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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전통무용의 대중적 진화 꿈꾸는 춤꾼 … 서울시무용단장 임이조

임이조(林洱調·61)는 춤꾼이다. 무형문화재 승무 전수조교이며, 살풀이춤 이수자다. 인간문화재 이매방(85) 선생에게서 40년 가까이 춤을 배웠다. 근래에 임이조는 한량무를 더 많이 춘다. 원래는 한량·각시·주모·스님, 네 명이 등장하는 이야기극이다. 그런데 임이조는 이것을 혼자 춘다. 1인극으로 그가 새로이 창작했다.



“전통춤으로 ‘백조의 호수’ … 욕먹어도 도전한다”

임이조는 서울시무용단장이다. 전통춤꾼으로서 이 자리에 오른 것은 그가 처음이라 한다. 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는 ‘백조의 호수’다. 지난해에 임 단장이 만들었다. 차이콥스키 음악에 맞춰 전통 춤사위가 섞인 현대무용을 한다. 임이조표 ‘백조의 호수’는 올 11월 상하이에 수출된다. 국제아트페스티벌에 공식 초청을 받았다. 80명의 스태프를 인솔해 나간다. 여러 면에서 임이조의 춤 인생은 ‘파격’이다. 그는 “전통무용도 대중과 같이 호흡해야 한다”면서 “사람들이 욕을 하거나 말거나 계속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성시윤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 ‘백조의 호수’부터 얘기해보죠. 차이콥스키 음악과 전통 춤사위로 만든 무용극이라고요.











“네. 음악만 차이콥스키 음악이고요. 한국 창작무용이라고 보시면 돼요. 버선끝, 손끝, 발끝 동작은 한국 춤사위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한국 춤은 어느 음악에든지 다 출 수 있는 춤사위예요.”



●가장 먼저 배운 춤은 발레라면서요.



 “여섯 살 때 발레를 배웠어요. 그래서 발레나 클래식을 좋아하죠. 하지만 ‘백조의 호수’는 편안한 마음에서 만든 작품은 아니에요. 많은 질타를 각오하고 만들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요.



 “사실 심청이, 춘향이, 황진이라든지 아주 좋은 소재가 우리에게 많아요. 그런데 이걸 가지고 외국에 가면 쉽게 어필이 안 된다는 겁니다. 서양 스토리를 들고 나간다는 게 참 안타깝죠. 하지만 외국인들도 자기네들이 쉽게 느낄 수 있고, 빨리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원하는 것 같아요. ”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하시는 거군요.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해야죠. 구경하고 나오면서도 ‘저게 무슨 작품이야’ 하고 관객이 이해를 못하는 작품도 많거든요. 그런 작품을 보면 작가 혼자서만 추상적인 생각을 한 것이에요. 관객들에게 쉽게 어필되는 작품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객석에서 봤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아무튼 춤을 아주 일찍 시작하셨네요.



 “저희 어머니가 현대무용을 하셨어요. 결혼하시고 춤을 접으셨죠. ‘딸을 낳으면 무용을 시켜야지’ 하셨대요. 저 데리고 춤도 많이 보러 다니셨는데, 공연 보고 나면 제가 흉내를 그렇게 잘 냈대요. 그래서 송범(1926∼2007) 선생님께 발레를 배우게 하셨어요. 국립무용단장을 아주 오랫동안 하신 분이죠.”



●집안이 유복하셨나 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진 호강하고 살았죠. 저희 아버지가 미국문화원 공보실장도 하셨으니까요.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모가 저를 맡아 키우셨어요. 제가 가자마자 아버지가 금방 사업에 실패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뒷받침 없이 춤을 배웠어요. 그래서 고생 많이 했죠.”



 그의 춤 창작은 일찌감치 시작됐다.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 같은 반 여자친구의 초립동이 옷을 빌려 입고 즉흥 춤을 췄다. 중학교 1학년 때 나간 ‘충남예술제’에선 남방춤을 역시 즉흥적으로 췄다.



 “그런 인연으로 자꾸 춤을 추게 되더라고요. 저희 어머니를 아는 분이 공짜로 발레도 가르쳐주셨고요.”



 열여덟 살에 그는 은방초, 김소희 같은 국악계의 거물을 만났다. 그리고 열아홉에 이매방을 만났다. “이매방 선생님이 승무를 추시는데, 소름이 쫙 끼쳤어요. 한국무용이란 게 저렇게 절제된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구나. 저게 한국무용이구나 싶었죠. 춤을 깨닫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어요.”



