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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옷 벗은 마하’ 속 주인공 시선이 당당한 까닭은 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25> 존 버거의 『본다는 것의 의미』와 『시각의 의미』

‘옷을 벗은 마하’ 때문에 1815년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드 고야는 재판을 받게 된다. 요즘 말로 하면 음란물 제작 혐의쯤 될 것이다. 1799년부터 궁정화가로 일하던 고야는 당시의 실권자 마누엘 고도이의 주문으로 이 작품을 그렸다. 통상적으로는 ‘옷을 벗은 마하’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해 면피용으로 동일한 구도의 ‘옷을 입은 마하’를 하나 더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옷을 벗은 마하’는 ‘옷을 입은 마하’ 뒤에 감추어져 있다가 줄을 잡아당기면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림 자체보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이 더 음란한 것 같다. ‘옷을 벗은 마하’는 도발적인 눈빛과 부자연스럽고 각진 몸매로 19세기 초반의 누드화 전통에서 벗어나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 작품에 대해 존 버거는 통상적인 생각과는 달리 “옷을 입은 마하에서 옷을 벗은 마하가 나왔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누드로 그려진 마하의 가슴과 다리의 부자연스러운 형태, 마하의 뻔뻔스러운 시선이다. 특히 매우 각지게 그려진 가슴의 형태는 꽉 조이는 코르셋을 입은 상태의 젖가슴이며, 뻔뻔한 표정은 자신이 누드 상태라는 것을 모르는 시선이라는 것이다. 옷을 입은 마하를 그린 뒤 옷이 없다고 상상한 결과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말이다. 이런 과정에서 실제 누드 모델을 보고 그릴 때의 친밀성이 사라지고, 폭력적인 관음증이 전면화됨으로써 이 작품은 더 야하고 자극적인 욕망을 담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사료를 가지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존 버거는 자신의 직관에 의거해 논의를 전개한다. 면밀한 ‘통찰’이다.



여러 글에서 보여주는 존 버거의 탁월한 ‘통찰’은 우리를 매료시킨다. 모딜리아니의 갸름한 얼굴의 비밀을 유한과 무한의 대비로 푸는 것도 흥미롭다. 사랑하는 사람은 유한한 존재지만 그에 대한 감정은 무한한데, 그 무한의 감각이 갸름한 얼굴의 표현으로 드러난다고 해석한다. 그런 공감이 모딜리아니의 그림엽서, 아트 상품을 스테디셀러로 만드는 이유다.



인터넷 검색만 하면 몇 초 만에 관련 자료가 우르르 쏟아지는 정보 과잉시대에, 사태의 본질적인 연관을 직관적으로 읽어내는 ‘통찰’은 글 쓰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1926년 런던에서 태어난 존 버거는 62년 영국을 아주 떠나 알프스의 작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글을 쓰고 있다. 글 쓰는 작가이자 농부인 존 버거는 도시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는 우리와는 다른 감수성과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 책이 가진 온기는 ‘본다는 것’을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과 등치시킬 수 있었던 시대, 인간의 진정성을 진정으로 믿었던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에서 비롯된다. 『시각의 의미』(동문선, 2005), 『본다는 것의 의미』(동문선, 2000)라는 식의 제목 때문에 시각적 인식에 대한 이론서로 오해할 수 있으나, 이 책들은 그가 보고 느낀 작품들에 대한 비평서들이다.



그에게 본다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이며,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한 시대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존 버거는 시대가 작가의 개성을 통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간파한다. 역사를 살아간 모든 인간이 성공할 수 없듯이, 어떤 작가들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가 역사에 직면해서 인간적인 가치를 가진다면, 충분히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버거는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마르크시즘 미학자 G 루카치의 충실한 계승자이기도 하다. ‘만종’과 ‘이삭줍기’로 유명한 밀레에 대한 분석이 대표적인 예다.



밀레는 평생을 다해 농민들의 경건함과 인간적인 진실을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배경으로 하는 농민들의 모습은 어쩐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농민들은 신고전주의나 아카데미즘 등 이전 시대의 지배계급인 귀족들의 그림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부차적인 존재였다. 1848년 파리 코뮌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계급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구도가 전면화되었다. 밀레는 농민들에 대한 자신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산업 사회의 노동자 계급으로 몰락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밀레는 농민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아름다운 전원 풍경 속에서 노동을 하는 농민들을 그리려고 했다. 밀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한다. 농부가 땅과 갖는 관계는 기존 풍경화 속에서 구현된 풍경과 인물의 관행과는 맞지 않았다. 19세기 유럽 회화의 전통에는 신화적 풍경 속의 인물, 귀족적인 이상을 담은 풍경화는 있었지만, 농민들을 위한 풍경은 없었다. 밀레 스스로도 이런 풍경을 창조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부자연스러움의 이유라고 버거는 설명한다. 역사적 격변의 의미, 유화라는 장르의 속성, 당시 미술의 관행, 작가의 개성을 한 줄에 꿰어 보여준 멋진 분석이다.



버거는 역사적 격변이 개인에 미친 구체적인 변화는 예술에 각인된다고 생각한다. 1848년이 한 세대의 삶에 끼친 영향은 역사책이 아니라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에 잘 기록돼 있다고 말한다. 그의 책에 깔린 역사적인 사건은 ‘1968년’ 학생혁명이다. 1968년에 걸었던 희망과 좌절을 직접 겪으면서 그의 눈은 더 깊은 통찰을 얻게 된 것 같다. “성공하지는 못했어도, 인간적인 가치를 잃지 않으면 패배한 것이 아니다”라는 진리를 그의 책 역시 보여준다.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1970년대, 사진적 시각이 갖는 차가움과 뜨거움에 대한 긴 논의 역시, 새로운 발전 국면에 접어든 인간의 존재에 대한 탐구다. 그를 딱히 미술비평가니 시각이론 전문가니 하는 좁은 틀에 묶을 수는 없다. 『우리 시대의 화가』 『A가 X에게』『G』 등의 소설,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예술과 혁명』『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세상 끝의 풍경』 등 다양한 종류의 글쓰기를 해내고 있다. 특유의 문장력과 통찰력은 한 권을 읽고 나면 다른 책도 읽고 싶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미술 관련 서적들은 화려한 도판이 실려있지 않은 겸손한 상태로 만들어져 있다. 책의 이런 불친절은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보충해야 한다. 딴은 그림이 없으니 글에 대한 집중도가 오히려 높아진다고 해야겠다. “슬퍼하고 생명력 있고 격렬하고 부드러운 남자. 외양의 이면을 추적하는 한 남자. 보지 못하는 눈을 그리는 남자… 현존하지만 여전히 가시적인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는, 아마도 음악 같은 한 남자.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화가 모딜리아니에 대한 탄력 있는 묘사다. 그의 문장은 격조 높고 맛있다. 가을날 독서의 식욕을 충분히 자극할 정도로.



이진숙 kmedic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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