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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6주년 2011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

소설적 증상으로서의 반복 - 김숨 소설의 한 양상

신상조

1. 증상으로서의 글쓰기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그림 속에 드러나는 '얼굴'과 관련한 작업은 흥미롭다. 얼굴이 없는 신체·물고기 형태의 머리를 한 여자의 나신·꽃이나 파이프가 대신하는 얼굴 등. 굳이 "얼굴은 주체를 표상하는 가장 확실한 장이다."라는 들뢰즈의 전언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다른 사물로 대체된 얼굴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한편으로, 그의 어머니가 흰 잠옷을 뒤집어쓴 채 강에서 자살했다는 화가의 가족사를 알고 나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린 마그리트가 목격했을지도 모르는 그 끔찍한 광경을 따라가 보라. 거꾸로 뒤집어 쓴 잠옷에 가려진 어머니의 얼굴, 때문에 거의 벌거벗다시피 했을 그녀의 아랫도리…. 결국 엄청난 외상(外傷)으로 자리 잡은 어머니의 주검은 토르소(torso)의 모티브를 띄고서 마그리트의 회화 속에서 반복되었음이 분명하다.

마그리트의 경우에서처럼 예술작품에서 다루어지는 '반복'은 흔히 작가의 신경증을 반영한다. 그러니 끝없이 순환하는 사고나 행위가 주체의 증상이고, 그 증상의 예술적 발현이 문학의 한 양상이라고 할 때, 김숨의 소설은 확실히 일종의 '증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설집『투견』과 『침대』를 시작으로, 장편소설 『백치들』『철』『나의 아름다운 죄인들』『물』 그리고 최근 발표한 소설집 『간과 쓸개』에 이르기까지, '반복'이야말로 이 작가의 소설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서둘러 언급하자면, 김숨식의 반복은 소설 속의 대상이나 현상이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게 할 만큼 압도적이며, 현실의 구체적인 세목이 지워진 낯선 지대로 우리를 이끈다. 언어와 서사의 매끄러운 결합을 일부러 방해하는 텍스트 앞에서 독자는 몹시 당혹스러운 것이다. 마침내 암묵적으로 당연하다고 전제되어졌던 소설적 문법이나 감각은 깨지고, 거기서 독자가 맞닥뜨리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낯섦'이다.


2. 부유하는 것들

일찍이 정신분석이 언어에 주목한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주체의 사유와 인식과 의사표현의 총체가 바로 언어이며, 무의식적인 주체는 이 언어를 통해 억압과 갈등을 제재하거나 스스로를 속이며 발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억압된 부분은 기껏 변형된 형태로 주체에게 돌아온다. 다시 말해, 한 요소(낱말)를 다른 유사한 요소(낱말)로 대체하는 은유나, 한 요소(낱말)가 인접한 요소(낱말)로 미끄러지는 환유의 방식이야말로 증상의 구조와 흡사하다. 방어기재가 가동하는 신경증자의 낱말은 다른 낱말로 대체되고, 대체된 낱말은 억압받는다. 혹은 인접한 낱말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무의식은 환유적인 방식을 통해 의식계로 방출될 뿐이다.

김숨의 소설에서 앞서의 방식으로 미루어 짐작되는 낱말을 발견하려면 먼저 첫 번째 소설집 『투견』(문학동네, 2005년)에 실린「중세의 시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수녀원의 원장처럼 엄격한, 불결한 속옷과 역겨운 냄새에 신경질적으로 민감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들에게서는 여느 모녀지간에 있을법한 애정이나 하다못해 애증의 모습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나'에게 체감되는 어머니는 '시선'으로 와 닿는 엄격함과 전지(全知)함이며, 내가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감정이라야 "어머니의 귀가 내 두 눈동자를 도려낼 것만 같다."(p50)라는 두려움이 전부다.

