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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한류와 정전




서승욱
도쿄 특파원


어렵게 매장 입구를 통과해도 한 발짝 전진하기가 힘든 인산인해, 전성기 배용준의 인기를 넘어섰다는 배우 장근석의 사진 앞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는 연령 초월 여성 팬들, 그 틈새를 비집고 카라의 CD를 쇼핑 바구니 속에 넣는 20대 남성팬….

 특파원 부임 한 달 만인 지난 주말 ‘한류 메카’라는 도쿄의 신오쿠보(新大久保)에 처음 가봤다. 코리아타운에 위치한 한류 전문매장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상상했던 수준 이상이었다.

 “옛날엔 유럽에서 살기 원했던 아내가 ‘슈퍼주니어’에 흠뻑 빠져 이제 ‘서울 근무에 도전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슈퍼주니어’의 기획사 사무실이 있는 청담동에 사는 것이 아내의 꿈”이란 일본인 친구의 말이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는 걸 이곳에선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한류의 주인공이 어디 아이돌뿐일까. 일본에서 한류를 관전하는 매력은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는 ‘한류의 진화’를 감상하는 데 있다. 신오쿠보의 한국 식품 매장은 한국 김치, 한국 젓갈, 한국 라면, 한국 과자, 한국 화장품을 사기 위해 몰려든 일본인들로 계산대마다 북새통을 이뤘다. 한국식 떡볶이와 팥빙수를 파는 길거리 판매대에 몰린 일본 손님들로 안 그래도 좁은 인도가 더 비좁게 느껴졌다.

 이런 ‘생활 속 한류’는 신오쿠보만의 현상이 아니다. 유명 백화점 지하 식품관에서 한국 상표가 붙은 식재료를 구할 수 있고, 순두부찌개와 삼계탕은 일본 샐러리맨들의 인기 점심 메뉴가 됐다. 긴자 한복판의 전광판에 뜨는 장근석의 얼굴과 지하철에 붙어 있는 한국산 과자 광고를 지켜보는 일은 도쿄에선 일상사가 됐다.

 한류 붐을 촉발시킨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첫 방영된 지 올해로 8년째. 한국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하고, 한국의 국가 브랜드까지 덩달아 업그레이드시키는 임무를 한류는 묵묵히 수행해 온 거다.

 그런데 한류가 끌어올린 국가 이미지를 단번에 실추시킨 사건이 지난주에 터졌으니, 서울발로 큼지막하게 보도된 대규모 정전사태다. 한류 수도 서울에서 벌어진 코미디 같은 소식은 일본 신문들과 일본 TV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됐다. 전력수요 예측의 ‘아마사(甘さ·해이함 또는 느슨함)’가 부른 참극이라는 게 일본 언론들의 대체적인 분석이었다. 한전 본사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책상을 치며 했다는 “여러분 수준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저 후진국 수준”이라는 멘트는 일본 신문 국제면의 큰 제목으로 뽑혔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주민들을 구출하는 장면, 물 공급이 중단된 수조에 억지로 물을 채워 넣는 횟집 주인의 모습, 가동이 중단된 은행 현금지급기 코너의 황량한 광경, 신호등이 꺼지며 엉망이 된 거리 풍경들이 지면과 전파를 통해 여과 없이 전달됐다. 원전 사고로 인한 유례없는 전기 부족 속에서도 무더운 여름을 거뜬히 이겨낸 일본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후진국 수준’이란 이 대통령의 말을 빼곤 설명하기 어렵게 됐다. “예고 없이 정전사태가 터졌다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큰일날 뻔했다는데 괜찮습니까.” 상대방에게 곤란한 질문을 잘 하지 않는 일본인들까지 이렇게 묻는 걸 보면 한국이 사고를 제대로 치긴 친 모양이다.

서승욱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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