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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평양 류경호텔 보셨나요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부


이번 추석 연휴 중에 초3 딸과 아침 일찍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나들이에 나섰다. 마침 ‘오늘의 프랑스 미술전’이 열리고 있었다. ‘마르셀 뒤샹 미술상’을 수상한 16인의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21세기 현대미술의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도시와 건축을 소재로 다룬 것이 많아 반갑고 신선했다.

 그중에서도 니콜라 물랭의 20분짜리 영상은 오랫동안 잔상에 남는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움을 헤치고 허름한 트렌치코트를 입고 마스크를 쓴 남자가 언덕을 올라간다. 이윽고 언덕 너머로 우뚝 솟은 삼각형 건물이 나타난다. 범죄나 공포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은 건물로 들어간 남자는 벽을 땅땅 두드리기도 하고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기도 한다. 콘크리트 덩어리, 평양의 류경호텔이다. 작가는 시뮬레이션과 리얼리즘을 결합해 내부를 황폐하고 스산하지만 신비로운 세계로 묘사했다.

 1987년에 착공한 류경호텔은 소련의 붕괴에 이은 경제난으로 92년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 후 공사가 재개된 2008년까지 16년 동안 형해(形骸)를 드러내며 서 있었다. 물랭은 이 시기에 류경호텔을 촬영했던 것이다. 하지만 105층, 330m의 콘크리트 뼈는 2009년 두바이의 로즈타워가 들어서기 전까지 호텔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북한은 체제를 과시하기 위해 한때 GDP의 2%에 달하는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그 후 류경호텔은 콘크리트 외피를 유리창으로 감쌌지만 호텔로 쓸 정도로 내부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1위에서 7위까지가 모두 아시아에 있고, 100위권 안에 드는 건물도 43개나 있다. 이 추세라면 미래에는 아시아가 100대 초고층 건물의 대부분을 보유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대건축의 흐름을 주도하는 유럽에는 100위 안에 드는 건물이 하나도 없다. 현대적 마천루의 모델을 제시한 것은 독일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였다. 또 아시아에 세워진 많은 초고층 건물을 유럽의 건축가와 엔지니어들이 설계했다. 그런데 왜 유럽의 건축가와 엔지니어들은 정작 자신의 고향에서는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할까? 첫째, 경제성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 역사도시를 훼손하고 개발의 도구로 사용되는 초고층 건물을 정부가 제한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새로운 디자인과 기술을 결합한 고도의 도시 건축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도 10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을 5개 이상 계획하고 있거나 건설 중이다. 초고층 기술 개발 경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높이와 크기를 내세우는 것은 이제 한물간 경쟁이다. 마천루의 대명사 뉴욕의 경쟁력은 몇 개의 높은 건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밀집한 도시 공간과 역동적인 보행문화에서 나온다. 높고 눈에 띄는 랜드마크보다 비슷한 규모의 건축이 좋은 집합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곳에는 길이 살아 있고, 문화가 꿈틀거리고, 경쟁력이 생긴다.

 거대한 건축 묘비, 류경호텔은 한국이 이제 ‘세계 최고, 최대’와 같은 ‘크기’의 경쟁 대오에서 벗어나 ‘질’과 ‘격’으로 승부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일깨운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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