사실 '중세의 시간'이라는 제목이 함의하듯이, 이 작품에서 어머니의 시선은 '큰 타자'의 시선이며, 눈동자가 도려내질 것 같다고 느끼는 '나'의 불안은 강박증자의 거세공포증과 일치한다는 해석은 정신분석적 사족에 불과하다. 다만 여기서 쓰인 '눈동자'라는 낱말에 주의를 기울여야하는데, 눈(目)에 해당하는 낱말에 동그라미를 치자면 소설집 『투견』 전체에 걸쳐 숱한 예문을 건져 올릴 수 있을 정도다. 가령 「느림에 대하여」는 "오빠의 눈"과 그것에 상응하는 "천장의 구멍" 그리고 그 '구멍'과 같은 맥락에 놓이는 "어머니의 눈"이 서사를 진행해가는 데 필요한 핵심 요소다. 나아가 「부활」에서는 "눈동자…… 오른쪽……"이라는 문장이 앞뒤 문맥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정하게 반복되며, 심지어 중심인물은 눈동자가 "썩지 않는 플라스틱 덩어리"라면서 노인의 눈을 살 속에 넣었다 빼내거나 세척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행위와 거기에 동원된 신체는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와 「적막한 집」에 나오는 '눈'의 대체물, 즉 '망원경'과 '거울'을 환기시킬만한데, 호프만의 두 작품이 그러하듯이 김숨의 소설 역시 기괴한 이미지 외에 상징계적인 아무런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눈'이 "주체적 응시"일거라는 짐작은 그저 짐작일 뿐, 해석은 언제나 소설의 과잉된 이미지와 희박한 서사로 말미암아 힘겹게 봉쇄된다.

이처럼 『투견』 곳곳에 잠복한 '눈'과 같이, 김숨의 기표들은 인물이나 사물, 이미지와 함께 특정 소설이나 소설집에 붙박이지 않은 채 부유한다. 예로써 특정 작품을 대응시켜보자면, '눈동자' '검은 옷차림의 여자들' '자매' '붉은 녹' '못'… 이 모두는「부활」을 점령한 사물이나 이미지 그리고 인물들로서, 이러니「부활」한 작품만으로도 너끈히 후기작인 『철』의 사물이나 이미지를 복제할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백치들이 신고 있는 군화에 죽은 닭들이 밟혔다. 닭들의 대가리가 으깨지고 내장이 터졌다. 모가지고 부러졌다. 백치들은 구덩이에 죽은 닭들을 사정없이 파묻었다. 백치들이 양철 조각 같은 이빨을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p151)라는 『백치들』의 한 장면은 뒤에 발표한 「도축업자들」(『침대』문학과 지성사, 2007년)에서 완결된 텍스트의 형태로 확장된다. 그러니 작가의 어떤 작품을 손에 잡든 기시감이 들게 만드는 작업은 무표정한 패러디, 즉 '패스티시(Pastich)'에까지 다다른 느낌을 줄 정도이다.

소설집 『침대』와 장편 『철』(문학과지성사, 2008년)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는 의성어들의 반복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자면 발을 구르며 내는 소리 "쿵, 쿵, 쿵"(「도축업자들」)이나 틀니가 내는 소리 "떠걱떠걱"(『철』), 가위가 부딪치는 소리 "찰캉찰캉"(『철』) 등은 앞서의 경우처럼 개개의 작품들 사이를 부유하는데, 이러한 의성어들은 독자가 텍스트를 사유할 틈도 없이 청각적 인식에 먼저 와 닿고, 마치 "녹 조각 섞인 불그스름한 물"처럼 의식 전반을 점유한다. 게다가 한 문장이나 거기에 따르는 인물의 이미지가 통째로 호환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예를 들어 "살과 피를 말려 죽이시다."라는 서술형 문장과 그 주체는 「쌀과 소금」,「트럭」에서 복사한 듯 나란히 등장한다.

