생각, 즉 표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이때부터 아기의 본격적 인지발달이 시작된다. 그 이전의 단계는 진짜 생각이 아니다. 그래서 피아제는 ‘감각운동적 사고’라는 묘한 표현을 쓴다. 생각을 하기는 하되, 감각과 운동기관을 통해 하는, 아주 원시적 사고라는 뜻이다.















생각의 본질이 ‘어디선가 본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면, 창의적 사고란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1을 보자. 이 사진을 ‘시상식’이라는 제목으로 본다면 꽃다발과 선수, 시상자가 함께 있는 아주 익숙한 장면이다. 그러나 이 사진을 ‘아주 난감한 시상식’이란 제목으로 보게 되면 아주 달리 보인다. 잠시 갸우뚱하다가, 시선의 방향이 바뀐다. 꽃다발과 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에서 사진의 오른쪽 하단에 눈길이 가게 된다. 아, 그러고 보니 시상자도 여자다. 여자 시상자의 눈길 또한 선수들의 난감한 부위를 향하고 있다.



아주 익숙하고, 진부한 시상식 장면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상되기 시작하면서 질문은 이어진다. 눈길 둘 곳이 없었던 발레리노의 딱 붙는 타이즈의 필요성에 관한 질문, 이 난감함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개그콘서트의 ‘발레리NO’식 유머의 본질 등. 더 나아가 피겨스케이팅에서 선수들은 왜 다리 번쩍 들어올리고 수없이 반복할까, 발레리나는 왜 그런 위로 다 들쳐진 ‘아이스케키 치마’를 입을까, 왜 우리는 이런 모습을 예술이라고 부르며 감동할까.



일상의 당연한 경험에 대한 의심의 시작이다. 창조적 사고가 시작된 것이다. 이 과정을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로프스키(Shklovsky)는 ‘오스트라네니예(ostranenie)’, 즉 ‘낯설게 하기’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가장 창조적 작업인 예술의 목적은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을 낯설게 해 새로운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삶이 힘든 이유는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아, 남의 돈 따먹기 힘들다!’며 출근하는, 참고 인내하는 삶에는 어떠한 탈출구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삶을 낯설게 해야 한다. 우리 삶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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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 문화심리학 박사.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와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의 저서와 방송 활동, 특강을 통해 재미와 창조의 철학을 펼치고 있다. cwkim@m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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