 그 인연이 이제 40여 년이 됐다. 그는 춤으로 자수성가를 했다. 단국대 체육과를 다닐 때에는 휴학을 세 차례 했다. 형편이 어려워, 때론 외국 공연에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 바람에 대학을 10년 넘게 다녔다. 그러고선 30대 중반이던 85년에 자신의 무용단(‘선’ 무용단)을 만들었다.



●무용단을 일찍 만드셨네요.



 “그때 제가 방송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임이조’ 하면 대한민국에서 방송을 제일 많이 하는 무용수였어요. 방송 활동을 하다 보니 단체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무용단을 만들었죠.”



●젊은 나이에 무용단 만든 것에 대해 주위 선배들은 뭐라 하셨나요.



 “은방초 선생님이 저를 보고 ‘냄비 뚜껑이 끓지도 않고 넘었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를 굉장히 영악하게 여기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춤에 미쳐 가지고 판 벌이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발표회를 많이 하고 빚도 많이 졌어요. 뭐, 공연을 정말 무한정 했죠. 저를 알리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방송도 열심히 나갔고요.”



●왜 그렇게 본인을 알려야 했나요.



 “내가 조건이 안 되니까요. 무슨 ‘대학 교수’도 아니고, 집안 뒷받침도 없으니까요. 나를 알려야 사람들이 나를 쓰죠. 나를 모르는데 누가 나를 찾겠습니까. 그래서 방송을 많이 했던 거죠. 그러면서 명창, 명인들이랑 많이 친해졌죠. 그 덕에 제 춤도 많이 좋아졌어요. 생음악에 하다 보니 춤의 맛이 발전한 거예요. 이생강 선생님 같은 분들이랑 같이 공연을 했으니까요. 저는 녹음 테이프에 춤을 춘 적이 거의 없었어요. 아무튼 그래서 ‘임이조’라는 이름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거죠. 그게 제 노력이었어요. 지금 서울시무용단장 하면서 어느 정도 관객이 모이는 것도 ‘임이조라는 이름 때문에 모인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춤꾼으로 춤을 추는 것과 무용단장을 하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죠.



 “그렇습니다. 서울시무용단장 중에 임기 못 채우고 나간 분들도 많아요. 제가 보니까 ‘희생’이 중요해요. 단장으로서 권위적으로 행동하기보다 희생을 먼저 해야 해요. 정기공연 할 때면 제 아내가 백몇십 명 반찬을 차려 갖고 와요. 우리 집사람이 음식점도 했던 사람이라 반찬을 열몇 가지 해서 뷔페식으로 차려 가지고 와요. 그러면 전부 다 감동들을 하잖아요. 또 저희 서울시무용단이 ‘찾아가는 공연’ 같은 것을 많이 하는데요. 제가 단원들한테 그렇게 얘기합니다. ‘무대가 좋네, 나쁘네, 이런 얘기 하지 마라. 내가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기도하는 마음으로 춤을 추면 관객들이 좋은 무대, 귀한 무대로 인정을 한다’고요.”



●그럼에도 전통춤이 인기가 많지 않습니다.



 “우선 지루하다는 거예요. 전통춤은 자주 보고, 가까이 앉아서 봐야 신도 나고 흥도 납니다. 무대 멀리서 우리 춤을 볼 때는 아주 느리지 않습니까. 서양무용처럼 동작이 역동적이지도 않고요. 게다가 우리 춤은 웬만큼 잘 추지 않으면 감동을 못 줘요. 호흡에서, 내면에서 나오는 춤이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통춤도 어필할 수 있는 소재와 흥미 본위로 가야 해요. 그럼 ‘진정한 예술이 나올 수 있을까’ 걱정스럽긴 하죠. 순수하게 예술만 한다면 관객이 많이 오나, 적게 오나를 따지지 말아야 해요. 그런데 저는 단장으로서 관객 숫자로 평가를 받거든요. 그러니 대중과 호흡을 같이해야 해요. ‘백조의 호수’를 만든 것도 어떻게 보면 제가 쇼맨십을 보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전통춤 하는 사람인데, 하필이면 왜 그걸 했겠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욕을 하거나 말거나 그런 도전도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인극 한량무, ‘백조의 호수’ 등은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이런 그를 스승 이매방 선생은 어떻게 볼까. 자기에게서 배운 춤을 제자들이 변형하는 것을 싫어한다. 전통을 고집한다. 그런데 임이조는 스승에게 배운 승무나 살풀이춤보다는 자신이 창작한 한량무를 더 많이 춰왔다.



●스승과 사이는 어떻습니까.