작가가 최근에 발표한 소설집『간과 쓸개』(문학동네, 2011년)나 「막차」(전경린 외,『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현대문학, 2011년),「대기자들」(김미월 외,『일곱 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 』,열림원, 2011년) 또한 기표들은 개별적 텍스트에서 일탈하여 부유한다. "쇠공이 머리를 부쉈어요……!"(「북쪽 방」, p152)라는 비명은 기어이 전작인『철』을 호명하며, '거울' 앞에서 재현되는 상황은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간과 쓸개」,「북쪽 방」,「흑문조」), 죽거나 떼로 번식하는 '귀뚜라미는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출현한다(「간과 쓸개」,「북쪽 방」,「흑문조」). 무대장치로서의 이러한 시도는 얼핏,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방식인 '컷업 기법'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기형적으로 뒤틀린" 인물들, 차갑거나 섬뜩한 사물과 이미지, 서스펜스적일만큼 신경을 자극하는 의성어의 반복은 텍스트가 독자의 가슴이나 머리에 닿기보다 감각적 인식에 먼저 와 닿도록 만든다. 그러한 섬뜩한 느낌은 흔히 그로테스크하다고 표현하는 '고스컬처(Goth Culture)'적인 경향과 더불어 독자들로 하여금 서술자의 존재를 잊고 미메시스적 '환영'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사건, 인물, 이미지, 언어)이 감지될 때 독자의 감각은 해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 텍스트로부터 끝없이 회귀하는 그것들은, 주체들로 하여금 상징계 저편으로 밀려나있던, 익숙하므로 오히려 섬뜩한 정서나 이미지를 길어 올리게 만든다. 억압되거나 폐기된 것들의 귀환, 김숨식 환상의 첫 번째 단계다.


3. 변화하는 반복의 양상들

행위·대사·플롯의 반복


『투견』에 이어 『침대』,『철』,『물』에 이르면 반복은 광물적 캐릭터·추상적 시공간의 설정·희박한 서사 등과 함께 작품들 전면에 등장한다. 문장에서부터 행위 혹은 모티브에 이르기까지 반복은 작가의 텍스트 전체에 비로소 관철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소설집 『침대』는 가장 문제적이다. 가령 김숨 소설의 초기 반복이 텍스트와 텍스트를 '부유는 것들'로서의 반복이었다면, 『침대』에서 실험되는 반복은 개별 텍스트 내에서 '문장'이 수없이 반복하거나 소설집 전체에 걸쳐 일관된 '무대장치' 및 '플롯'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반복의 세기는 전작들에 비해 한층 강화된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의 반복과 변주는 한정된 모티브의 반복으로 청각에 통일감을 부여하는 음악과는 달리, 결코 아름답거나 유쾌하지 않다는 것이다. 타악기의 스릴러적이고도 규칙적인 두드림이나 딱,딱,딱, 연속적으로 껌을 씹어대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하고 괴롭히듯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 변주되는 형태는 인물들의 행위와 대사의 형식을 한 채, 불쾌하고도 섬뜩한 정서를 형성한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오른쪽 유방을 잘라낼 거라고요."
침묵.
"그런데 오른쪽 유방이 아니라 왼쪽 유방이었어요."
침묵.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워야 할 텐데 걱정이지 뭐예요."
침묵.
"그래요, 관리인이 다녀가고 나면요."
침묵.
"관리인은 오후 두 시에 방문한다고 했어요."(「409호의 유방」,『침대』, p38)

이를테면 「409호의 유방」에는 단 두 명의 인물만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한 명의 서사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침묵'이라는 단어 하나뿐이다. 서술어 기능을 띤 '침묵'이라는 명사의 반복. 소설은 화자의 '남편'으로 짐작되는 인물이 다만 침묵하고 있다는 서사 정보를 제시할 뿐, 더 이상의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인 정보를 독자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때문에 독자는 '그'가 왜 침묵하는지 알 수 없고, 언제부터 침묵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침묵할 것인지에 관한 아무런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서술자가 서사 대상을 제시할 때 지각적이거나 심리적인 시점을 제시한다는 일반적인 규칙에서도 벗어나있다. 게다가 사실 '그'라는 인물이 실재하는지조차 독자들에게는 미지수다.

