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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봄 문인들과 술잔 기울이다...대폿집서 ‘세월이 가면’ 즉석 작곡

‘신혼 시절의 이진섭박기원 부부’. [필자제공]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으나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주: 본래 써진 시와 노래로 만들어진 가사에는 어미(語尾)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29> 팔방미인 작가 이진섭

요절한 시인 박인환(1926~56)의 마지막 작품인 ‘세월이 가면’이라는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져 반세기가 넘도록 널리 애창돼 오고 있거니와 노래로 만들어진 그 과정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박인환이 죽기(3월 20일) 바로 며칠 전인 이른 봄 박인환과 소설가 송지영, 시나리오 작가 이진섭, 가수 나애심 등 넷이서 명동 ‘동방 살롱’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냥 헤어지기 서운하다며 길 건너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카운터에 나란히 걸터앉아 술잔을 기울이다가 세 남성이 그 무렵 인기가 치솟던 나애심에게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조른다. 나애심이 이리저리 꽁무니를 빼자 박인환이 종이를 달라고 하여 즉석에서 ‘세월이 가면’을 완성한다. 이진섭이 시를 보고 다른 종이에 악보를 만든다. 나애심이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른다. 다음에는 넷이서 합창을 한다. 이때 ‘명동 백작’ 이봉구와 테너 임만섭이 술집에 들어선다. 임만섭이 악보를 받아 들고 노래를 부른다….

‘세월이 가면’에 곡을 붙인 이진섭은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었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진섭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뒤 합동통신 기자를 시작으로 KBS 아나운서를 지내는가 하면 조선일보·서울신문·경향신문을 거치는 등 83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30여 년 동안 줄곧 언론인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언론계 생활 틈틈이 시나리오·희곡·소설·오페라 등 여러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겨 문명을 떨치기도 했다.

이진섭이 타계하던 그 무렵부터 나는 그의 아내 박기원을 ‘은평 클럽’의 모임에서 비교적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은평 클럽’은 박연희·서기원·이호철·김시철·박성룡 등과 박기원·구혜영·최미나 등 여류 문인들이 멤버인 은평구 거주 문인들의 모임이었다. 29년 서울 태생인 박기원은 숙명여대를 졸업한 뒤 서울신문·경향신문의 기자를 지내고 50년대 중반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박기원에 따르면 이진섭은 일찍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아 어렸을 적의 꿈은 지휘자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우에노 음악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집안의 강력한 반대에 부닥쳐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음악에 대한 관심의 끈은 놓지 않고 혼자 악전과 피아노 등 악기를 익히고 음악사를 공부하는가 하면 KBS 아나운서 시절에는 한국 최초로 라틴 음악과 샹송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프로그램을 담당하기도 했다. 슬하의 네 남매 가운데 두 딸이 음악을 전공한 것도 그의 영향이었다. ‘세월이 가면’을 작곡한 것은 이진섭의 감춰진 음악적 재능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이진섭과 박기원이 부부가 된 것도 다분히 극적인 데가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49년 박기원이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로 들어갔을 때였다. 그때 이진섭은 서울신문이 발행하던 ‘주간 서울’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절친한 친구의 오빠여서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진섭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부산 피란 시절인 53년 봄이었다. 50년 7월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서울에서 아들을 낳은 이진섭의 아내는 고향이 북쪽인 데다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여서 북한군 퇴각 때 그를 남겨둔 채 아들을 데리고 친정 식구들을 따라 월북했다. 이진섭은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해 박기원을 만났고 그때부터 사랑이 싹 터 서울 수복 후인 54년 10월 이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이진섭에게는 즐기는 잡기도, 음악 외에는 이렇다 할 취미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었다. 술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술은 취미라기보다는 ‘반려’의 의미가 있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이진섭은 경복고 1년 후배인 칼럼니스트 심연섭과 함께 언론계의 ‘쌍벽의 애주가’로 꼽혔다. 술과 관련한 이들의 에피소드도 많다. 프랑스 파리의 ‘뉴욕 해리스 바’라는 술집은 카뮈·사르트르 등 프랑스 문인은 물론 헤밍웨이·피츠제럴드 등 세계의 저명 문인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한데 그 술집의 낡은 사인첩에는 그들의 사인과 함께 한국인으로서는 심연섭과 이진섭의 사인이 올라 있다고도 한다.

박기원이 ‘여자 문제 따위로 질투를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술에 대해서는 늘 질투하며 살았다’고 회고할 정도로 이진섭은 매일 술 속에 파묻혀 살았다. 심연섭이 77년 54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이진섭은 장례가 끝날 때까지 줄곧 술을 마시며 동기간을 잃은 것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마시는 횟수와 주량이 다소 줄기는 했지만 술이 곁에 있어야 무슨 일이든 하는 습관은 버려지지 않았다. 특히 혼자 술을 마실 때면 앞의 빈 잔에다 술을 따르고 ‘이건 심연섭의 잔’이라며 대작 아닌 대작을 하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심연섭의 죽음에 영향을 받았던지 그 이듬해인 78년부터 별 탈이 없던 이진섭의 건강에도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간경화 증세였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당뇨병까지 겹쳐 입원과 퇴원을 되풀이했다. 그래도 퇴원을 하면 술잔을 입에 대곤 했다. 술로써 스스로의 건강을 체크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82년 말 이진섭은 KBS 출판국으로부터 ‘모차르트의 일생’을 번역해 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내용이 난해하고 까다로운 데다가 방대한 분량인데도 두 달 안에 끝내 달라는 주문이었다. 투병 중임에도 이진섭은 밤을 새워 가며 원고에 매달려 약속대로 2월 중순께 탈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일 만인 83년 3월 초 숨을 거두었다. 61세였다. 장례식 때는 샹송 가수 최양숙이 애잔한 목소리로 그가 작곡한 ‘세월이 가면’을 불러 장내를 숙연케 했다. 이진섭이 세상을 떠난 뒤 박기원은 ‘하늘이 우리를 갈라놓을지라도’ ‘그대 홀로 가는 배’ 등 남편을 추억하는 두 권의 책을 내놓았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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