임이조 단장은 국립무 용단장을 지낸 송범(위) 선생에게 발레를 배우 며 춤에 입문했다. 임 단 장이 수양어머니로 섬긴 국창 김소희(가운데)는 임이조의 평생 스승인 이매방(아래) 선생을 그 에게 소개해줬다.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에 나란 존재가 있죠. 선생님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겁이 나요. 선생님이 계시기 때문에 경거망동을 좀 덜 하게 되지 않나 싶어요. 예인이 지켜야 할 것도 많이 말씀해주셨고요. 그래서 따뜻한 연이 많아요. 여러 가지 희로애락 속에서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제 머릿속을 떠나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 집사람도 선생님이 소개해 주셨고요. 별것 아닌 것 같고 노하셔서 섭섭할 때도 있지만, 마음에 그런 게 남진 않습니다.”



●한량무를 추는 것에 대해 스승께선 뭐라 하시나요.



 “제가 78년부터 한량무를 췄어요. 그래서 이제 ‘임이조’ 하면 사람들이 한량무를 떠올려요. 선생님은 ‘승무, 살풀이 전수자가 돼가지고서 한량무를 춘다’고 막 뭐라 하셔요. 그래서 요즘은 제가 승무도 많이 추고 있습니다. 호호호.”



●한량은 ‘돈 잘 쓰고 잘 노는 남자’ 아닌가요.



 “제가 추구하는 한량은 풍류를 알고, 멋을 아는 남자예요. 벼슬이나 관직에 구애 받지 않고 초월해서 멋을 즐기는 남자요.”



 임이조의 지향점은 ‘한량’인가 보다. 그가 손수 지은 이름 ‘임이조’에서도 그게 엿보인다.



 “본명은 임규흥이에요. 임이조는 예명이고요. 제가 사주를 좀 보는데요. 제 사주에 물이 부족하대요. 그래서 물결 이(<6D31>)자와 고를 조(調)자로 예명을 지었어요. 물결이 고르면 춤 추는 사람에게 좋지 않겠나 해서요.”



●선생님 사주가 어떤데요.



 “글쎄요. 돈복은 없고요. 도 닦는 팔자더라고요. 남에게 봉사해야 하고요. 그러면서 명예를 좇기보다는 많은 보람을 남겨야 하는 운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이조 단장은 전통예술의 대중화에 자신의 운명을 건 듯하다. 대중에게 친숙한 춤꾼이며, 예술단체를 이끌고 있으니 그에게 딱 맞는 일이다. 그는 10년째 자신의 공연을 기획해주는 강현준(43) 유민공연기획 대표와 함께 지난 7월 ‘부지화(不知畵)’라는 이름의 전통예술 공연 브랜드도 선보였다. 시는 알지만 그림은 도통 모르던 문인들을 꼬집는 문구 ‘백일소소 부지화(白日昭昭 不知畵, 밝고 밝은 대낮에 그림을 알지 못한다)’에서 따온 이름이라 한다. 춤, 소리, 음악이 어우러진 공연을 일년에 두어 차례 선보인다고 한다. 임 단장의 ‘파격’이 전통예술의 대중화에 어떻게 기여할지 궁금해진다.  



What Matters Most?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뭐 뻔하지 않겠어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춤이죠. 제가 태어날 때부터 숙명적으로 춤을 추게끔 돼 있었어요. 어머니 태몽에 호랑나비가 나왔다니까요. 나비가 춤 아니에요. 저는 죽는 날까지도 마음속으로 춤으로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춤은 내 삶 자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친에게서 춤을 이어받았고, 죽는 날까지 제가 춤을 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요. 춤을 못 춘다 하더라도 후진을 위해서 할 일이 있으니까요.”



j 테일 >> “김덕수 그 친구, 이렇게 유명해질 줄 몰랐죠”













임이조는 일찍이 초등학교 5학년 방학 때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전통예술을 하던 오춘광이란 사람이 소년소녀들로 구성한 패거리의 단원이 되면서다.



 “지방 극장에서 공연을 했죠. 그 시절만 해도 극장에서 영화 한 편 상영하고 국악 공연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또 영화를 상영하고요.”



 비슷한 또래의 초등학생 다섯 명이 모인 공연단이었다. ‘다섯 명의 천재 소년소녀’라는 이름이었다. 공연을 하고 나면 출연료로 500원, 그리고 공연이 늦어지면 야참비로 200원을 받았다 한다. 멤버 중에는 사물놀이로 유명한 김덕수도 포함돼 있었다.



 “저보다 두 살인가 아래였어요. 빵빵하게 생긴 친구가 장구 하나는 참 야물딱지게 친다 싶었죠. 국악인들이 ‘김덕수’ ‘김덕수’ 하는데 나중에 보니 그 친구였어요. 그렇게 유명해질 줄은 그때 생각도 못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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