조금 더 서술적인 언설도 '정보'를 전달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가령 「침대」는 "그녀는 침대를 지켰다." 라는 문장이 수없이 반복되는데, 그러므로 인물의 행위는 한정된 그 범위 안에서 그치고 만다. 문제는 그러한 인물의 상황을 기술할 때 "그들은 그녀가 침대를 지켜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녀밖에는, 그 침대를 온전히 지켜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p43)라는 식으로 서술은 자명한 포즈를 취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독자에게 전부를 이야기해주는 것 같으나 보다시피 정작 알려진 사실은 도무지 없다. 어조조차 소거된 서술은 독자들이 분석하고 논평할 거리를 거의 주지 않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반복, 변주되는 상황과 인물의 행위를 독자가 아무리 종합해 봐도 서사는 점점 미궁으로 빠질 뿐, 하나의 서사 세계를 축조할만한 정보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개별 텍스트 내에서 행위와 대사는 기의가 소거된 채 납득할 수 없도록 자주 반복되며, 그 반복성이 서사 전체를 압도한다. "그들…… 때문이에요."라는 대사와 침대를 지키는 행위(「침대」), "닭들이 오지 않는군." "그러게 닭들이 오지 않아."라거나, "오늘은 4천 마리라고 하더군." "한 봉지마다 100마리씩"을 반복하며 도축업자들이 고무장화를 신은 발로 구르는 소리 "쿵, 쿵, 쿵" 혹은 그들의 광포하고도 다급한 숨소리 "숨! 숨! 숨!"(「도축업자들」), "노파는 …자매가 죽던 날을 떠올렸다."라는 서술의 반복과 함께 차례차례 죽어가는 여섯 자매의 죽음(「쌀과 소금」) 등, 『침대』는 기존의 소설 문법적 재현과는 거리가 먼, 작중 인물의 지각이라든가 감성 혹은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서술 형태를 취한다.

소설의 골격이라고 할 플롯 역시 모든 것이 철거되고 철골만 남은 건축물처럼 앙상하게 제시된다. 앙상하다보니 자못 노골적인 골격은 소설집 전체를 일관하는데, 배경은 부엌(「409호의 유방」,「두번째 서랍」), 침대(「침대」), 소파(「손님들」)를 벗어나지 않으며, 인물들의 역할도 매번 변주에 그쳐서, 다만 지키려는 자와 내쫓으려는 자로 나뉜다. 오후 두 시에 방문한다는 관리인이 409호를 비워달라는 임무를 띠듯이(「409호의 유방」, p31), 「침대」「손님들」「박의 책상」「두번째 서랍」의 인물들은 오직 '머무르기'만을 바라지만, 그들을 방문하거나 방문하려는 존재들의 수행 목적은 그 '머무름'을 위협함에 있다. 「손님들」에서 "멸실(滅失)"을 외치며 여자의 집을 파괴하러 온 '철거단원들'과 결국 여자의 집을 점거해버리는 '손님들', 그리고「침대」에서 여자에게 반복적으로 의무와 희생을 강요하는 '그들'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침대』는 인물·행동·시공간이라는 서사구성의 세 요소가 닮은꼴의 형태를 한 채 소설집 전체에 걸쳐 도식적이라고 할 만큼 반복되며, 보편적 재현으로서의 살과 피가 제거된 인물들의 행위나 대사는 낯설고도 섬뜩한 시공간과 인물 유형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 기괴함은 익숙한 상징계를 낯설게 함으로써 실재계의 효과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텍스트와 텍스트의 반영

개별 텍스트 내에서의 반복과 변주가 그러했다면, 다음으로 작가가 자주 사용하는 반복의 방식은 텍스트가 텍스트를 반영하는 방식이다. 그 중에서도 단지 기표나 이미지의 교집함에 그치는 반복은 앞서 '부유하는 것들'의 예들이 그러하다. 이미 언급했다시피「409호 유방」에 등장했던 사물이나 소리가 『철』의 사물이나 소리로 곧장 차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물』(자음과모음, 2010년)과 「흑문조」(『간과 쓸개』, 2011년) 같은 경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티브나 서사 자체가 거울로 비추듯 반영된다.

"누굴 불러? 누굴?"
"배관공 말이에요."
"배관공 따위가 이 집에 대해서 뭘 안다고 부른다는 거냐!"(『물』, p89, 90)

"그렇다면 밤새 말썽을 부린 것이 보일러가 아니라 보일러 배관이었군."
남편은 더 난감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배관공을 불러야했지만 남편은 작은방으로 들어가 버렸다.(「흑문조」, p164)

