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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도적같이 다가올’ 그날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미국 하버드대의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 교수는 지난해 4월 외교 전문 격월간지 ‘포린어페어스’에 ‘복잡계(複雜界)와 붕괴 - 혼돈의 벼랑에 선 제국들’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을 기고한 바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제국의 멸망이 서서히 다가오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닥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주된 이유를 국가 재정위기에서 찾았다. 재정위기가 급격한 국방비 삭감으로 이어질 경우 제국의 패권적 위상이 순식간에 약화될 수 있는데, 바로 현재의 미국이 그 경로를 따라가고 있다는 경고였다.



 올해 8월 초 그의 예측은 거의 현실로 나타났다. 오바마 행정부와 미 의회가 연방정부 부채상한 증액과 재정지출 감축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디폴트(채무 불이행) 위기에 직면하자 미국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미국의 신용등급을 70년 동안 유지해 왔던 AAA에서 AA+로 강등했다. 이는 곧바로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의 위기를 불러일으켰고 세계 경제는 패닉 국면에 접어들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순식간의 파국이었다.



 “미국 안보에 대한 최대 위협은 우리의 채무에 있다.” 마이크 멀린 미 합참의장의 이 발언은 현재의 재정위기가 21세기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국가안보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오바마 대통령은 향후 10년간 연방정부 지출을 2단계에 걸쳐 총 2조4000억 달러 줄이겠다고 의회와 합의한 바 있다. 가위 천문학적 감축이다. 이 가운데 사회보장이나 복지, 의료 등 경직성 예산을 제외하면 줄일 수 있는 부분은 결국 국방예산뿐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정적자 완화를 위해 향후 10년간 국가안보 예산을 4000억 달러 줄이겠다고 제안했지만 이에 대한 의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해리 리드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는 2021년도까지 국방비를 1조 달러 감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공화당 상원의원들 또한 8000억 달러 정도는 삭감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오는 11월까지 이 문제를 논의할 상원 특별위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알 수 없지만, 국방비 감축 규모는 2011~2021년에 5000억 달러를 훌쩍 넘어설 것이라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이미 그 조짐이 가시화되고 있다. 미 상원은 지난 13일 2010년도 5700억 달러에 달하던 기본 국방예산을 5130억 달러로 삭감했다.



 문제는 이러한 미국의 국방비 감축이 한·미동맹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대규모 남침 같은 한반도 유사시에 미국이 제공할 막강한 전시 증원전력은 주한미군, 한미연합사와 함께 동맹의 중추를 이루는 핵심 요소다. 연합작전계획 5027은 이 경우 미국이 100일 이내에 지상군 65만 명, 항공기 2000대 이상, 2개 항공모함 전단을 한반도에 투입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예산 제약 분위기가 이어진다면 이처럼 엄청난 전력 증원이 가능할지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초 로버트 게이츠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은 한반도 유사시 대규모 전력 투입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유사시 상황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미 한·미동맹의 효율적 운용은 예산의 제약을 받고 있다. 용산기지 이전비용 20억 달러, 연합토지관리계획(LPP) 소요비용 34억 달러, 복무 정상화 계획(tour normalization) 예산 51억 달러 등 미 태평양사령부(PACOM)가 요청한 총 107억 달러 규모의 주한미군 관련 예산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장으로 전용된 주한미군의 정보자산 공백은 아직 보전되지 않았고, 재래식 탄약이나 특수탄, 정밀유도탄 등 탄약 지원 분야에서도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같은 추세라면 전시는커녕 평시 동맹 유지조차 쉽지 않은 형국이다.



 다시 퍼거슨 교수의 불길한 예언으로 돌아가 보자. 미국 국가재정이 악화일로로 치달아 디폴트 사태가 닥쳐온다면 한·미동맹의 존재 자체가 경각에 달릴 수도 있다. 우리는 과연 ‘도적같이 다가올’ 그날을 대비하고 있는가. 동맹을 살리기 위해 엄청난 재정적 희생을 치를 각오가 돼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다른 대안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는가. 동맹은 생명체와 같다. 진화할 수도 있지만 퇴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동맹에 대한 과거의 낙관주의적 타성에서 벗어나 한·미동맹의 현재와 미래를 냉철하게 조망하고 그 안에서 한국의 운명과 안보구도를 새롭게 설계해야 할 때다.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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