'막힌 수도 배관'이나 '물이 새는' 상황으로 묘사되는 비루하고 왜소한 현실, '어항'이나 '새장'에 웅크린 존재들, 낯선 타자였으나 점점 불편한 거주자로 변모해가는 '배관공'들은 두 작품에 나란히 공존한다. 게다가 한 작품 속의 남편 이름이 아예 '불'이라면,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남편은 뜬금없이 '화상'을 입는 연상적 형태를 취한다. 또한『물』의 저 '불'이 갖는 불온한 욕망을 상기시키듯「흑문조」에서는 '불화(火)'자를 그리며 활활 뻗어가는 담쟁이가 있다. 이처럼「흑문조」는 『물』을 축소하거나 다시쓰기 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그 모티브나 담화 요소가 닮은꼴이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는 위치에 이미「트럭」과『백치들』이 있다. 다시 말해「트럭」의 인물들은 산업역군이 되어 중동의 사막으로 떠났던『백치들』의 아버지들에 다름 아니고, 『백치들』의 이야기는 월남전과 파독 광부와 중동 근로자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인 「트럭」의 서사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결국, 청소년도서로 분류되는『나의 아름다운 죄인들』을 제외하면 작가가 쓴 세 편의 장편 중 두 편이 그에 대응하는 '샤도우 단편'을 거느린다는 결론이 나온다. 후일담과는 다른, 자신의 텍스트를 글쓰기의 참조대상으로 삼는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발상과 문법의 반복이라기보다는 자기 충족적 글쓰기의 사례로 봐야 옳을 것이다. 혹여 기존 장편의 축소나 변주, 혹은 단편을 부풀렸다는 혐의가 있을 수는 있으나, 자신의 텍스트를 과감히 취사함으로써 문학적 정체성을 확대?확립해나간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기능적인 면의 시사를 던져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약하자면, 『투견』에서부터『간과 쓸개』에 이르기까지, 김숨식 반복은 우선, 부유하는 기표들로서의 반복이 있고, 개별 텍스트 내에서의 행동·대사의 반복과 변주가 있다. 아울러, 소품만 바뀌는 무대장치에 서너 편의 연극을 차례로 올리는 것 같은, '배경과 구성'을 아우르는 반복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나아가 단순히 기표의 차원에 머물렀던 반복은 텍스트와 텍스트 간의 이미지와 모티브의 차용으로 확장되고, 이미지와 모티브의 차용은 다시 텍스트와 텍스트의 전체적 반영으로까지 실현된다.

반복의 해체와 심화

최근에 이르러, 김숨 소설의 반복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순화되거나 다소 해체된 양상을 띤다. 부유하는 기표나 사물들의 개체도 상당수 자취를 감추었으며, 개별 작품 내에서 강박적으로 실현되던 문장의 반복과 변주도 급격히 줄었다. 작품들을 통해 자꾸만 반복하다보니 '과잉'이나 '증상'이 어느새 길들여진 것이다. 프로이트가 '쥐 인간'에게 설명했다시피, 주체의 의식 바깥으로 끄집어낸 무의식은 발굴되어버린 폼페이의 유물과도 같다. 다시 말해, '소설 쓰기'를 통해 드러난 작가의 무의식은(유물은) 완벽한 상태로의 보존이 끝났으므로 결국 파괴를 향한 진행만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은 그로테스크한 사물이나 인물, 혹은 의성어 등으로 섬뜩하고도 시끄럽게 점철되던 형태가 사라진 대신, "저 봐, 누군가 타고 있잖아."(「막차」)라면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고속버스의 승객에 대한 '그녀'의 집요한 관심으로 드러나거나, "나는 네 번째입니다."(「대기자들」)라며 병원에서의 대기 순서를 거듭 확인하는 '나'의 선병질적인 행동으로 표출된다. 그렇다면 반복은 미메시스적인 방식을 벗어나, 오히려 주체 내부로 심화되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과연, 최근작『간과 쓸개』의 주체들은 이제 '외부'가 아니라 '내부'가 문제라는 듯, 그들이 머무는 '집' 어딘가에는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귀뚜라미나(「간과 쓸개」「북쪽 방」「흑문조」) 물이 솟는 구멍(「흑문조」), 낯선 침입자(「육의 시간」) 혹은 마당을 기어다니는 누군가가(「내 비밀스런 이웃들」) 반드시 존재한다. 게다가 주체가 기다리는 동거인들은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나타나지 않거나 귀가하지 않거나 혹은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그 존재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겨우 암시적일 뿐인데, 그들이 있는 바깥은 '기아'와 '전쟁'과 '지진'이 있거나(「육의 시간」), 부당하게 해고된 노동자들이 모여서 촛불시위를 하는 곳이다(「내 비밀스런 이웃들」). 반면에 주체들의 행위는 대부분 극단적이리만큼 정물적인데, 마치 바깥이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는 듯 탈주에 대한 욕망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고도(Godot)'를 기다리는 세 남자처럼, 다만 '돌아오지 않는 모종의 도래'를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다.

반복하자면, 『투견』에서부터『침대』와『철』까지의 인물들이 '외부로부터 예정'된 타자들로 인해 주로 불안해하는 존재들이었다면, 바야흐로 『물』과『간과 쓸개』의 존재들을 괴롭히는 것은 이미 화자와 '동거'하는 그 무엇이거나 화자의 '내부에 증식'하는 불안이다. 작가는『물』을 쓰면서 바슐라르의 사유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작가의 말'에서 고백했는데, 그즈음 영향을 받은 작품이 비단『물』만은 아닌 듯, 『간과 쓸개』역시 악착같은 생명력을 지닌 생명체들이 소설 이곳저곳에서 우글우글 번식하거나 어떤 상황이 몽상적으로 계속해서 증식한다. 주체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그것들은, 밥솥이며 냄비에서 튀어 오르다 못해 끝끝내 지하실을 가득 메운 '귀뚜라미 떼'와 아무리 버려봤자 옥상과 검은 비닐봉지와 욕실에 바글바글 들어앉은 엄지손가락만한 '자라'들, 혹은 부엌과 욕실에 천지로 파헤쳐진 '구멍'의 모습을 한 채 『간과 쓸개』의 존재들을 괴롭힌다. 그러기에 밀폐된 공간에서는 자신의 숨소리조차 벽에 부딪쳐 증폭되듯이, 불안은 바투 다가드는 사방의 벽과 바닥과 천장처럼, 집안에 들어앉은(혹은 스스로 갇힌) 저 자폐증적인 김숨의 주체들을 서서히 조여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안으로서의 '증상'은 줄어든 게 아니라 오히려 한층 은밀해졌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때문에 문제는 이제 일상이 서스펜스가 되어버린 현실이다.


4. 증상을 넘어

버스는 노파의 눈앞에서, "유령인가" 싶은 그녀의 남편을 태운 채 고속도로 휴게소를 유유히 빠져나간다.(「막차)」현실이라고 믿었던 광경이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는 소설의 이 마지막 장면은 최근 김숨 문학의 환상성을 결정적으로 가시화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저 고속버스에는 글쎄 사람이 한 명도 없지 뭐예요."라며 거듭거듭 궁금해 하던 노파의 과잉된 질문, 즉 지나치게 초과된 '반복'으로 말미암아 분출하는 실재의 효과다.

이렇듯 김숨은 '반복'이라는 서술적 형식에 천착해왔다. 위기와 반전이라는 플롯을 비껴가거나 텔레비전의 드라마처럼 빤한 서사를 해체해가며, 혹은 희박한 서사로써 재현의 한계를 넘어 아예 이탈을 시도해왔다. 그러한 글쓰기가 '증상'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추론은 이 글의 도입부에서 이미 이루어졌거니와, 김숨의 문학에서 발견되어지는 미학은 그렇듯 자신의 내면과 맞대면한 자의 진정성에 뿌리가 닿아있겠다.

변화무쌍한 형식이 곧 작가의 역량으로 평가받는 시대, 동어반복적인 모든 형태를 끔찍이 혐오하는 오늘날의 문학 판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가 낼 수 있는 목소리와 그에 따르는 담화 요소란 진정 얼마나 다종다양할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기도 하려니와,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요구거리다. 무릇, 작가란 자기 굴을 열심히 파는 사람들이고, 그 각자의 처소에서 오로지 자신만의 언설로 세상과 소통을 시도하는 자들이 아니던가.

한편, 의도적이든 작품의 성격상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든, 김숨 소설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반복은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며, (독자의)의식을 노예화한다. 스릴러 영화에서 동원되는 음향의 효과가 흔히 그러하듯, 서스펜스적인 반복이야말로 강요되는 의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상징 질서'가 해체된 자리에 대신해서 들어서는 것은 다름 아닌 '상상 질서'이다. 그런데 김숨의 글쓰기는 현실을 삭제하면서 미래의 가상공간으로 비약해버리는 박민규식 글쓰기나, 인터넷 게임의 서사나 SF 서사의 클리셰를 발판으로 도약하는 윤이형식 글쓰기, 혹은 서사의 핍진성을 아예 소거함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상상과 현실이 이물감 없이 공존하도록 만드는 염승숙식 글쓰기, 또는 개인적 두려움을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끌어올린 편혜영식 글쓰기와도 구분된다. 그리고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반복이라는 형식이다. 즉, 작가가 반복으로 밀고나간 그 극단의 자리에 시선을 고정할 때, 현실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낯설고 기괴한 김숨식의 환상, 즉 일상이 서스펜스인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소설의 대중성을 요구하는 사람들, 그와는 무관하나 어쨌든 스토리 전개가 또렷하고 사건이 생생한 소설을 읽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김숨의 작품은 그리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적 지향점이 분명하며, 또 그 지향점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한 소설을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김숨의 소설이야말로 충분히 인상적이고 만족스럽다.

최근에 발표한 김숨의 작품들 역시 인물들의 성격은 정물적이거나 유폐적이다. 서사의 장치 또한 대다수 평면적이기는 여전하다. 그렇더라도 반복의 질감은 예전처럼 거칠지 않다. 분명 소설의 전개는 매끄러워졌고, 독자와의 소통도 이전보다 활달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현실에 내재된 어두움과 일상의 섬뜩한 기미들은 한층 가독성이 붙은 독자들 앞에 불쑥, 허를 찌르듯 전개된다. 요컨대 개성적이거나 일상적인, 그러면서 집요한 저 '반복'은 우리들 경악의 표정을 잔해로 남긴 채, 돌연히 우리들의 의식을 주파한다. 급기야 김숨이 서술한 세계는 실재를 노출하며 동요하는데, 그 순간 우리는 흡사 반전과도 같은 월경을 경험한다. 몹시 낯익은 곳, 그러나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으로.

* 마그리트에 관한 지식은 http://blog.naver.com/asekumza/50002304361dlp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음을 밝힙니다.


평론 당선 소감

호사·여유로 비춰지던 읽기와 쓰기, 죄의식 털어내






그즈음, 습한 무더위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고, 먼 도시들마다 줄곧 폭우에 관한 흉흉한 얘기가 들려왔다. 그 어느 때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문학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아주 진지하게 ‘그만둘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황홀한 꿈을 꾸는 게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불가능한 꿈을 꾸는 내가 끔찍했기 때문이다.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라도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게 문학이라는 믿음은 착각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선 소식을 받은 날, 우리 동네 사거리에는 ‘2011대구육상선수권대회’ 치른 것을 자축하는, “시민 여러분께서 해 내셨습니다”라는 글자가 박힌 현수막이 펄럭였다. 그 문구를 쳐다보다가, 어쩌면 나는 ‘해’ 냈다기보다는 문학에 기대어 뭔가를 저지른 느낌이 들었는데, 하기야 그 저릿하고 묵직한 감상 역시 속절없이 지나갈 터였다. 그리고 한창 뒷바라지가 필요한 남편과 아들들에게 비로소 변명거리를 마련한 게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따랐다. 무엇보다 나의 ‘읽기’와 ‘쓰기’가 호사나 여유가 아닌, 일종의 다른 성격을 띠게 되어서 기뻤다. 물론 개인적인 사정이겠으나, 거기에 따르는 죄의식은 나를 너무나 오래 괴롭혔으니….

 어쨌든 그날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예컨대 황정은의 ‘뼈도둑’을 읽었고, 손보미의 ‘폭우’와 김미월의 ‘질문들’과 박형서의 ‘아르판’을 읽었다. 고백하자면, 박형서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울컥, 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내 허위와 기만과 알량한 한계를 폭로하는 대상은 언제나 저 무구인 소설들이다. 한편으로, 나를 가르치신 김원우 선생님께서는 문학 앞에서 납작 엎드러지는 자세를 항상 강조하셨다. 그 ‘납작’이라는 어휘에 실리는 단호함을 나는 여전히 존중한다.

 소중한 기회를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 드린다. 더 열심히 읽고 씀으로써 보답하겠다. 학교의 여러 선생님들과 ‘물빛’의 선생님, 또한 날마다 기도해주시는 시어머님과 친정 언니, 그리고 나머지 식구들 모두한테 감사 드린다. 끝으로 그저 편협하고 무지함에 불과했던 나를 이만큼 이끌어주신 손정수 선생님께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신상조=1964년 구미 출생,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평론 심사평

정신분석학의 창의적 적용 … 문제의식 설득력 있게 풀어내





평론 본심 심사 중인 김미현(왼쪽)·황종연씨. [변선구 기자]

문학평론에서 시각의 적절함은 의무이고, 시각의 자유는 권리다. 본심에 올라온 8편의 응모작은 전반적으로 문학평론의 의무에는 충실하고, 권리에는 미흡한 양면성을 동시에 보여줬다. 신인은 모름지기 의무보다는 권리에 더 예민해도 용서 받는 특권을 충분히 누려야 한다.

 주로 논의된 4편 중 2000년대 시에 나타난 늑대 소년의 잡종성에 주목한 ‘아이의 귀환, 모글리 신드롬’(박화자)은 야심 차다. 상징질서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방언을 창출하는 중간자적 주체로서 ‘아이’를 설정하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기이한 서정’이나 ‘가능성의 언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이 기존의 미래파 논의와 겹쳐진다.

 ‘증식하는 이야기, 글쓰기의 미로-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눈』 에 대하여’(유인혁)는 신선하다. 돌파가 아닌 탐험 중심의 미로를 위해 최제훈이 선택한 소설 전략이 미스터리의 지속을 통한 이야기의 무한 확장이라고 본다. 정답에 가까운 분석인데, 작가의 의도에 너무 순종하는 ‘착한 평론’이 되어 버렸다.

 ‘출구 없는 미로, 그 안과 밖-편혜영론’(황정윤)은 편혜영이 그려 내는 ‘공포’의 과정을 ‘은폐-배제-역설’ 중심으로 정치하게 분석하고 있다. 체계나 이론이 탄탄하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기존의 편혜영론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미로 이미지가 지니는 양면성, 즉 출구 없음으로 오히려 출구를 상기시킨다는 결론도 다소 도식적이다.

 당선작인 ‘소설적 증상으로서의 반복―김숨 소설의 한 양상’(신상조)은 김숨 소설의 신경증적 증상인 ‘반복’에서 “ 자신의 두려움과 맞대면한 자의 진정성”을 읽어 낸다. 억압되거나 폐기된 것들을 귀환시키는 김숨 소설의 반복 양상을 세련된 정신분석학 이론과 연결시키면서 창의적으로 소화하고 있다. 신선한 문제의식을 차분하게 설득하는 내공도 만만찮다. 좀 더 패기 있는 분석과 서술이 요구되지만 내공을 훼손시키지 않는 한에서 앞으로의 보완점으로 삼기 바란다.

◆본심 심사위원=김미현·황종연(대표집필 김미현)
◆예심 심사위원=권혁웅·정영훈

평론 본심 진출작(8편)

● 김진홍 : ‘시간의 시를 읽는 마녀-최승자론’
● 박화자 : ‘아이의 귀환, 모글리 신드롬’
● 신상조 : ‘소설적 증상으로서의 반복-김숨 소설의 한 양상’
● 유인혁 : ‘증식하는 이야기, 글쓰기의 미로-최제훈의 『일곱 개의 고양이눈』에 대하여’
● 이강진 : ‘뒤틀린 아이들의 삐딱한 혁명-장석원과 송경동 시의 정치적 가능성’
● 이정현 : ‘매질을 견디는 사람들-천운영 소설의 인물들’
● 한상현 : ‘추문을 헤쳐나가는 방법-편혜영론’
● 황정윤 : ‘출구 없는 미로, 그 안과 밖-편혜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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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